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명하고 쌍벽을 이루는 하나의 선시
무비 스님이 쓰신 책 중에서 <3대 선시>라는 책이 있어요.
언젠가는 그걸 교재로 한번 수업을 할 생각인데
<3대 선시>가 있어요.
하나는 육조의 제자인 영가현각이 쓴 ‘증도가’
또 하나는 삼조 승찬이 쓴 ‘심신명’
또 하나는 ‘대승찬’이라는 시가 하나 있어요.
그 세 개를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무비 스님이 해설을 하고
그런 책이 있는데
항상 우리 공부의 기준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공부는 뭐냐?
중도예요. 중도.
그래서 그 중도를 나타내는 말이
쌍차쌍조 쌍으로 부정해서 쌍으로 막아서
항상 ±0상태에 오고
거기에 머물지 말고
다시 +든, -든 자유롭게 나갔다가 돌아온다.
근데 한 번은
지금 보통 사람 입장에서는
±0을 한번 자기가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 이거예요.
“이거구나” 하고 딱 확인하는.
의식의 중립 상태
의식의 보통 상태
의식이 우울증으로부터 그리고 부처의 경지까지
아주 고요한 평화로운 경지까지 천차만별이거든요.
근데 그중에서
‘어디다’가 아니고, ‘중간 지점이다’가 아니고
의식의 중립 상태는
우울증이거나 가장 낮거나 자존감이 가장 낮을 때나
아니면 자신감이 넘치고 평화로운 상태나
전부 의식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의식의 중립 상태는
0부터 100 사이의 50이 아니다.
±0 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다양한 에너지 상태 중에서 중간치가 아니라
가장 낮건, 가장 높건
의식이다는 뜻이에요.
우울증도 의식이 그렇다는 거고
평화로운 상태도 의식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식 자체를 말하는 거다.
비유하면
물이 구정물하고도 진흙하고도 섞이고
금하고도 섞인다 이거예요.
금붙이 사이에도 물을 넣을 수 있다 이거예요.
근데 어디에 있건
물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물의 상태가
구정물이건 아주 맑은 물이건
물은 물이다.
그 ‘물은 물이다’ 할 때
그게 ±0의 상태다 이거예요.
그래서 의식을 발견할 때는
그래서 아까 세 번째에
우리가 번뇌 망상 이런 데 시달리는데
그걸 통해서 번뇌 망상을 통해서 이것도 지나간다는 것도 배우고
두 번째는 뭐였어요?
첫 번째는 지나가고
두 번째는 실체가 아니다, 현상이다.
세 번째는 번뇌 망상의 재료가 의식이다.
번뇌 망상도 알고 보면
그것도 의식이 그런 모양으로 나타난 거다.
번뇌 망상을 꿰뚫어 보면
번뇌즉 보리다.
보리란 말도 의식이란 말이에요.
보리, 의식이라는 뜻이에요.
의식 자체가 깨어 있기 때문에
깨어 있는 의식을 보리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중심이 잡히면
그다음에는 물은
진흙에도 마음껏 섞이고, 또 금붙이하고도 섞이고
뭐 더 맑은 거 수정하고도 섞이고
자유롭게 모든 것에 섞여도
물 자체의 성질은 안 변한다.
그게 지금 핵심인 거예요.
그래서 물 자체의 성격이 안 변하면
어디라도 섞일 수 있잖아요.
섞이는 것은 쌍조라고 하고
모든 것을 쌍으로 긍정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번 근본의 본질을 한번 확인한다.
확인한 다음에는 마음껏 섞인다.
그걸 왔다 갔다를 자유자재로 한다.
이게 지금 중도예요.
그래서 지금 위에서 보면
<증도가>에서 보면 첫 시작이에요, 둘 다, 첫 시작.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
절학_ 배움을 끊고, 이 말은 배움을 마스터하고
여러분, 배움을 마스터 했다는 말은
첫 번째는 자기의 의식을 깨달았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배운다는 건 의식이잖아요.
의식을 깨달은 사람은
절학_ 이제 공부를 마스터 했다, 이 말이에요.
다시
의식이 뭐예요?
이거 하고, *! 이게 의식이에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들 때
여러분은 보고, 듣고, 자각하고, 느끼고
느끼는 거는 지금 엉덩이 느껴보세요.
감각이 있어요?
보고, 듣고, 엉덩이 느끼고
그리고 지금 이 말 안 해도 낮이라는 거를 알죠?
지금 아는 거다, 이거예요.
아는 거다.
아는 거에서는 별의별 걸 다 알죠.
절학무위_ 더 이상 이제 공부할 필요가 없어진 한가로운 도인은
절학_ 배움을 마스터하고 이제 할 일이 없어진
그러니까 어떤 치구심, 어리석게 막 구하는 마음 그것이 없어져서
무위_ 함이 없어진
한_ 한가로운 도인은
여기서 중도예요.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망상이 일어나도
부제_ 제거하지 않는다.
재밌는 게 도인한테는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가 아니고
일어났는데 부제_ 제거하지 않는다.
불구진_ 진리라고 또 해서 구하지 않는다.
지금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이 말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거예요.
도인은 어떻게 사는가?
망상이 일어나도 그걸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
첫 번째 지나가고
두 번째 사실이 아니고
세 번째 그 망상 자체가 의식을 증명하는 가르침이니까.
그 망상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거로 전환된다, 이거예요.
눈이 밝은 사람한테는
번뇌 망상이 없앨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법문이다.
번뇌 망상의 모양은 부정적이지만, 그 실체는 무엇인가?
의식이 그것도 인연 따라서 그냥 일어난 거다, 이거예요.
항상 이렇게 깨달음으로 돌이킨다, 이거예요.
번뇌 망상을 없애는 게 아니라
번뇌 망상 덕분에
나의 안목이 더 분명해진다, 이거예요.
부정적인 것은 제거하고, 긍정적인 것은 구하는
그 마음 뒤에는 뭐가 있는가?
여러분 놀랍게도 욕망이 숨어 있어요.
우리가 세간에서
식색명_ 돈, 남녀, 그리고 명예를 추구하는 그 욕심이,
세간에서의 욕심이 출세간으로 옮겨져서
출세간에서 또 욕심을 부리고 있어.
그 모양이 나쁜 번뇌 망상은 없애려고 하고
그리고 어떤 특별한 진리를 내가 쟁취하려고 하는
그 욕심으로 변질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눈이
자기 욕심을 보고 있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 욕심이 없으면
번뇌는 그냥 번뇌지요.
일어날 것이 그냥 일어난 거죠.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거 외에
따로 뭐 특별한 진리라는 것이 또 있을까요?
여러분, 깨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거 외에
어떤 특별한 별세계가 있을까요?
여러분 있을까요?
있을 것 같다고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진을 구한다고요.
근데 그런 세계는 없다는 거죠.
지혜라는 것은
여러분, 지혜라는 것은 놀랍게도
그런 이상은 없다는 거예요.
그럼, 무엇만 있는가?
적나라한 현실만 있어요.
지혜의 끝판왕은
자 한번 따라 해 보시겠어요.
“현실이 신이다.”
이게 지혜의 끝판왕이에요.
모든 사람이 죽기 살기로 현실하고 싸운다 이거예요.
현실을 바꾸려고 하고, 막 하는데
알고 보면 현실이 신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신하고 싸우는 게
이 어리석은 인간의 모든 고통이 거기서 나와요.
있는 그대로 일어나는 이대로가
사실은 절대예요.
왜냐하면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것밖에 없으니까 현실이 있는 그대로 절대예요, 절대.
절대와 싸우는 것이
어리석은 지금 인간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까지 되기까지는 어렵잖아요.
자 보세요.
이상을 쫓아가지 않고 현실에서 100% 수용한다.
다시
이상을 구하지 않고
있는 이대로 번뇌 망상의 현실을
있는 이대로 인정해서 수용한다.
그럼 그 사람의 마음은 편안할까요? 아니면 불안할까요?
편안하겠죠.
맞아요?
편안하면 그 마음이 자기가 찾는 이상이야.
이게 우리가 이상이
극락이나 하늘나라가 없다는 말은 아니라
거꾸로 추구한다는 뜻이에요.
현실을 무시하고
무시하는 만큼 강력하게 이상을 추구한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쌍차를 왜 하느냐의 문제예요.
근데 알고 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은
머리가 만들어낸 가상 현실이고
그거는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에는 그런 건 없어요.
있는 건 뭐냐?
적나라한 지금, 이 현실이라고 하는 것만 있어.
근데 이걸 받아들이면
그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부 과정에서
여러분께서 한 번 정도는 이 단계를 거쳐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중요한 거
의식을 깨닫고
그리고 의식을 믿어서 맡기고 살아야 되는데
이 믿음을 흔드는 게 있어요.
욕망이에요.
너무 당연하지 않나요?
이 믿음을 흔드는 게 욕망이에요.
근데 그 욕망의 메커니즘은 교묘하게 우리를 속여요.
귀에다 대고
“현실은 부정적인 거야 그리고 어떤 이상이 있어.
그러니까 이상을 추구해야 돼” 하는
그 믿음으로 그 생각으로
우리 이 믿음을 흔들어요.
그래서 보세요.
이 욕망을 이기는 방법,
중요하네.
여러분 욕망을 이기는 방법 중요하지 않나요?
정말 중요하죠.
우리의 모든 고통은 욕망이 만들어내요.
그러면 욕망을 이기는 방법이 있어요.
그거는 뭐냐?
번뇌 망상을 겪는 거예요.
진짜 이거 지금 반대예요.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번뇌 망상을 겪는 거예요.
자, 번뇌 망상 자리에
번뇌 망상은 현실이죠.
현실은 다른 말로 하면 현상이잖아요.
그러면 현상에서 우리가 겪어내는
가장 유교에서 말하는 7가지 감정이 있어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예요.
7가지로 대표되는 감정이 있죠, 맞아요?
욕망을 이기는 방법은 뭐냐 하면
이 감정을 우리가 겪는 거예요.
오늘 제가 말을 하다 보니까
인간 비밀을 하나 제가 지금 이야기하게 됐네요.
한동안 제가 이 감정 때문에 힘든 기간이 있었어요.
공부하고 난 뒤에 제일 큰 장애가
감정적으로 묵은 감정을 건드리는 것들
그게 가장 나를 흔들고, 내가 흔들리게 만드는 핵심이에요.
근데 이걸 어떻게 이기는가?
여러분, 이 도전
깨달은 사람도 소용없어요.
겪는 거예요.
그거 그 감정을.
예전에는 싫어서
막 화를 내고, 도망가고, 술 마시고,
그 감정을 잊기 위해서
술 마시고, 멀쩡한 사람 불러내고, 영화를 보고 해서
잊어버리려고 이렇게 했는데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거 이겨내는 방법은
그거를 적나라하게 처절하게 겪는 거예요.
이게 너무나 가혹하게 여겨지지만
가혹하지만 이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그 감정을 통해서
지금까지는 계속 도망갔거든요, 이해돼요?
근데 공부의 힘은
그걸 부닥쳐서 겪게 만들어.
그러면 어떤 깨우침이 오느냐 하면
여러분 결국에는 뭐냐
도망가는 한은
이 ‘나’라고 하는 에고의 분별심을 극복할 수가 없어요.
도망가는 한은, 맞아요?
근데 내가 겪으면 어떻게 돼요?
도망 안 가고 고스란히 겪어버리면
하나가 되는 거예요.
타성일편(打成一片)의 비결이에요.
우리 공부가 마지막에 가면
타성일편,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공부의 마지막에 우리가 극복해야 되거든요.
타성일편 어려워요. 어렵죠?
지금 현타가 왔어.
현실 자각 타임이 왔어.
지금 이 공부가
이치를 의식을 깨닫는 거는 쉬운데
그 뒤에 이 타성일편 되기
다시 말하면
에고의 분별심이
좋은 거는 추구하고 나쁜 것은 꺼리는
그래서 이 분별이 확고해지는, 공고해지는 이 메카니즘을 거꾸로 하기
이게 지금 쌍차쌍조의 뜻이에요.
지금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은
망상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망상을 겪는다, 이거예요.
그 속으로 들어가서 그거를 겪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의식의 힘으로 겪는 거예요.
그냥은, 맨 정신에는 이걸 못 겪어, 이해돼요?
맨 정신으로는 이거를 못 겪어요.
근데 어떤 힘으로 겪는가?
의식의 힘으로, 이 깨어 있는 의식의 힘으로
눈이 밝아지기 때문에
이걸 하나하나 자기 감정의 변화를 보게 되잖아요.
그리고 거리가 생기면
그 감정하고 그전에는 떡이 돼버려. 이해돼요?
그런 감정하고 떡이 되어서 확 사로잡힌다고 할까? 그랬는데
의식이 깨어 있으면
그런 감정을 이제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보면 볼수록 거리가 생기고
떡이 안 돼.
그래서 겪어내는 힘이 생기는 거예요.
그럼 마지막에 뭐가 있느냐 하면
놀랍게도 기다리고 있는 게
마지막에 놀랍게도 기다리고 있는 게
그 배반감, 수치심, 모욕감이
바로 나의 수많은 얼굴 중에 하나라는 사실.
그게 나라는 사실.
그러니까 이게 갈라지지 않는 것
그걸 완전히 껴안아서
도망가지 않고 껴안아서 하나가 되면
이게 ‘그것조차도 나구나’ 하는
그 수용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뜻밖에도 해결책은
그런 세계가 없는
별세계로 가는 게 아니라
여기서 그거를 겪어서
나와 그것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이 깨달음의 세계로
이것이 소화가 되는, 극복이 되는.
그러니까 제일 좋은 거는
인간마다 약점이 있어요.
이런 감정 중에 인간마다 여러 감정이 있는데
그중에 치명적인 감정이 있어.
되게 자기 약점이 있어요.
그걸 건드리면 폭발을 해요.
그런데 그걸 만약에 수용할 수 있게 되면
다른 수용하지 못할 감정은 없어져요.
맞아요?
지금 평상심을
평_ 평정이
상_ 유지되는
심_ 마음이라고 했잖아요.
평등이 유지되는 마음이 되려면
깨어 있는 자각의 힘으로
자기한테 벌어지는 이런 감정의 힘듦, 감정의 이 어려움을
깨어 있는 힘으로 겪어내는 거예요.
그리고 깨닫게 돼.
우리가 이 땅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가장 어려운 이 일을 해냄으로써
이 세계가 이걸 겪음으로써
이 세계가 한 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어요.
뜻밖에도 도망가서 깨달음이 있는 게 아니라
이 세간에서 도망을 가서
깊은 산에 가서 자연인이 되어서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극락정토가 되는 게 아니라
뜻밖에도 반대로
여기서 철저하게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겪음으로써
그리고 그 감정과 하나가 되어 봄으로써
그 감정이 바로 나라고 하는 이 사실을
그래서 그 하나만 하면
모든 것과 하나가 될 수 있어요.
이거 쉬운 거 아니라는 거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게 보림이에요, 보림.
깨달음 이후에 보림은
자기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리는 감정들
그거를 고스란히 겪어내는 거예요.
겪어내면 모든 감정이
다 한 개 의식이
나를 교육시키러
역행보살로 그 감정들로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요.
겪어내는 사람만이.
그래서 이런 말이 간단한 것 같지만
여러분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은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도 않고, 진리라고 따로 찾지도 않는다.
이 말이 간단한 것 같지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가장 어려운, 인간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가장 치명적인 자기 약점
그러니까 약한 감정, 약점으로서의 감정을
내가 고스란히 겪어서
‘겪는다’는 걸, 요즘 심리학 용어에서는 ‘수용한다’는 말을 써요.
그런데 그 수용이
그냥 수용이 아니고 겪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도망가지 않고
그걸 겪어냄으로써 바닥을 치는 거예요.
바닥을 치는 것, 이해되나요?
가장 힘든 감정을 내가 겪어서 바닥을 쳐보면
그다음부터는 뭐든지 이제는 겪을 수가 있어.
별거 아니게 돼. 이해돼요?
강한 사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공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깨달아도 경계에 오면
혼비백산 흔들린다.
그때 철저하게 겪어내는 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아주 은밀해요.
인과고 과학적이에요.
이게 과학적이라.
그래서 여러분 ‘현실이 신이다’, 이 말 이해되세요?
그리고 어려운 감정들이
나를 일깨워주는, 나를 성숙시켜주는 역행보살이다.
그러면 그다음 과제는 뭐예요?
실제로 그 벽을 한번 넘어서는 거죠.
넘어서면 굉장히 성숙한 인간이 되겠죠.
그리고 끝에 뭐가 오느냐?
각성이 와요, 각성.
그러니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각성이야.
그 한 인간이
정말로 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 넘어서는 것
그게 저는 각성이라고 봐요.
그리고 각성의 내용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줘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제가 보니까
각성할 때 목숨을 걸 수 있게 되더라고요.
한 인간이 각성하면
그 어떤 내용에 대해서
자기 목숨을 걸고 할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와요.
이해되죠? 충분히.
그러니까 그 각성이 언제 일어나는가?
바닥을 칠 때.
그 바닥을 친다는 말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감정적인 가장 약한 고리를 내가 만났을 때
그거를 내가 두말하지 않고 수용해서 겪어내는 것
그때 바닥을 치는 거예요.
그때 각성이 일어나.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이 하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나 이런 분들이 어떻게 이걸 알고
원수를 사랑하라 했을까?
지금 제가 한 말을 딱 한마디로 말하면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이에요.
우리는 번뇌 망상, 뭐 이런 거를 원수처럼 없애려고 하는데
그걸 사랑하라.
그러니까 참 기독교가 힘이 참 있는 것 같아요.
우리 공부가 여러분 만만하지 않습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이게 저는 육조 혜능의 파워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한 인간한테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수하지 않는다’는 말이
간단한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선을 구하지 않고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그냥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이
그냥 ‘생각하지 말라’ 그 말이 아니라니까?
그 말이 아니고
“선을 추구하지 말고
악이라고 제거하려고 하지 말고
정말로 무심한, 평정한 그 마음 상태
그거를 한번 겪어보는 것이 깨달음이 지금 단초인데
저는 이게 육조 혜능의 실제로 만나고
딱 인격의 힘이라고 봐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이 간단한 말은 아니에요.
근데 혜명이 딱 마음을 바꿔서
이 더벅머리,
자기보다 한참 아래로 나이도 젊고 하는 사람한테
정말로 이 법을 물어서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정말로 했을 때
그 인격의 힘 앞에서
자기 마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고 저는 봐요.
행간에.
그냥 뭐 이렇게 있다가
마음이 없을 때 그냥 “이게 의식이구나” 하고 이렇게
그런 거 말고
저는 이 대목에서 혜명 상좌의
소위 말하는 에고라고 할까?
그 사람이 쥐고 있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이 사람이 했다고 저는 봐요.
정말로 모든 것이 탁 무너지고, 텅 비었을 때
그때 남아 있는 그 순수의식
그걸 발견한 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자기가 무너진 상태에서 발견하는 거 하고
그냥 이렇게 법문 듣다가
“어, 지금 깨어 있는 이 의식이구나” 하고 하는 거 하고는
차이가 많이 있다.
그냥 알아듣는 사람은
앞으로 이 무너지는 시간이 길어요. 이해돼요?
자기 에고가, 자존감이 무너지면서
딱 이걸 깨달아야 되는 게 제일 좋은데
큰 의심에 크게 깨닫는데
근데 큰 의심이 없이 그냥 깨닫는 것은
작은 의심에는 깨달음이 작을 수밖에 없다.
이걸 옛 사람들이
진흙을 가지고 빚어서 불상을 만드는데
진흙이 작으면 불상이 작고
진흙이 많으면 불상이 크다 그랬어요.
모든 깨달음이 일어나는 조건이
깨달음에 대한 간절한 이런 발심이잖아요.
근데 그 발심이 크면 클수록 깨달음도 큰 거예요.
이 말은
깨달음과 동시에
인간이 에고가 무너지는 것이 같이 일어난다는 소리예요.
이 두 개가 같이 가야 돼.
그래서 공부시킬 때
아끼는 사람한테는 갈군다, 이거예요.
갈구어서 인격적인 모멸감을 심어주고
모욕감을 느끼게 하고
그걸 견디고 견뎌서
이 깨달음에 대한 간절함이
그런 걸 견뎌서 깨닫게 되면
깨달음과 동시에 인격적인 성숙
텅비어지는 이것이 같이 생기는
큰 깨달음이 오는데
그런 거 없이 깨닫는 사람은
앞으로 이 자기 감정을 다스려야 하는
이 현실이라고 하는 신과
정말로 내가 이 신 앞에서
내가 완전히 항복하는, 굴복하는 그 기간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다, 이거예요.
그럼, 그 기간을 줄여주는 방법은
깨닫기 전에
오히려 계속 이런 스승 제자가 되면
“너 내가 때려도 고발 안 할 거지?”
여기 서명해, 해놓고
그다음부터 갈군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 기간을 견뎌내는 그 사람이
제대로 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제 말 지금 논리적으로도 맞죠?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
여러분께서는 돌아가셔서
“내가 마음공부하는 사람인데” 하면 안 돼요.
그럼 옆 사람이 그거 그게 약점 돼요.
옆 사람이 뭐라고 하냐 하면
“아니 마음공부하러 인사동 선원 다니는 사람이
뭐 이것도 못 참아? 왜 여기에 화를 내?”
이런 식으로 공격 당해요.
근데 그거를 돌아보는 거죠.
그런 공적 앞에서 내 마음이 일어날 때
내 안에 그것이 있다는 거지.
그거를 정말로 진지하게 겪어낸다는 거예요.
그게 진짜 공부.
진짜 공부는
가까운 사람이 역행보살로 나의 감정을 건드릴 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완전히 욱하거든요.
그런 거 있죠?
저도 있어요. 저도 있어.
다른 말은 웬만하면 다 넘어가는데
참을 수 없는 한마디 말들이 있어.
그거는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 집안의 문제, 이런 거 하고 다 부모하고도 엮여 있더라고
제가 보니까
그런 게 있다 이거예요.
그럴 때 욱하고 막 뚜껑 열릴 때
마음공부하는 사람은 의식을 자각하고
그 의식의 힘으로 그거를 다 봐보고
그리고 정말 수용해서 겪어보는 거예요.
겪어보는 것
이게 지금 비결이에요.
이 감정을 겪을 때는 끙끙 앓아요.
그리고 마치 몸살 앓고 난 뒤에
일주일 몸살 앓고 마지막에 털고 일어날 때 개운한 기분 있죠?
그거랑 비슷해요.
이게 몸살이에요.
감정을 겪는 것은
우리한테는 몸살을 겪는 거와 같아.
근데 그 몸살을 겪고 나면
툴툴 털고 가뿐하게 일어나잖아요.
근데 그 단계가 꼭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거
깨달음이라고 하는 의식이 없이 하기는
이건 어려워요.
좀 많이 어려워.
근데 의식을 깨닫고 난 다음에는
이것이 할 수가 있게 돼.
그래서 제가 믿음이라는 거예요.
믿음을 가지고 겪는다.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부처님께서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희로애락애오욕
(기쁨(정신적인)/ 노여움, 분노/ 슬픔/ 즐거움(육체적인)/ 사랑/ 미움/ 욕심)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그것을 통해서 내가 겸손하게
내가 인간으로서 성숙할 수 있는 기회가 거기서 온다.
이때 겸손하게 말도 또 하셨거든.
그러니까 인간이 이런 거 없으면
의기양양해서 겸손하기가 힘들어져요.
그러니까 정말로 인생은 감사하게도
우리를 공부시켜주기 위해서
인생은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도전을 던져줘요.
생로병사, 이 도전을 던져줘요.
이게 지금 진짜 화두예요.
그럼, 이 화두를 어떻게 푸는가?
고스란히 겪는 거예요.
근데 거기서 묘가 있어.
밑바닥, 바닥을 치면
진짜 가벼워지는, 정말 인간이 성숙해지는
그런 기적 같은 연금술이 받아들이는 데서 일어나요.
우리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끝내 이걸 이겨내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하여튼 이 우리의 본질인 의식이
언제나 함께 있다고 하는
아무리 아파도 완전 함께 하고 있다는 이 믿음이
현실이 되면
죽음도 극복이 된다, 이거예요.
그래서 죽기 전에 우리가 단단한 공부를 해서
제가 말한 단단한 공부는
이런 깨달음을 가지고
현실에서 이 육체의 고통과 감정적인 고통을 실제로 겪어내는 게
진짜 공부예요.
그 단단한 공부를 해서
마침내 생로병사를 우리가 이기게 되는
그래서 결국에는
‘의식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
부처님께서 ‘나는 불사를 얻었다’고 하는 그 선언이
나한테서도 일어나게 되게끔.
그러면 ‘불사를 얻었다’, 이 말은
생로병사의 불생불로불병불사를 얻었다는 거잖아요.
근데 그걸 어떻게 얻는가?
생로병사를 겪음으로써, 고스란히 겪음으로써 얻는다.
감사합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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