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78] 생각없이 아는 것 | 이심전심(以心傳心)

Buddhastudy 2025. 2. 12. 19:58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지금 이걸 뭐라고 표현하죠?

그냥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음을 스스로 느끼는 것

그래서 그냥 제가 가장 쉽게 말할 때는

정신이 있습니까? 나갔습니까? 할 때 그 정신이다이거예요.

정신이 있죠?

, 이 정신이 있어서

이 지금 몸뚱이만 있으면

여름인지 겨울인지 모를 거 아니에요.

몸뚱이는 이것이 있어서

지금 여름에 더운 줄 알고, 지금 오후인 줄 알고

여기가 인사동인 줄 알고

이거 힘이 하나도 안 든다.

물을 마심에

차고 더운 줄 아는 것은 힘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걸 또 무위법이라고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는 것.

 

그래서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깨어서 모든 사람이

이것을 지금 쓰고 있다.

모든 사람이 물을 마시면

차고 더운 줄을 스스로 알잖아요.

 

지금 공기가 어떻습니까?

공기가 나름대로 좋지요?

공기가 밖에서는 더웠는데, 들어오니까 좀 시원해졌다.

이거 알죠?

무엇이 안다고 할 수 있어요?

, 지금 이거를 본인이

이거구나하고, 본인이 캐치를 해야 돼요, 말로 하자면.

이거라고 하는 것을 캐치를 지금 하셔야 돼요.

 

그래서 아주 간단명료하게 말로 표현한다면

지금 정신이 있냐? 없냐?

정신이 나갔냐?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 정신이 있다.

그럼 정신이 지금 이렇게 있는데

이렇게 하는 이 자각, 이 정신의 자각

이게 지금 깨달음의 내용이다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혜명을 따라 잡아서

의발을 뺏으려고 따라 잡았다가

마음을 바꿔서 법을 물었고

그렇다면 우선 마음을 고요히 하라.

그리고 이 내 말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한 다음에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이럴 때

무엇이 당신의 본래면목인가? 했을 때

생각하는 데만 끌려다니지 않는다면

지금 멀쩡하게 물을 마시면

물을 마시고 차고 더운 줄 아는 것은 생각은 아니죠?

생각해야 아는 것은 아니잖아요.

[생각 없이 아는 것]

이 말 좋네요.

생각 없이 아는 거

 

지금 방 안에 이 공기의 온도가 지금 쾌적하다는 것을

생각을 해야만 아는 건 아니잖아요.

생각 없이도 지금 알잖아요.

생각 없이 하는 것

의식은 생각 없이 하는 것

 

소리, 소리를 나는데 생각할 필요는 없죠.

[생각을 거치지 않고 아는 것]

이게 지금 아주 포인트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은, 한 번 점검하고 싶은 것은

지금 혜명이 말하는

사람이 물을 마시고, 차고 더운 줄 스스로 아는 것

그것을 지금 여러분께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지금 여기 부처님께서 깨닫고 의심이 올라왔을 때

과연 이게 다인가?” 하고 의심이 올라왔을 때

그 의심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손가락을 땅에다가 짚었다.

항마촉지(降魔觸地)_ 의심을 항복 받는데 있어서

촉지, 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께서 똑같이

검지를 한번 펼치셔서 바닥을 한번 이렇게 만져보세요.

느낌이 있죠?

그 느끼는 것을 의식이라고.

흔히 그냥 쉽게 말해서는 의식인데

이게 지금 정신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 느끼는 것을 한 번

이거구나하고 딱 이렇게 알아채는 것.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이걸 먼저 한 사람이 확신에 차서

혜능처럼 확신에 차서

이겁니다라고 이야기를 해 주면

그걸 찾던 사람이 실제로 자기도

, 이거 말입니까?” 하는 게

이심전심이다 이거예요.

 

부처님이 꽃을 들었을 때 가섭이 웃었다.

이게 지금 이심전심.

그러니까 매수업마다 이런 대목에서

우리가 이심전심을 의식에서 의식으로.

 

그러니까 의식의 자각

의식이 자기가 의식이라는 것을 의식하기

[의식이 의식을 의식한다]를 한마디로 줄이면

[자각], 혹은 [각성]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의식이

자기가 의식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

이게 지금 깨달음의 핵심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항상 공부는 두 가지예요.

 

의식이 자각될 때 특징이

의식이 자각될 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 말 들어오셨나요?

 

[의식이 자각될 때의 특징은

생각이 없어져요.]

그래서 이거를 무심이라고

의식의 자각, 각성, = 무심.

무심이라고 하는 말은

의식이 자각될 때는 생각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러니까 지금 자각, 각성, 무심

이게 그냥 본질이에요.

한번 그냥 잠깐 써보겠습니다.

자각(自覺), 각성(覺性), 무심(無心) 이게 본질이다.

 

본질이라는 말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 의식은 변하지 않는다.

이게 지금 한쪽에, 우리 존재의 한쪽 축이고

그리고 이 각성이라고 하는 거 안에서

의식의 바다, 말로 하자면 이 의식의 세계,

의식의 바다 안에서

온갖 것들이 인연 따라 이렇게 나타나고 사라지고 있어서

그것들은 현상이라고 이렇게 부르는 거죠.

 

현상에서의 대표적인 게

생각과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걸 현상.

그러니까 요 두 개에 대한 안목

처음에는 이 두 개가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 것

본질은 불생불멸

현상은 생멸

여기 차원이 다르다는 걸 자각하는 게, 첫 번째 과제고

 

두 번째는 의식도 의식이고

생각 감정도 결국 의식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더 깊이 본다면

물질도 결국에는 의식이 인연따라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해서

 

이제 두 번째는 이게 중도, 불이, 연기

첫 번째는 생각, 감정, 현상은 우리가 알고 살아요.

이거는 뭐 너무 당연한 거라서 말할 필요가 없고.

 

첫 번째는 자각, 각성, 무심, 본질을 한번 알아채고

이심전심을 알아채고

두 번째는 이 본질과 현상이 하나라고 하는 이 사실을

이걸 중도로 완성을 한다.

 

그래서 생각, 감정, 현상이

무심에서 나온 생각, 감정.

 

여러분 무심을 모르고 할 때는 거의 욕망의 욕망에 따라 다녀요.

인간이 무심을 모르고 생각, 감정을 일으킬 때는

거의 대부분이 욕망에 휘둘린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공부가

첫 번째 단계는 무심을 발견하는 거고

두 번째는 무심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도

말 되나요?

 

무심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러니까 욕망이 없는

본능적인 욕망을 극복한 상태에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중도.

,도 불이, 연기

이 두 가지 공부가

본질을 발견하고

그다음에 본질의 입장에서 현상을 산다.

 

다시, 중요하니까요.

공부는 항상 이 두 단계를 거치는 것 같아요.

그 첫 번째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두 번째는 본질의 입장에서 현상을 살아간다.

 

본질의 입장이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전체의 입장이에요.

본질의 입장에서 현상을 살아간다 할 때

본질의 입장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개체가 아닌 전체의 입장이에요.

그래서 이 전체의 입장을 부처 눈이라고 해

전체의 입장을 부처 눈이라고 하고

개체의 입장을 돼지 눈이라고 하는 거예요.

 

공부가 본질을 발견한 다음에는

자기 눈을 돼지 눈에서 부처 눈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리고 돼지 눈은 굉장히 오래된 축척이 된 습관이에요.

자기 개체 위주로 모든 걸 생각하는

그리고 자기 개인의 욕망이 모든 것에 우선이 되는.

 

그런 입장에서 제가 보니까

모든 사람이 한 인간이 한 50년 살았다 그러면

적어도 한 45년은 그 개체의 입장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오래된 습관이 있는 거죠.

 

[본질을 발견하고

개체 입장을 전체 입장으로 바꿔서 살아가기]

이게 지금 공부의 두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첫 번째 단계인 본질을 발견할 때

본질은 어렵지 않다.

본질은 지금 여러분 살아계시나요? 지금 살아계세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있다는 걸 느끼죠?

그건 있잖아요.

아무리 어떤 사람이라도

내가 이렇게 지금 있다는 건, 몸이 이렇게 있다는 건, 느끼잖아요?

 

근데 몸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몸이 스스로 느끼는 건 아니다, 이거예요.

몸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의식이 몸이 있다고 느끼는 거다.

이해되나요?

그럼, 그 의식이 지금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 계십니까?

혜명이 물을 마시고 차고 더운 줄 안다.

*! 이 소리가 이렇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걸 안다 하고

완전히 같은 말이다.

이해되세요?

 

지금 이 방의 공기가 적당히 아마 추측컨대

26도 전후, 그 정도 되겠죠?

. 이거 안다 이거예요.

이 말이나 같은 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생각을 해서 아는 것은

한 번 접어 들어가는 거잖아요.

그것 말고 직심, 다이렉트로.

다이렉트로 아는 것.

거기에 지금 우리들의 의식이 항상 깨어서 있다 이거예요.

 

그래서 선사들이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안다.

그거다.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아는 것이다.

근데 별게 아니라

하여튼 깨닫고 나면

이거는 너무나 평범하고 보편적이고 당연해요.

깨닫고 나면 이거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구나하는 걸 알아요.

 

문제가

이게 한 개식이라는 걸 알아도

오랫동안 몸에 축적되어 있는 욕망총량의 법칙

인간마다 뒤집어진다 이거예요.

이 경쟁 사회에 시달려서.

이 욕망이 뒤집어져서 나오는 것.

여러분 그런 거 있죠, 그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의식의 입장에서 욕망을 컨트롤할 것인가가

그 뒤에 숙제로 남는 거예요.

 

그래서 깨달았다고 해서 다 공부가 끝나는 건 아니다.

깨달음은 시작이다,

공부의 시작이다.

 

진짜 공부는

깨달음의 힘으로,이 자각의 힘으로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것.

자각의 힘으로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것

 

그리고 생각은,

욕망의 도구가 생각이에요.

욕망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생각을 동원해요.

욕망은 생각과 감정을 동원해서 자기를 실현해요.

 

제가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34일 동안,제가 좀 이렇게 깊이 좀 사색을 했는데

그 결론은 뭐냐 하면

모든 방법은 이미 알려져 있다.

 

저는 이번에 큰 어떤 돌이킴을 받았어요.

더 이상 우리가

이 마음공부에 대한 방법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모든 방법은 이미 완벽하게 알려져 있다.

근데 이거를 두고 기웃기웃거리는 게 문제구나

 

또 혜명이 지난 시간에 그랬잖아요.

이것 말고 또 뭐 없습니까?” 그랬잖아요, 혜명이.

 

이미 방법론은 다 드러나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치부심에 의해서

또 뭔가를 자꾸 기웃거리는 게 이게 문제구나.

 

그러면 이미 드러나 있는 방법은

제가 심사숙고를 해 보니까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다.

이미 드러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거는 정말 인류의

이 문제에 있어서 마음공부에 있어서

[무심을 깨닫고 중도의 평상심을 쓰기] 이해되나요?

무심을 깨닫고 중도의 평상심을 쓰기

 

무심으로 가는 형수파리

설명 안 해도 들어오나요?

무심으로 가기 위해서

_ 하나의 폼이 필요하고

_ 본질이 무엇인가예요.

아주 간단 명료하게 본질이 무엇인가?”

그게 폼이에요.

_ 그러면 그 궁금증을 계속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

계속 그 문제를 풀려고 애를 쓰기

그러다가 파_ 한 번 결정적인 경험이라는 것이 있어요.

계속 궁금해하는 사람한테는 한 번 그것이 풀릴 때,

하여튼 시원해지는 그런 경험이 분명히 와요.

_ 답이 드러나는 거지, 본질이 무엇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그 뒤의 내용은 무심이에요.

 

무심이라는 말은 생각이 없는 의식상태

다시

무심이라는 것은 생각이 없는 의식 상태

그 상태가 분명히 자각이

아주 자각이 초롱초롱하게 자각이 되는 그 상태가

한 번 딱 자기한테 확인이 되는 거죠.

 

지금도 확인이 한 번 되는 사람한테는

항상 돌이키면

의식이 이렇게 자각이 되는 거죠.

의식이 의식을 의식하는 이 자각, 각성

이것이 한번 확인되는 거죠.

이게 화두다 이거예요.

 

정확하게 화두는

자각, 각성, 무심, 본질,

이게 화두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다음에 욕망을 이겨낼

그다음 단계는 욕망을 이겨내는,

욕망이 일으키는 생각 감정을 이겨내는 거잖아요.

그것에 대한 특효약이 화두다 이거예요.

 

화두를 든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 스스로를 자각한다고

그 상태가

생각을 항복시키는 가장

하여튼 첫 경이야, 제일 첫 경인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확인되면 확인될수록

생각은 힘이 빠져, 이건 분명해요.

생각의 힘이 빠지면

욕망은 저절로 항복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의식을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텅 빈 채로

투명하게 깨어 있는 이것을

공이라는 말보다 더 잘 표현할 수가 없는 것 같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말 중에서

이 의식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말이

공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나오잖아요.

제가 진짜 몇십 년 전에

친구 따라서, 엄마 따라서 절에 처음 갔을 때

법회 시작할 때 반야심경을 외우는데

색즉시공 할 때 공()이라는 말이 딱 그때 걸렸어요.

공이라는 말이.

 

그러니까 모르겠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는데

공을 모르겠어,

색은 알겠어, 색은 물질의 색이라고 하니까 색은 알겠어요.

근데 공이라는 말을 그때 모르겠더라고요.

그게 지금 그거 하나 푸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거 아니에요.

 

공은 뭐냐?

한마디로 의식이야 그냥.

색이 의식이다, 이 말이에요.

색이 의식이다.

 

이게 분명해지면

요 한 개의 수정체가 분명해지면

수정체 안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이것이 나타나는 거예요.

이것이 논리적으로 이 분리감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아요.

이게 낱개로 느껴지는 게 분리감이거든요.

죽비가 낱개로 느껴진다.

 

개체로 느낀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몸뚱이가 개체로 느껴진다는 말이에요.

몸뚱이가 개체로 느껴지는 분리감이

인간한테는 뿌리 깊게 있고, 박혀 있고

그것이 녹아나기가 쉽지 않아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보세요.

저는 이런 면에서

선불교가 가지고 있는 이런 용어가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 용어를 처음 들은 게

김호근 선생님한테 들었거든요.

목사님 수업 시간에,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하셨어.

설교가 이때는 강의였어.

목사님 강의 중에 이런 말을 해서

제가 지금도 기억하고

그 뒤에 그 출전을 자세히 찾아보니까

이게 정말 중요한 말이더라고요.

 

그때는 목사님이 뭐라고 했냐 하면

사실은 인간이 신을 믿는 게 아니다.

인간은 신을 믿을 수 없다.

의심투성이 중생이

인간이 어떻게 신을 믿나?

신은 절대인데

상대성에 의심으로 찌들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절대로 믿을 수 있나?

인간이 신을 믿는 게 아니고

사실은 신이 인간을 믿는다.

신이 인간을 믿는다.”

 

근데 그 말 그때 이런 말 들을 때는

참 이 말이 소화가 안 돼서

이런 말들이 소화가 안 돼.

이거 화두야

그냥 오랫동안 이 문제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첫 시간에 결론은 2

화두를 들면, 진 화두를 들면

이 화두가 몰라서 뭔가?” 하는 것 말고

그거는 예비 화두, 임시 화두, 가 화두고

진 화두,

딱 이 의식에 대한 자각이 구명할 때

이때 입장이 팍 바뀌어요.

이것이 정말로 분명하다면

다시 말하면 의식의 입장이 정말로 분명하다면

이 세계를 보는 눈이 확 바뀌어요.

어떻게 바뀌는가?

려처정에서 정처려로 바뀌어

려처정은 혜안,

정처려는 법안,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본질을 깨달아도

본질의 힘으로 이 세계를 보는 자기 눈

돼지 눈에서 부처 눈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부처 눈이란 무엇인가?

의식에 대한 자각이 딱 서면

이 세계가 그냥 한 개 의식이에요.

한 개 의식의 입장에서

이 안에 나타난 무상하고, 무아인 이 개체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려처정은 뭐냐 하면

_ 당나귀 려‘()’자고

정은 우물()이에요.

 

우리가 무심을 처음 발견할 때

다시 말하면 의식을 처음 발견할 때는

여전히 우리의 입장은 당나귀의 입장이다.

돼지 눈이다, 이거예요.

돼지 눈으로 본질을 발견했다.

 

여기 지금 무심을 딱 한 번, 처음 깨닫는 대목이에요.

근데 진짜 공부는

그래야만이 화두를 들 수 있어요.

그럼 화두를 들면 어떻게 되는가?

 

이 의식의 자각이 분명해져서

의식의 입장에서 이 현상 세계를 본다, 이거예요.

 

다시

아직도 무심을,

본질을 처음 깨달을 때는

아직도 당나귀 입장, 돼지 눈, 혹은 현상계에 존재하는 김아마무개가

한 번 발견을 했어.

근데 그 뒤에 눈을 바꾸는 것이 핵심이다.

눈을 바꾼다는 말은

눈을 바꾸는 방법은 화두

진 화두를, 진화두를 활구라 그래요.

살아있는 말씀, 진화두를 활구라고

 

그러니까 활구참선을 해야만이

활구참선이 딱 되면

의식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보게 돼.

한마디로 말해서.

 

그러면 이때는

정처려, 우물이 당나귀를 본다는 거예요.

이때 정이 기독교로 말하면 신이거든

위에는 인간이 신을 보는 거고

아래는 신이 인간을 보는 거예요.

이게 진짜라는 거죠.

이게 지금 부처 눈이에요.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불교의 기본인 삼법인이라고 하잖아요.

삼법인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사물은 늘 변화하며 영원하지 않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고 고유한 성품이 없다)

그리고 세 번째가 못 깨달으면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이 괴로움)

깨달으면 열반적정(涅槃寂靜, 모든 번뇌를 끊고 평온한 상태를 이룬 해탈의 경지)

 

열반이라는 말이나 적정이 같은 말이에요.

열반은 인도 말이고 니르바나

니르바나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_ 고요하고

_ 깨끗하다

적정 고요하다.

 

정처려_ 우물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본다.

이걸 어떻게 하면 되는가?

활구화두를 들면 의식의 자각이 분명해.

그리고 의식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봐요.

그럼 이 세계는 찰나생 찰나멸이고

 

찰나생 찰나멸을 풀이한다면

제행무상, 제법무아

그리고 이걸 모르면 일체개고

근데 이걸 알면 열반적정

그러니까 실제로는 사법인이 아니라 삼법인인 거죠.

 

근데 세 번째는 돼지 눈한테는 일체개고로 보이고

부처 눈한테는 열반적정으로 보인다는 거예요.

 

그러면 첫 시간의 결론이

지금 여기서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고

차고 더운 줄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이

여인음수의 냉난자지(如人飮水 冷暖自知 하는

요게 지금 모든 공부의 시작이다.

 

이게 폼을 우리가 얻는 시작이다.

요걸 알아야만이

사람이 물을 마시고

차고 더운지 스스로 아는 자기 의식

이것이 자기한테 확인될 때는

이렇게 눈, 정법안장으로 확인된다.

들어옵니까?

 

의식이 확인될 때는 자기한테는 어떻게 느껴지는가, 의식이?

지금 눈에 보이는 요 전체가

내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실제로 있는 것은

요 전체가 한 개 의식이다, 이거예요.

이 세계가.

 

그리고 이 한 개 의식 안에

이 세계가 찰나생 찰나멸 하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지금 자각이 되는 것이

화두, 활구화두.

그리고 활구화두를 놓치면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빨려 들어가 버려요.

현상계로

 

활구화두를 들고 있으면

딱 자기 의식의 자각 속에

모든 것이 꿈처럼, 영화처럼, 이렇게 지나가는 게 분명하다 이거예요.

그래서 빨려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생각과 감정을 통해서

이걸 추동하는 생각과 감정으로 추동되는

자기 욕망, 자기 지랄

이것이 여기서 극복된다.

 

지금 화두 하나를 초지일관 바로 들어가는 것이

모든 우리 고통을 해결해서

열반적정에 깨달음과 해탈을

깨달음과 마음치유를 이루어내는

깨달아야지 마음치유할 수 있네.

지금 들어옵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치유는

깨달아야 마음치유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활구화두의 모습은

정처려다, 이거예요.

우물이 의식의 입장에서 이 현상 세계를 본다.

우물이 당나귀를 본다.

처음에는 당나귀가 우물을 발견했지만

인간이 소를 발견했지만

결국에는 나중에는 소와 인간이 다 사라지고

의식의 입장에서 이 현상계를 보는 것.

이게 활구화두예요.

 

활구화두를 딱 가지고 있는 사람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거 이상은 없다.

 

그러니까 요거 하나를 실제로 하는 것.

지금 제 말 이해되세요?

 

그렇구나하고 아는 거 하고

실제로 하는 거 하고

하늘과 땅 차이다, 이거예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