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도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의식이 체험하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의식이 체험하고 있네.
의식이 체험하고 있어.
이것이 진리지
의식을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자기가 의식인데
자기가 어떻게 자기를 따로 객관 대상으로 체험할 수 있느냐는 거죠.
그러니까 이 점이 주어가 바로 선다.
여러분,모든 것이 의식의 증거죠.
자기 한테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모든 동사는 주어가 의식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맞아요?
이렇게 되면 돈수다 이거예요, 이게 돈수다.
그 뒤로는 그 어떤 생각에도 안 속는다. 이해되나요?
따라서 생각이 곧 본질인 의식의 증거다.
어때요?
생각이 곧 본질인 의식의 증거다.
예를 들어서
‘의식이라는 것은 없어’ 하는 생각이 바로
‘의식이 있다’는 증거라서
그 말의 내용은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말의 내용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모든 말이 의식을 증가한다.
오케이?
번뇌즉 보리다.
그러면 지금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의식의 증거다 이거에요.
와요?
그러면 이걸 아는 사람한테는
이걸 모르는 제자가 찾아와서
“의식이 뭡니까?” 물었을 때
*~!
이렇게 했다 이거예요.
지금 말로 하건, 죽비를 들건, 치건, 의식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1700 공안이 다만 의식을 나타내는 표식일 뿐이다.
그러니까 ‘말한다’ 할 때 무엇이 말하는가?
의식이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어떤 말을 해도 말의 내용은 상관없어.
말하는 주어
여기에 착안, 우리 눈이 거기에 딱 가서 붙어야 돼.
착한.
거기에 딱 이렇게 우리가 가야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일거수일투족에서
“나는 꼭 의식을 체험하고 싶습니다.”할 때
“체험하고 싶습니다” 하는 거의 주어는 뭐예요?
의식이죠.
그러니까 선사들이
“그게 의식이다”고 했다니까.
음미해 보세요.
보세요.
먼 길을 찾아와서 마조 스님에게
“진리가 뭡니까?” 하고 물었어요.
“오늘은 좀 내가 피곤해서 말 못 해 줄 테니까, 내일 와라”
이게 지금 답이에요.
“아이고, 오늘은 내가 피곤하니까, 내가 말을 못 해주겠네.
내일 와”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절하고
“내일 오겠습니다” 하고 갔어, 못 알아듣고.
가는 놈을 저 문을 딱 나서는 걸 보고
“여보게” 했다고요.
제2탄 여보게 했다고요.
그래 딱 돌아왔다고
뭐냐? 했다고요.
거기서 깨달았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답을 해도
많은 사람들이 속아요.
큰스님한테 가서
“진리가 뭡니까?” 물어보면
“나는 잘 모르니까 다른 사람한테 가보게” 이렇게 답을 해요.
이해돼요?
아는 사람은 그게 답이다, 이거예요.
모르는 사람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는데
아는 사람은 뭐라고 해도 답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
딱 이렇게 중심이 딱 와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의 주어가
지금 이 살아있는 의식이라고 하는데
한 번 딱 이렇게, 중심이 딱 서면
그다음부터는 천하무적이 되는 거죠.
단용차심(但用此心), 모든 사람이 다만 이 의식을 쓰는 것이니
맞아요?
모든 사람이 다만 이 의식을 쓰는 것이니
직_ 곧 바로
료_ 완료했다.
성불_ 성불해 마쳤다.
지금 들어오나요? 통쾌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육조 혜능 스님이
이런 말을 과감하게
모든 사람의 깨어 있는 의식은 본래부터 청정하다
청정하다는 말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 말이잖아요.
모든 사람이 다만 이 의식을 지금 쓰는 것일 뿐이니
모든 사람이 다만 이 의식을 쓰는 것일 뿐이니
직_ 곧 바로
료_ 완료했다, 마쳤다.
무엇을? 성불을 해 마쳤다.
이때 불이 뭐예요? 여러분, 불이 뭐예요?
의식이잖아요.
자, 성불이란 말은
부처를 이룬다는 뜻인데 성불이란 말이...
보세요.
또 국어 시간
성불의 진짜 뜻은 불성이다.
부처를 이룬다 할 때
에고가 부처를 이루는 거예요? 아니면 부처가 이루는 거예요?
부처가 스스로 이룬 거예요? 에고가 부처를 이룬 거예요?
에고가 부처가 된 거예요? 아니면 부처가 스스로 부처인 거예요?
부처가 스스로 부처죠.
그러니까 말을 바꿔야 돼.
성불이 아니고 불이 성한 거야.
지금 이해돼요?
지난 이틀 전에 제가 한번 이야기한 걸 복습
‘견승한다’ 그러잖아요.
견성한다 그러면
아무개 입장에서 본질인 의식을 발견한다, 이 말이죠.
맞아요?
근데 한 번 하고 나면 어떻게 돼요?
견성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팩트는 뭔가?
그러니까 아무개 입장에서 말을 할 때는
“아, 내가 의식을 한번 봤습니다”가 되지만
팩트는 뭐냐 하면
아무개가 본 게 아니고
팩트는 그거는 꿈이고,
아무개가 한 번 견성했다는 말은 그건 꿈속의 이야기고
실제로는 뭐냐?
견성이 아니고
성이, 의식이 견, 본 거다, 이거예요.
여러분 모든 것의 주체가 의식이죠.
견성이 아니고 성견이다.
성품이 보는 거다.
지금 선생님이 저를 보시는 것은
의식이 저를 보는 것이다.
지금 따라오십니까?
그러니까 육조 혜능이
왜 대한불교 조계종이라고 왜 하는가?
육조 혜능의 이 깨달음을 높이 사서
이 깨달음이 가장 진리에 합당하기 때문에
육조 혜능의 가르침을 조계 종지로 받아들여서
종단 이름을 대한불교 조계종이라고 붙였다.
그럼 육조 혜능의 종지가 무엇인가?
보리자성
깨어 있는 스스로의 의식이 본래부터 청정하다.
모든 사람이 다만 이 의식을 쓰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이 의식을 쓰는 것일 뿐이므로 곧바로 마쳐 있다.
곧바로 해 마쳤다.
무엇을?
성불을.
성불을 해 마쳤다.
성불의 진짜 뜻은
부처가 자기를 이루는 거예요.
여러분,
부처가 이미 자기를 이루고 있어요? 안 이루고 있어요?
의식이 이미 자기가 완벽해요? 안 완벽해요?
그거를 괜히 우리가 그거 모르고
내가 나서서 하려고 하다 보니까
이 모양 이 꼴로 지금 전락이 된 거예요.
/돌아와서 생각은 끊어졌지만
멀쩡하게 깨어 있는 의식의 중립 상태를/
따라옵니까?
/생각은 끊어졌지만 멀쩡하게 깨어 있는 의식의 중립 상태./
이 의식의 본래 상태,
/중립 상태를 선사들은 마음자리라고도 불렀다.
마음자리는 우리 마음이 움직이기 전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자리라고 해서
최초구라고도 부른다./
여러분, 생각이 어디서 일어나요?
지금 여기서 일어나죠.
생각이 여기서 일어나잖아요.
생각이 일어나기 전부터 있죠?
그래서 최초구
구_ 말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걸 최초구라고 해.
태초에 의식이 있었다.
의식에서 인연 따라 한 생각도 일어난다.
그래서 최초구
또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돌아가는 자리이기도 해서
말후구라고도 부른다.
여러분 옵니까?
생각이 어디로 돌아가요?
의식으로 돌아가죠.
여러분 우리 몸이 죽어서 어디로 돌아갈까요?
우리 몸도 한 개 생각이야, 같아.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제가 지금 조심스럽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동작의 주어는
지금 의식이라고 하면
여러분이 아무 건너뜀이 없죠.
맞아요?
그런데 밖에서 일어나는 저 바람
바람이 부는 저것도 의식이다 그러면
소화 안 되죠.
맞아요?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안 되는 이유가
꿈속에서는 꿈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지금 생시 속에서는
이 생시라고 하는 게
꿈이라는 걸 지금 모르기 때문에
이게 실감이 나기 때문에
저게 지금 의식이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어.
여기서 비약이 있어.
비약은 제가 되도록이면 안 하려고 해요, 비약은.
나중에 조금 더 끌어올려서
여러분 근데 머지않아
밖에서 움직이는 바람과 내리는 비도
의식이 일어난 거라는 걸
제가 또 논리적으로 여러분한테 설득시킬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근데 지금으로서는 가장 쉽게 말을 한다면
꿈속에서는 그게 꿈인 줄 모르기 때문에
꿈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의식이라는 걸 놓쳐요.
다시
여러분 꿈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꿈이에요? 아니에요?
재료가,
꿈에서 나타난 죽비의 재료가 꿈이에요? 아니에요?
꿈이죠.
꿈이 의식이에요? 아니에요?
의식이잖아요.
꿈속에 있는 모든 것이 의식이죠.
그것처럼 생시라고 하는 이것도 꿈과 같아서
생시의 일어나고 있는 지금 모든 것이
이것도 의식이에요.
그런데 이거를 지금 한번
요 꿈과 생시라고 하는 이 간극을 한번 뛰어넘을
그런 통찰이 필요한데
그 통찰은 조금 더 있다가 완벽하게 합시다.
그럼 급한 게 아니니까.
지금은, 오늘은, 적어도 지금 나에게 있어서
“내가 의식을 체험하고 싶다” 하는 이것이 바로 의식이다.
따라서 “의식을 체험하고 싶다” 하는 것이
바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의 증거다.
이것까지는 지금 확실하다 이거예요.
‘안다’ 그래도 의식의 증거고
‘모른다’ 해도 의식의 증거다.
그러니까 의식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이 팩트다.
팩트 앞에서 모든 의심이 사라진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자기한테 얼마나 분명한가?
그러니까 이게 지금 아주 공부의 지금 포인트다.
지금은 그것까지만 일단 갑시다.
다음에 말후구, 최초구 이해되죠?
의식을 최초구라고 하고, 말후구라고도 하고
그리고 지금 한 생각이 일어나는 살아있는 자리라고 해서
‘활구’라고도 한다.
이게 지금 살아있는 말씀이다, 이 말이에요.
의식이
지금 살아 있어요. 맞아요?
/모두 같은 자리를 일컫는다./
여기 저기 하나 빠졌는데
인생 100년이 펼쳐져도
다만 이 한 개 의식의 작용일 뿐이다.
이해돼요?
그래서 한 개 의식의 작용이라는 것을 ‘일구’라고도 해요.
그 밑에다가 ‘일구’라고 적어놓으세요.
지금 최초구라는 말이나 말후구라는 말이나 ‘활구’라는 말이나
그 무엇을 해도
이 한 개 의식이 작용하는 거라서 ‘일구’라고 한다.
이 말이 같은 말이다.
이해되나요?
/마음자리는
우리 마음에 생각이 없는 상태인/
이 마음자리를 다른 말로는 본심이라고 해요, 본심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본래 상태이기 때문에 본심
이해되죠?
/즉 무심이라고도 한다./
지금 의식의 이름이 최초구, 말후구, 활구, 일구
또 다른 이름이 ‘무심’.
무심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심_ 의식이에요.
무_ 생각이 없는 상태의 의식
지금 여러분하고 저하고 이렇게 바라보고 있죠.
여러분이 저를 생각할 필요가 없죠.
현재에서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맞아요?
그러니까 현재에서 생각할 필요가 없어.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현재에 깨어 있으면
현재에 의식이 깨어 있으면 생각이 없어.
그거를 무심이라고 한다, 이거예요.
따라오시나요?
‘의식이 없다’가 아니고
‘의식에 생각이 없다’
그걸 무심이라고 한다.
/쌍차, 쌍으로 막는다.
좋은 것도 막고, 나쁜 것도 막는다 하면
쌍차가 곧 본심이요, 무심이다./
보세요.
쌍차를 해서 무심이 된다가 아니고
사실은 쌍차가 바로 무심이다.
간극을 지워 나가야 돼요.
한 번 눈길을, 현상인 대상에 가 있다가
이 눈길이 한 번 자기한테로 딱 오는 거.
이게 지금 견성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그 눈길을 돌려주는 게 핵심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금
오늘날 어떻게 눈길을 돌렸는가?
“내가 의식을 체험하고 싶습니다”할 때
이걸 제가 눈길을
내가 의식을 대상으로 해서 그거를 체험하고 싶다고 하는 그거를
한번 눈길을 돌린다, 이 말은
사고방식을 한번 전복시킨다, 이 말이에요.
팩트가 뭐냐?
내가 의식을 체험하고 싶다가 팩트냐?
아니면 그 말하는 것 자체가 의식이라는 게 팩트냐?
무엇이 팩트냐?
그 말하는 것 자체가 의식이잖아요.
그렇게 한 번 탁 돌려주는 것.
그게 견성의 인연을 심어주는 거다.
따라오죠?
여러분, 문밖에 나가자마자 잊어버릴 거예요.
그러더라도 잊어 먹는 것도 의식이다, 이거예요.
앉으나 서나, 날고 기나, 의식을 벗어날 수가 없다.
지가 스스로 까먹고 있을 뿐.
따라옵니까?
자기가 습관적으로 까먹을 뿐
실제로 팩트는 ‘모든 것이 의식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거를 조금만 확대해 보면
나의 60년 평생이
매 순간순간 의식이 아닌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미 의식이잖아요.
이 말이 정말 좋아요.
‘이미 의식이다.’
직료라는 말이 이미 성불해 있다, 이 말이에요.
맞아요?
이미 의식이다.
의식을 부처라고 해요, 불교에서.
그러면 나는 이미 부처다.
‘석가성불에 산천초목 동시성불’
이 말 음미해 봅시다.
석가가 성불하는 바람에
우리가 다 이미 성불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거예요.
아 고맙네.ㅎㅎㅎ
그러니까 ‘석가설불에 일체중생 동시성불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중생이라는 것이 착각이었다는 거지.
번뇌 망상도 무엇이에요?
번뇌 망상이 일어나면 그것도 의식이다, 이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의식의 증거다.
모든 것이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제는 차츰차츰
왜 조사들이 모든 사람이 본래성불해 있다고 하는 이 말을
왜 말씀하셨는지 진짜로 이 피부에 와닿기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가 팩트라는 말을 썼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의 공부는 팩트 체크야.
팩트를 체크하는 게 공부야.
번뇌 망상이 일어나
번뇌 망상이 의식의 증거다.
이해돼요?
번뇌 망상으로 인하여 팩트가 체크된다.
맞아요?
어떤 어릴 때의 감정적인 상처가 있다.
그것 때문에 괴롭다.
감정적인 상처가 일어나는 것이
바로 의식이 있다고 하는 증거다, 이거예요.
모든 것이 의식으로 통일된다.
결국에는 나무아미타불 하잖아요.
아미타불이 의식이잖아요.
여러분, 의식의 다양한 이름 중에 하나가
아미타불이에요.
그러면 나무아미타불, 이 말은
모든 면에서 팩트 체크한다, 이 말이에요.
아미타불을 체크한다.
나무아미타불_ 아미타불을 내가 체크한다.
‘아미타불에 귀의한다_ 아미타불을 체크한다, 구체적으로.
의식이 아미타불이다.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나무아미타불 하는 말이
내가 이 순간 지금 모든 것의 주어가 바로
모든 동사는 주어를 증명하고 있다.
이해돼요?
모든 동사는 주어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면 모든 동사를 손가락이라고 하고
주어를 달이라고 한다면
모든 손가락은 달을 가리킨다.
내가 지금 보는 모든 것은 손가락이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한결같이 나무아미타불, 달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니까 수행이 구체적으로 팩트를, 의식을 체크하는 것, 순간순간.
그래서 딴딴해지는 것.
그래서 팩트 앞에서 모든 의심이 녹아 나가는 게
이게 여러분
이것도 하루아침에는 안 되는 거예요, 사실은.
그러나 팩트의 힘은 굉장히 강력해요.
팩트의 힘은 강력하다.
본질이 모든 현상이라고 하는 동사를 지금 일으키고 있다.
그러면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경험이다.
맞아요?
무엇이 경험해요?
의식의 경험이에요.
본질이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와야 돼요.
지금 견성했잖아요, 맞아요?
혜명 상좌가 육조 혜능에게 법을 물었어요.
“생각하지 말라.”
그때 “너가 무엇인가?” 할 때
의식을 알아차리고 견성했어요.
그럼, 이 다음 공부는 뭔가?
글자 견성을 뒤집는 게 다음 공부
견성한 다음에는 ’성견‘이 다음 공부.
주어가 바뀐다 이거예요.
견성의 주어는 뭐예요?
본질을 발견한 주체는 아무개라고 하는 에고의 입장이잖아요.
이 다음 공부는 이걸 바꿔서 팩트는 무엇인가?
알고 보면 내가 발견한 게 아니고
의식이 ’이 세상‘을,
’이 세상‘ 대신에, 이 세상을 대표해서 ’나‘를 넣으면
의식이 나를 경험하고 있어.
따라옵니까?
내가 의식을 봤다고 했는데
알고 보면
의식이 나를 보고 있어.
이게 팩트다, 이거예요.
이 팩트의 힘이 이렇게 강한 거예요.
공부의 과정
첫 번째는 견성인데
두 번째는 성견
이것을 위해서 팩트 체크를 한다.
지금 공부의 두 단계
-의식을 발견하고
그리고 발견한 주체가 알고 봤더니
여러분, 의식을 발견했으면
정말로 의식을 제대로 발견했다면
모든 것이 의식이 한다, 이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의 주체가 의식이라는 걸 딱 깨달으면
여러분, 내가 의식이죠.
깨놓고 말하면 내가 의식이잖아요.
의식이 부처잖아요.
남한테는
“내가 부처”라는 말 하면 안 돼.
남한테는 내가 부처라고 하면 안 돼.
그러나 나라는 말을 빼버리고
그냥 이 세상은 부처 한 분 뿐이다.
이렇게는 말을 할 수 있잖아요.
다시
이 세상은 부처 한 분 뿐이다.
기독교를 말하면
이 세상은 성령 한 분뿐이다.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고, 모든 것은 부처의 나툼이다.
여기서 끝!
아휴, 시원하다.
오늘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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