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77] 의심이 사라질 때 | 생각이 현실이 된다

Buddhastudy 2025. 2. 6. 19:47

 

 

깨닫고

깨달음에 대한 의심을 내려놓는 것

 

의심을 내려놓는 게

법안을 뜨는 거예요.

깨닫는 것은 혜안을 뜨는 거고.

 

혜안을 뜬다이 말은

돈오하는 거고

그런데 돈오 이후에 점수가 있다.

점수는 여기에 따라붙는 의심을 이겨내는 게 점수다, 이거예요.

이게 수행이에요.

 

수행의 내용은

이 지극히 당연한 깨달음에 대한 자기 의심을 내려놓는 거다.

근데 이것이

여러분도 지금 무슨 말인가 이해는 되죠.

실제로는 시간이 많이 걸려요.

돌아보면 또 의심하고, 돌아보면 또 의심하고

그런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 의심을 이겨내는 제일 좋은 방법은

전통적으로는

깨달은 사람하고 같이 사는 거예요.

의심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깨달은 사람하고 같이 사는.

 

실제로 그렇게 했어.

처음에는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출가한 사람들끼리만 했어.

 

이게 지금 가능하려면

깨달은 사람하고 제자가 함께 살려면

출가자들끼리만 해야 가능해요.

 

근데 시간이 흘러서

우리 같은 사대부들이, 재가자들이 이 공부를 할 때

같이 살 수는 없잖아요.

더군다나 사대부들은 얼마나 바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그 바쁜 사람들이 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는

스승같이 같이 사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때 나온 게 화두예요.

 

화두는 스승하고 같은 거예요.

그래서 화두를 든다이 말은

스승과 함께 있다하고 같은 뜻이에요.

스승한테 떨어지면 죽은 목숨이다.” 이 말이나

화두를 놓치면 죽은 목숨이다.” 이 말이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스승하고 같이 있다면

이 모든 의심을 자연스럽게 의심 날 때마다 물을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러면 스승은 딱 그거를 단호하게 쳐주겠죠.

그것처럼 화두를 들면, 의식이 자각이 되면

화두를 든다이 말은

의식이 자각된다는 말이에요.

 

의식이 자각되면

생각이

그 모든 의심은 생각이죠.

그 생각이 끊어지는 거예요.

화두를 들면.

그러니까 지금 생각이 끊어지는 것

 

그래서 스승하고 같이 있는 거나

화두를 드는 거나

같이...

그러니까 화두 든다는 것은

하나의 방법이 나온 거지, 방편이 나온 거지,

이해되나요?

왜냐하면 같이 살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각자 자기 생활을 하면서도

이걸 놓치지 않게 하려면, 이걸 익숙해지게 하려면

화두를 들어라.

 

화두는 뭐예요?

지금 이것이란 말이에요.

이것이것이든지

여러분 보세요.

하든지

뜰 앞에 잣나무하든지

삼서근하든지

다 이거를 말하는 거다, 이거예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했다면

이것도 화두야

이렇게 했으면 이것도 화두예요.

 

모든 게 의식이 하는 것이라서.

그런데 모든 것이 의식이 한다고 알고 사는 거 하고

실제로 이 이것’, ‘하면서 실제로 챙기는 거 하고

하늘과 땅 차이예요.

 

안다고 살아서 힘이 없어

의심이 굴복되지 않아요.

깨어 있어야 돼.

화두가 들려 있어야 돼.

 

그러니까 수행이라는 것은

화두 드는 것이 수행이다.

제 말 이해돼요?

 

깨닫기 전에는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이걸 알아채기 전에는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다.

알아채고 난 이후부터

따라붙는 의심을 제거하는 게 수행이다.

의심을 제거하는 방법이 화두다.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깨어 있는 거다, 이거야.

깨어 있는 거다.

 

한 번 깨달아도 힘이 없어요.

왜냐하면 생각의 힘은 강해요. 안 그래요?

계속 생각을 의심하게 만들어요.

이게 다입니까?”

계속 이게 다입니까?” 하고 물어.

이렇게 시시하단 말입니까?”

이렇게 계속 물어.

 

근데 그럴 때마다 딱 이렇게 나오면...

여러분,

화두 드는 가장 고전적인 모습은

부처님께서도 화두 들었다, 이거예요.

 

가장 고전적인 화두가 뭐냐 하면

부처님이 깨달았어요.

부처님이 깨달았는데 부처님한테도 의심이 일어났어.

이해돼요?

부처님이 정말 6년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에 앉아서 일주일 만에 샛별을 보고

견명성, 밝은 별을 보고

오도 견명성

오도_ 도를 깨달았다.

 

깨닫고 나니까 부처님한테도 의심이 밀려오는 거예요.

의심을 의인화시키면 마왕이 돼요.

마라고 하는 것은 인도 말이에요.

인도 말로 마라그래서

한자로 그냥 ’, 마왕, 혹은 마의 군대, 마군,

마군을 빨리 발음하면 마구니.

 

그러니까 일반 불자들은 마군이라는 말을 쓰는데

마군이라는 말은

마의 군대라는 마군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마왕, 그 마왕의 군대인 마군

이 의심을 말해요.

 

그러면 이 의심이 부처님이 깨달았는데

안에서 의심이 올라왔어.

그럼 의심을 의인화시키면 마왕이에요.

그래서 그 마왕이 부처님을 시험하는 거예요.

 

예수님도 시험 당했죠.

똑같아, 구조가 똑같아.

깨닫고 나면 인간한테는 의심이 찾아와요.

그 의심이 마왕이 찾아온 걸로.

그래야지 우리가 알아들으니까.

 

마왕이 찾아와서 이런저런 시험을 하잖아요.

유혹을 하잖아요. 이래저래.

근데 이런 유혹 저런 유혹에도 부처님이 안 넘어갔어요.

 

근데 마지막 유혹이 뭔지 아세요?

그 마왕이 부처님을 유혹...

여러 가지 의심

의심이 안에서 의심이 올라왔는데

부처님한테서 일어난 마지막 의.

 

여러분, 이건 모든 사람한테 공통적인 거예요.

마지막 의심이 뭐냐 하면

이게 진짜일까?”

이 의심이 일어났다 이거예요.

너무 당연한 거 아닐까요?

 

의심이 일어났어.

어떤 의심이냐?

이게 진짜일까?” 이 의심이 일어났어요.

 

그때 보세요.

부처님이 화두 들었어, 그때.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 이게 진짜일까?” 하는 그 의심에 대해서

부처님이 진짜라고 하려면

의식이 자각되어야 되잖아요.

맞아요?

 

자기가 지금 깨어 있는 이것이

지금 별이 반짝하고 나타났는데

별이 반짝하고 나타난 걸

별을 보는 의식이

이렇게 깨어 있어서

홀로그램으로 펼쳐져 있어.

이걸 깨달았다, 이거예요.

 

깨달음의 내용은

별을 보고

별을 보는 의식이 깨어났는데

깨어나니까

그것이 눈앞에 전체가

다 한 개

별이 나타나는 이 세계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라는 걸

본인이 이제 깨달았어요.

 

그러면 이게 다일까?

이게 이게 진짜일까? 하는 질문을 이기려면, 의심을 이기려면

그 깨달은 순간에

이 드러난 의식이 자기가 확인되어야 되잖아요.

오케이?

 

이것이 의식이 확인되는 순간

모든 생각은 녹아버리니까.

그 마왕의 질문, 그 의심이 녹으려면

이 각성이 다시 한 번 더

본인한테는 확실해야 되지.

맞아요?

 

그러면 우리가 여러분 보세요.

자기 의식이 아무것도 없고

의식만 있다 할 때는 의식을 확인하기가 어려워요.

그 비유가 생각나네요.

 

아래 2층에 새로 이사 왔잖아요.

그 입구에 유리문이 큰 게 있잖아요.

그 지나가면서 보니까

그 큰 유리문 처음 들어왔을 때

거기다가 까만 테이프로 엑스자를 딱 붙여놨더라고.

이게 투명하니까,

이게 유리라는 걸 알려주려면

까만 거를 이렇게 붙여야지

보통 사람이 그거 처음 했으니까, 없다가 생겼으니까

박치기 할 수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까만 테이프를 붙였더라고.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의식만 있을 때는

의식이 자각이 안 돼요. 이해돼요?

그러면 뭔가 감각을 일으켜야지

뭐가 나타나든지, 소리가 들리든지, 촉감이 느껴지든지, 뭔가가 알아지든지

그러니까 뭔가 나타나야지

나타나고 있는 공간 자체인 의식이 드러나요?

이해돼요?

 

그래서 부처님이 뭔가를 일으켜야만 했어.

다시 말하면

공간을 자각하려면 뭔가가 감각이 일어나야지

감각을 통해서

감각이 일어나는 공간을 본인이 확인하는 거예요.

오케이?

 

그러니까 화두가 필요한 거야.

가만히 있을 때는 의식이 자각 안 되는데

저 같은 경우에

줄여서

이 뭐꼬?”를 줄여서 속으로, 밖으로 말도 안 해.

속으로 하면

가 일어나고 있는 이것이 확 드러나.

이게 화두의 원리예요.

이게 화두.

 

뜰앞의 잣나무하면

뜰앞의 잣나무라고 하는 말이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이 공간이 자각된다, 이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없으면

그냥 이것 자체로서는 자각이 안 돼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최초의 화두는, 화두의 역할은

공간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뭔가 하나가 퐁 하는 것이

화두의 역할이다.

이해되나요?

 

본질을 깨닫고.

아니 저는 본질을 깨달았는데, 알겠는데,

왜 이렇게 제 생활이 힘이 없어요?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힘이 없는 이유는

의심이 안 떨어져서.

깨달음 따로,

그리고 의심하는 자기 여전히 의심하고, 욕심 내고 하는 자기가

여전히 그냥 강력하게 있다, 이거지.

 

지금 공부가

여러분 공부가

의심을 빨리 떨어뜨리는 게 핵심이에요. 그렇죠?

깨닫는 건 이제는 어렵지 않잖아요.

 

지금 깨어 있습니까?

그거예요.

근데 인간은 의심덩어리라서

그것을 소유하려고 하지

그쪽으로 가려고 하지는 잘 하지 않아요.

그래서 의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질을 알고

문제는 그 본질에 대해서 따라붙는 의심을

제거해 가는 게 그다음 공부다.

 

선불교에서는 육조 혜능을 중심으로 돌아가요.

왜냐?

그만큼 의심이 없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서

이해되나요?

크게 이루었다이 말은

의심이 없다.

자기 깨달음에 대해서 의심이 없다.

 

그래서 지금 그런 사람을 만나서

한마디에 그냥 탁 이렇게 깨닫고

바로 의심이 일어났는데

그 의심을 또 한 번 딱 뒤집어줘서

비밀은 당신한테 있다.”이 말은

의식이 첫째다, 이 말이에요.

 

의식이 누구한테 있어요?

나한테 있잖아요.

그러니까 천상천하에 이 의식 하나밖에 없어.

유아독존이에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내 몸과 여러분들은

이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꾸는

이 현상 생시라고 하는 꿈속에 나타난 존재들이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인형들이라고.

의식의 입장에서 본다면.

귀여운 인형들이야.

그러니까 인형들끼리 서로 지지고 볶고, 지금 그러고 있는 거를

의식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정말로 철저해지면

의식밖에 없고

의식이 이렇게 삼라만상으로 지금 드러나고 있어.

아름다운 세상이에요, 정말.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처음에는 에계계했지만

의심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이 세계가 너무너무 신통묘용이야,

너무너무 이게 불가사의할 정도로

 

그러니까 의식이

생각해 보세요.

자기는 텅 비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나요?

이게 지금 창조주 아닌가요?

의식이 창조주가 아닌가요?

정말로 창조주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창조해 놓고

피조물 피조물들의...

근데 이 창조주의 비밀을 알아채면

피조물로서의 고통은 끝이 나는 거지.

의식이 확 확장된다 이거야.

피조물인 줄 알았다가

한 명 한 명이 창조주라는 거죠.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소름 끼쳐요.

이 세계를 내가 지금 만들어 내고 있다는

이때 나는 몸이 아니에요.

의식이 나일 때, 이 세계를 내가 만들고 있다는

진짜 이 놀라운 사실이 소름 끼친다니까.

 

그러면 여러분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보세요

정말로 자기가 의식이고

이 세계에는

의식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이 정말로 확신이 생긴다면

내가 일으키는 한 생각이

그대로 실현된다 이거예요.

무서운 이야기예요, 그죠?

 

내가 정말로 이 입장에서

정말로 이 입장에서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한 생각의 파장은 어마어마하게 커요.

이걸 진짜 나비 효과라고 해.

북경에서의 날갯짓이

뉴욕에서는 폭풍우가 돼서 분다는 그런 뜻인 거죠.

 

왜냐하면 의식의 입장에서는

내가 일으키는 한 생각이

우주 전체가 공명하니까.

이해돼요?

 

내가 순수한 의식의 입장에서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파장이

우주 전체로 지금 가니까.

그러니까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부처라고 하는 한 사람이

부처라고 한 사람이 깨어나서

지금 수많은 사람이 깨어나는

예수님이라는 분, 한 분이

예수 한 분이

정말로 이 구원의 소식을 깨달아서 전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부처가 깨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깨어나는

이 놀라운 파장

그 파장이 지금도 증폭되고 있다, 이거예요.

그게 우리한테 지금 온 거예요.

딴 거 아니다, 이거예요.

이게 이심전심으로 우리한테 지금 이어져 왔다.

 

그러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정말 진짜 감사한 일이지,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어쩌다가 이런 복음을, 복된 소식을

복음이라는 말도 참 좋네.

복된 소식을 알게 돼서

지금 이렇게 깨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깨어난 다음에는

의심을 제거하는 데...

 

결국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정말로 의식의 입장이 되면

그때 일으키는 한 생각들이

정말로 우주적인 파장을 가지고

이게 돌아서 나온다.

 

이게 우주의 살림살이라고 해요.

우주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

우주의 살림살이.

그런 이 순수의식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 이루어지는 세계

이게 우주의 가장 기본 패턴이라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자비를 하는, 보리라는 말이

개념이 성립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내가 보시하면

그 보시가 우주의 살림살이가 되어 돌다가

훨씬 더 크게 돌아온다는 이게

우주의 살림살이의 원리라는 거죠.

 

이거는 의식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확실한 거지.

근데 개체의 입장에서는 벌벌 떠는데

이 확장된 이 전체 의식의 연기된 세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이거는 진실 된 이야기죠.

그래서 보시라는 것이 가능해지는.

 

눈 가득히

눈을 꽉 채워서

의식이다.

 

지금 이렇게 자기 눈이 있잖아요.

이 눈에 꽉 채워서

지금 보이는 전체, 보이는 전체, 만목

눈을 꽉 채워서 의식이다

만목의식

 

이런 거, 이런 말 하나만 딱 제대로

우리가 실감해서 계속 익혀나가면

돌아보면 만목의식

같은 말이

만목의식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에요.

 

원래 있는 것은

원래 선에서 쓰는 말은 정법안장(正法眼藏)

정법_ 바른 진리

여러분 바른 진리는 뭐죠?

없어지지 않는 지금 이거.

투명하지만 이렇게 있는 지금 이거.

이게 정법이에요.

 

정법은 안장_눈에 있다, 눈 안, 간직할 장

정법은 눈에 간직돼 있다.

 

누구든지 자기 눈을 딱 보면

지금 자기 눈을 보면 실제로 뭐가 보여요?

우리가 자기 눈을 보면

실제로는 이게 지금 보이지 않아요?

여기에 꽉 차 있다 이거예요.

정법은 이 여기에, 눈에, 꽉 차 있다.

이게 지금 의식이다.

이 통으로 그냥

내 몸을 포함해서.

 

그러니까 이런 말이 정법안장, 만목의식

이런 말들을 알아두면

처음에는 이게 약간씩 약간씩 감이 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감이 확 올 때가 있다 이거지.

 

자기도 모르게

어제처럼 저녁노을이 지는 걸

여기 와서

먼저 있던 그 옥상에 가서

먼저 우리 인사동 선원 처음에 있던 그 옥상 가서

거기가 워낙 전망이 좋으니까

그 옥상 딱 올라가니까

그 노을이 그냥 쫙

뭐 정말 그렇게 붉게 탈 수가 없었죠.

그런 거 보면 막 확 열린다 이거예요, 그냥.

마음이 저절로 그냥 확 열려버린다.

그러면 눈 전체에 지금 깨어 있는 이것이 그냥

꽉 찬다 이거지.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 보고

깨달았을 때 심정이

아마도 이랬을 거다.

이 눈 전체가 확 열리면서

이것이 너무너무 실감나는 것

너무나 장엄하게 쫙 이 우주가 펼쳐진 그 모습.

부처님이 들었던 처음 화두.

 

제일 중요한 걸 말해놓고서

삼천포로 빠져서 결론을 못 냈네요.

보세요.

부처님이 이걸 확 깨달았어요.

이 눈 앞에 있는 이거 전체가

한 개 의식이라는 거를 이렇게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 의식이 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근데 의심이 올라와서

과연 이게 다일까? 이것 말고 또 뭐가 없을까?” 하는 의심이 올라왔어.

그때 그 의심을 제압하는 방법이

그 각성이 다시 돌아오는 거잖아요.

각성을 순간적으로 놓치니까 의심이 일어난 거지.

이해되세요?

각성을 놓치면 의심이 올라온다, 이거예요.

그때 이걸 이 의심을 제압하는 방법은

깨달음의 순간이 확실하게 드러난 이 각성을

다시 가져와야 되잖아요.

 

그러면 각성을 가져오는 방법을

그때 마왕이 부처님을 시험하면서

뭐 돈도 주고, 여자도 주고, 뭐도 주고 하면서 막 할 때

전부 그런 거는 다 이 환영의 세계다 하고

마지막으로 시험한 것이

당신이 깨달았다는 것을 이때는

당신이라고 안 했을 거예요.

지금 자기 의심이니까

“‘내가깨달았다는 것을 이걸 어떻게 증명하지?”

이게 깨달음인지 내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는 의심을 했다, 이거지.

 

사실은 당신이 아니고

속으로 올라온 것은

진짜 내가 깨달은 걸까? 이게 다일까? 이게 진짜 깨달음일까?” 하는

의심이 올라왔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거를 이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각성을 해야 되잖아요.

각성을 놓쳤기 때문에 왔으니까

다시 각성하는 방법이

부처님이 손을 들어서 땅을 딱 짚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

땅을 한번 짚어보세요. 감각이 있어요?

이 텅 빈 자리에 감각이...

그러니까 한 번 이 의식을 확인한 사람은

여기에 이것만 있을 때는 이걸 인지할 수 없어요.

 

근데 감각이 한 번 생기면

감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감각이 일어나는 이 공간, 바탕, 본질 자체가 확 살아난다 이거예요.

한 번 살아난 사람한테는

이 감각을 통해서 다시 이것이 확인된다.

 

부처님이 땅을 짚었다 이거야.

이걸 촉지라고 그래요, 촉지.

항마촉지_ 의심을 항복 받을 때 손가락을 땅에 짚었다.

이게 화두다 이거예요.

 

화두는 각성의 도구.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각성의 스위치.

그러니까 이 화두가

여러분은 개별적으로 뭐라고 해도 좋아요.

자기한테 가장 좋은 거.

 

부처님 같은 경우는

그 순간

이 텅 빈 의식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요 하나의 촉각이 필요했다.

이해되나요?

 

저 소리 하나가

저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공간을 증명한다, 이거에요.

현상이 본질을 증명한다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본질이 없으면 현상이 일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거를 지금 그라운드라는 표현을 한다는 거지

그라운드, 혹은 스페이스.

스페이스가 있어야, 뭐가 존재할 수가 있지.

 

지금 나의 각성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촉지함으로써 증명이 된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화두의 가장 고전적인 모습이고

이게 불교의 가장 핵심이다, 이거죠.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도 부처님처럼 이렇게 하든지

하여튼 뭐든지

저는 처음 배울 때

이 뭐꼬?”를 배워서

이제 뭐꼬?”는 필요 없어

의심은 떨어졌어.

그리고 이거를 한번 돌이키기 위해서는

한번 속으로

한다 이거야.

눈 뜨면 한번 한다. 이거예요.

그러면 의식이 분명하다 이거예요.

화두 들 때마다 의식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분명한 의식 안에

소리가 나타나고, 한 생각이 나타나고

여기에 물방울이 뽀르르 나오는 것처럼 나타난다.

나타난 건 반드시 사라진다.

그래서 안 쏟게 된다.

 

분명히 눈이 낙처에 가 있어야 된다.

낙처란 말은

모든 것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그 자리

의식 자체.

그러니까 눈이

정법은 안장에 가 있어야지

나타나는 이런저런, 시원하고 무슨 감각들

그런 것들은 전부 생멸법

현상이다, 이거죠.

 

그러니까 화두 들었을 때

화두가 꼭 필요한 이유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현상을 통해서 본질로 돌아가게 만들어주는 것.

 

따라서 모든 현상은 법문이에요.

모든 현상은 화살표

무엇을 가리키는 화살표예요?

소리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소리가 일어나고 있는 이 의식 공간 자체를 가리킨다.

이해돼요?

 

죽비가 나타났다.

죽비가 뭘 가리키는가?

죽비가 나타난 이 의식 공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법문한다.

죽비가 법문하고, 소리가 법문한다.

 

법문의 타겟이 뭐냐?

모든 것이 나타나고 있는 지금

이 홀로그램 자체

이 의식 자체

이거를 가리키고 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젊었을 때 선생님 그 법문 시간에 출석해서

내용은 하나도 기억은 안 나요.

그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그때 앉아 있었던 그것은 기억이 나.

이거 이거거든.

영원한 영원한 현재

이거를 느끼고 있었거든.

생각 없는

지금 이 의식

이 의식 공간을 느꼈다는 거죠.

 

그리고 그 의식 공간 속에서

선생님도 없고 나도 없고

그냥 깨어 있는 이거 하나만이

내 마음에 와서

그게 나를 공부시켰다.

 

그 출석했을 때, 제가 들었던 내용이

나를 공부시킨 것보다도

화엄경, 법화경 공부 그때 했어요, 그때 공부 많이 했어요.

화엄경, 법화경, 원각경 이런 불경도 했지만

성경도 구약성서, 신약성서 공부했고

주역 공부했고, 노자 맹자 공부했고

그러니까 노자 장자 공부했고

논어 맹자 공부했고

참 공부 많이 했네.

 

근데 그 모든 내용이

한결같이

제가 깨어 있었던 그 각성을 말했던 거다, 이거죠.

 

살아 있는 이거

이게 진짜 이게 우리 공부라는 거예요.

활발발하게 살아 있는 이거

지금 이거를 기왕이면

이 시간을

살아 있는

이거를 만끽하는 걸로 씁시다.

 

이게 지금 메시지입니다.

마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