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러분, 의식이 있어요?
아니 지금 순간적으로 초등학생이 되세요.
특별한 것만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 지금 의식이 있어요?
의식 있죠.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걸 아는 것은, 살아있다는 걸 아는 것은
의식이 아는 거다, 이거예요.
그러면 의식이 지금 이렇게 엄연히 있죠, 맞아요?
그러면 지금 한 발 더 나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러분, 지금 중요한 대목이에요.
제가 이 순간 깨어 있는 것은
의식이 이렇게 깨어 있는 거예요, 맞아요?
제가 이 순간 말하는 것은
제 의식이 말을 하는 겁니다, 맞아요?
제가 지금 손을 들면
손을 드는 것은 저의 의식이 손을 이렇게 드는 거예요.
이거 가지고 모자란다 그러면 다리를 한번 뻗어볼게요.
다리를 뻗으면
다리 뻗는 것도 제 의식이 지금 다리를 이렇게 뻗은 거예요.
그러면 보세요.
제가 하고 있는 이 순간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의식이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거를 조금 더 압축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말을 한다면
지금 이 순간 제 의식이 이렇게 보고 있어요.
보고 제가 알잖아요.
무엇이 그래요?
저의 의식이 그래요.
여러분이 지금 제 말을 듣고 호응하시잖아요.
여러분의 무엇이 그래요?
의식이 그러죠.
더 놀라운 점, 한 걸음만 더 나가 봅시다.
여러분한테 지금 의식이 있죠?
그 의식이
여러분이 지금 바닥에 좌복에 앉아 있든, 의자에 앉아 있든
이렇게 앉아 있다는 걸 느끼죠.
엉덩이 감촉이 있어요?
있죠.
그 느끼는 게 뭐예요?
의식이죠.
그러니까 의식이 있죠.
그런데 이 의식이 있는데
의식이 어떤 식으로 있느냐고
한 번만 더 나가서 생각을 해보자, 이거예요.
그러면 지금 지금 현재 저 같으면
제가 가지고 있는 보고, 듣고, 또 촉각 느끼고
이렇게 또 이게 아는
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걸 비롯한 수많은 작용을 하고 있죠.
지금 각자가.
근데 저한테는 지금 이렇게 보고 있는 게
모든 작용 중에서는 조금 더 실감이 나요.
이해되나요?
여러 가지 보고, 듣고, 뭐 온갖 것 중에서
지금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이 조금 더 실감이 나요.
모든 감각 기관 중에서.
옛 분들이 눈이 8할이라는 그런 말 하잖아요.
사람 몸에서 눈의 역할이 8할이다.
그만큼 눈이 받아들이는 정보가 가장 많다는 소리죠.
그러면 저는 지금 제 의식이 어떻게 느껴지느냐 하면
이렇게 보고 있는데
보고 있는 여기에
이 깨어서 이렇게...
이 이상은 말을 못하겠네ㅎ
이렇게 멀쩡하게 깨어서 지금 보고 있는 여기에
이 의식이 이렇게...
이게 형태가 없네요.
여러분, 여러분도 의식이 형태가 느껴지나요?
안 느껴지죠.
형태가 없고, 크기가 없네요.
의식이 있긴 있는데
형태가 없고, 크기가 없고, 색깔이 있나요?
굉장히 투명하죠.
완전히 투명하고
그리고 남자예요? 여자예요? 의식은?
육체는 성별이 다르지만
의식은 남녀가 지금 구분 안 되죠.
여기까지 다 따라오십니까?
예.
근데 그 의식이
조금씩 이렇게 매번 처음
“아, 이게 의식이 있구나” 하고 한번 알아차리고 난 뒤에
계속 이 의식에 대한 어떤 감각이
조금씩 조금씩 이게 자라요.
구체화되고, 더 분명해지고, 확실해져요.
그래서 이게 쭉 쌓이면
지금 저 같으면
이렇게 보고 있는데
시야 전체에, 의식이 여기에 꽉 차 있네.
의식이 크기가 없잖아요, 모양도 없고.
그게 지금 여기 시야에 이렇게 꽉 차 있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이것이 분명해지면 분명해질수록
일종의 지금...
여러분 어떤지 한번 보세요.
저 같으면 지금 저의 육체의 눈이
피지컬 아이가 있는 이 자리에
실제로는 육체의 눈이 있는 게 아니고
이 세계가 보여요, 이 세계가 있어요.
따라오십니까?
내 육체의 눈이 있어야 할 요 자리에
지금 제가 어떻게 느껴지느냐 하면
요 눈이 보여지는 게 아니라, 눈이 보이고 느껴지는 게 아니라
이 자리에 지금 여러분을 포함한
이 세계가 이 큰 세계가
지금 저의 눈같이 느껴져.
근데 이 눈은 이렇게 쌍으로 된 게 아니고
지금 피지컬 라인은 쌍인데
이거는 지금 하나로 느껴져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느끼기에 저의 눈이
육체의 두 눈이 있어야 할 이 자리에
실제로는 하나의 이 세계가 이렇게 있어요.
그렇게 느껴져요.
근데 이 세계가
지금 한 개 눈으로 느껴지는데
이때 눈은 마음의 눈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네요.
육체의 눈은 아니니까.
심안, 마음의 눈이 한 개
마음의 눈이
지금 요 전체가 한 개 마음의 눈으로
저는 지금 지각이 돼요.
근데 거기에 희한하게도
삼라만상이 여기에...
삼라만상만 지각되는 게 아니라
삼라만상이 이 텅 비어서 투명하면서도 깨어 있는 이 의식...
이거를 지난 시간에 제가
옛 선사가 명주라고 불러서
“아 참 실감난다”고 제가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죠.
명_ 밝을 명
주_구슬 주
명주_ 밝은 구슬
그러니까 지금 제 육체의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실제로는 한 개의 투명한 밝은 구슬이 이렇게 있어서
그 구슬 속에 지금 이렇게 삼라만상이
이렇게 드러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드러난 삼라만상은 어떤 느낌이냐 하면
이 투명한 의식이 자각되는 동안에는
이 의식에 나타난 것은
이때 현상이, phenomenon, 영어로 현상이라고 하는 이것을
한자로는 현상(現象)이라고 쓰거든요.
이 코끼리 상(象)을 써요.
현(現)_ 지금
지금 코끼리 상(象)자는 뭐냐 하면
이미지라는 뜻이에요.
한 자의 코끼리 상(象)자는 이미지라는 뜻이에요.
현상(現象)은 이 투명한 의식의 구슬에 나타난 이미지처럼
지금 나타난 이미지
이걸 현상이라고 이렇게 부르는 거 보니까
한자의 글자 속에
정말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고 할 수가 있네요.
정말 중요한 것은
보세요.
육조 혜능 스님의 입장이라면
보는 거는
지금 우리랑 똑같은데
의식을 자각하고 있다, 이거예요.
육조 혜명 스님이 깨달아서
오조로부터 깨달은 징표로 의발을 물려받았을 때는
육조 스님한테는 이런 자각이 있다.
그 자각의 내용은
의식이 스스로 의식이 자각되고 있다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의식이 자각되고 있는 사람한테는 제일 중요한 게
여러분 보세요.
제일 중요한 게
자기가 하고 있는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 이 모든 것이
의식이 자각되고 있는 사람한테는, 무엇이 할까요?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이것이
무엇이 하고 있을까요?
자기의 의식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거예요.
그거를 느끼고 있다, 자각하고 있다.
그런 사람한테는
진리는 뭐냐 하면
변하지 않는 게 진리인데
변하지 않는 진리는 본질이고
본질은 의식이거든요.
그러면 이 의식이 지금 스스로 자기한테 분명한 사람한테는
이거를 구하러, 따로 현상에서 이거를 구할 필요가 있나요? 없나요?
지금 이 질문을 하려고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긴 시간을 이야기했네.
방금 제가 쭉 여러분하고 함께 쭉 끌어온 게
내가 이렇게 있다.
이건 누구나 느낀다.
내가 있다는 걸 느끼는 것은
몸이 느끼는 게 아니고 의식이 느낀다.
그리고 그 의식을 스스로 내가 자각하고 있다.
그러면 그런 사람한테는
지금, 이 눈에 보이는 이 세계 전체가
한 개 의식, 한 개 의식 덩어리
투명한 구슬 같은 한 개의 의식 덩어리 같다 이거예요.
그런 사람이 일거수일투족을 하는데
이 의식이 하고 있다는 자각이 분명하다.
맞아요?
그게 깨달은 사람이 모습이에요.
그러면 그런 사람이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이것이 의식인데
이거를 두고
이걸 느끼고 있으면서 의식을 찾으러
뭔가를 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지금 이해됩니까?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내가 지금 20분 이상을 떠들었네.
지금 우리들은 여기 무대에 등장한 등장인물이에요.
의식이라고 하는 무대에
삼라만상이 현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실체가 없어서 이미지라는 코끼리 상(象)자를 쓴 거예요.
지금 이것을 나한테 대입하면
여러분, 이걸 나한테 대입하면
내가 하는 일거수일투족의 주체가 의식이죠.
맞아요?
아이러니를 보세요.
내가 마음공부하는 사람이라서
마음공부하는 사람의, 최고의 좋은 거는 의식이에요.
그러면 의식을 깨달으려고 하는 거예요.
보세요.
의식을 깨달으려고 하면
의식이 밖에 있어요? 아니면 깨달으려고 하는 이것이 의식이에요?
지금 이 말귀 알아들으면
우리의 사고 방식이 확 바뀐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중요한 거예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선이라고 추구하지 말고
또 우리 마음공부하는 사람한테는 악이 뭐냐 하면
번뇌 망상이에요.
맞아요?
생각 과잉이에요.
그러면 생각 과잉은 없애려고 한다, 이거예요.
의식은 내가 깨달아서 얻으려고 하고
의식은 얻으려고 하고
번뇌 망상은 버리려고 한다.
이해되나요?
이게 선을 추구하고 악은 버린다는 거예요.
일반인들은 이런 사고방식에 빠져 있어요. 그렇죠?
근데 실제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가 구하고자 하는 선이
대상으로 밖에 있는 게 아니고
구하는 이것이 선이다, 이거예요.
이게 의식이다. 이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의식이라면
여러분 놀랍게도 이것이 의식이라면
생각은 약간 객관적인 거예요.
다시 말하면 현상에 속하는 거예요.
밖에 비 오고, 바람 불고, 햇볕 나고 하는 이런 자연 현상들을
여러분이 바꾸려고 해요? 아니면 그냥 둬요?
그냥 두지요.
똑같이 생각, 감정, 또 통증
나이 먹으면 통증이 생기더라.
그러니까 이런 것도
밖에 바람 불고, 비 오는 것처럼
의식한테는 지각이 돼요.
일단 의식이 자기가 아닌 거야.
현상은 그냥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의식 입장에서는
현상이에요, 이미지들이에요.
생겼다가 그러고 또 없어지고 있어.
그리고 실체가 없어요.
그리고 무상해.
영원하지가 않아요.
그러면 의식으로 깨어 있으면
안팎에서 자연 현상은 일어나되
그것에 대해서 내가
“이거는 꼭 잡아야겠다, 아니면 이거는 내가 버려야겠다” 하는 것이
의식 입장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 이거예요.
저절로 사라지고 있다, 이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체가 없다, 이거예요.
지금 이 순간 나한테 의식이 있어요.
그리고 이 의식이 모든 걸 하고 있어.
맞아요?
그러면 이거를 두고 따로 의식을 찾을 필요가 없다.
불불(佛佛) 불상견(不相見)
이런 말, 조주 이런 분들이 하셨거든요.
부처와 부처는 서로 볼 수가 없다.
이 말 이해되세요?
의식과 의식은 서로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하나라서.
그러면 밖에 의식이 있고
그걸 의식을 구하는 나의 의식이 있다면
어떤 게 진짜예요?
내 의식이 진짜고, 밖에 있는 것은 이미지다, 이거예요.
가짜다 이거예요.
그러면 또 다른 말로 보세요.
번뇌를 없애는 것도 의식이에요. 맞아요?
그러면 의식 입장에서는
밖에 바람 불고, 비 오는 것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내 안에 생각, 감정을
생각, 감정을 번뇌라고 합니다.
내 안에 생각, 감정이라고 하는 이 번뇌를 따로 없앨 필요가 없다.
그거는 그냥 자연 현상이다.
의식이 확고한 사람은
따로 진리를 구할 필요가 있다? 없다?
없지요.
또 의식이 확고한 사람은
성가시다고 해서
따로 생각, 감정을 없앨 필요가 없잖아요.
자기로, 자기 혼자로,
자기 의식은 자기 혼자로 완벽하게 충만해요.
여러분, 알고 나면
지금 깨어 있는 이 의식은
절대로 특별한 게 아니고
그리고 내가 이거를 알았다고 해서 새로 얻은 것도 아니에요.
이해돼요?
깨달음의 징표는
새로 생긴 것은 깨달음이 아니에요.
알고 봤더니 처음부터 이게 있었네.
그리고 나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지고 있네.
이 의식을 깨닫는 데는
조금 조금씩 깨닫는 게 아니고
그냥 턱 이렇게 깨닫는 거예요.
왜냐?
본래 있던 거니까.
본래 있던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 돈오.
그러니까 본래 있던 걸 확인하는 것은
서서히 확인하는 게 아니고
“그냥 있네. 이거 처음부터 있었네.”
여러분, 의식이 처음부터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죠.
처음부터 있는 걸 확인하기 때문에
시간이 안 걸리기 때문에
돈_ 단박에
오_ 깨닫는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돈오_ 단박에 깨닫는다.
왜냐?
처음부터 있던 것을 확인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이후에
대개는 여러분, 돈오를 처음에 했을 때는
모든 사람이 아무개로 살아오다가
돈오의 의식을 한번 발견해요, 맞아요?
그런 입장에서, 아무개 입장에서
나의 본질인 의식을 한번 발견을 해요.
이게 돈오예요.
근데 여러분
이 대목을 이야기하려고
제가 진짜 오랫동안 끌었다.
보세요.
나의 identity가 아무개에서 의식으로 바뀌는 게
우리의 진짜 수행이에요, 이해되나요?
이게 진짜 수행이에요.
그러면 내가 아무개에서
이 텅 빈 의식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아무개라고 하는 습관이 워낙 커서, 딴딴해서
그것이 내가 아무개에서 의식으로 전환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그거를 점수라고 불러요.
돈오 이후에 점수
점수가 아무개에서 의식으로
나의 정체성이 바뀌는 거를 점수라고 부른다.
보림이라고도 불러요.
깨닫고 난 뒤에
깨달음을 잘 지켜서 깨달음을 완성한다.
이런 의미가 보림에는 들어 있어요.
보림이라는 말은
보호임지(保護任持)
보호_ 우리들의 이 의식을 잘 보호해서
임지_ 맡아서 잘 가지고 간다.
보호 임지 줄여서
보림
보임인데, 발음을 보림이라고 해요.
보림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거예요.
근데 동시에
돈오점수라는 것도 있지만
돈오돈수도 있어요. 돈오돈수 있어.
어떤 의미로는 돈오점수가 완성되면
돈오점수가 완성되는 것을 돈오돈수라고 불러요.
오케이? 어렵지 않죠?
그런데 선에서는 돈오점수는 현실에서 부정할 수가 없지만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돈오돈수다 하는 가르침도 있어요, 선에서는.
그게 왜 그런가 하는 걸
지금 쉬려면 한 10분 남았는데
한 10분 동안에 돈오돈수가 뭔지를 한번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해요.
좀 새롭죠?
돈오하고 점수하는 입장을 혜안이라고 해요. 혜안
돈오돈수를 법안이라고 해요.
“내가 아무개다”라고 하는 이 에고, 원죄, 무명, 업장
즉 소위 말하는 무명, 업장
또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
“내가 아무개다”하는 게 이거다, 이거예요.
그리고 이거를 불교에서는 적나라하게 ‘전도몽상’이라고 불러요.
“내가 아무개다” 하는 게 ‘전도몽상’이라고 이걸 불러요.
전도라는 말은
전_ 180도가 뒤집어진 거고
도_ 아래 위가 뒤집어진 거고
전도_ 완전히 뒤집어졌다는 뜻이에요.
아무개는 내가 의식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한 번 의식을 발견을 해도
아무개는 계속 저항을 해.
이 말 이해됐나요?
그래서 혜안을 뜨고, 법안을 뜨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점수라는 것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근데 놀랍게도 돈수도 있다, 이거예요, 돈수.
돈수는 시간이 안 걸린다는 뜻이에요.
돈수의 가장 가장 핵심이
여러분, 사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정말 중요한 부분이네요.
혜안을 뜨고 그다음에 법안을 뜨는데요
과정에 방해하는 것이 에고예요, 맞아요?
그 에고가 무엇을 가지고 방해하느냐 하면
핵심이 의심이에요.
따라옵니까?
의심이에요.
에고의 무기가 의심이에요.
그래서 선에서는 의심의 반대말은 신심이죠.
그래서 두 가지 수행법이 있어, 참선에는.
신심으로 들어가면 묵조선이 돼요.
신심은 내가 본래의식이라는 거를
내가 확인을 못했어도
내가 본래 의식이라는 걸 믿고
본래 의식이라는 걸 믿은 상태에서 딱 앉으면
앉는 동안 내가 부처가 된다.
10분 앉으면 10분 부처
1시간 앉으면 1시간 부처
믿음 때문에.
그래서 쭉 들어가면, 익어지면
확인이 되는 거예요, 자동적으로.
“의식이네” 하고 그 믿음이 완성되는 거
이게 묵조선의 방법론이에요.
근데 간화선은 뭐냐 하면
간화선은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이잖아요.
간화선은 의심으로 간 거예요.
“너가 못 믿고 의심하니까 끝까지 의심해 봐라, 그러면
의심으로 승부를 봐라”.
이게 간화선이에요.
그러니까 뭐냐?
답해라 답해라.
지금 뭐냐? 하고 의심을 걸어서
그 의심이 의정이 되고
의정이라는 말은 감정이에요.
의심이 감정화 되고
그리고 의단, 완전히 덩어리가 되어서 터지는 게
그게 간화선의 방법론이에요.
그 두 가지 길이 있어요.
둘 다 사람에 따라 기질에 따라만 다를 뿐
둘 다 유용한 방법이에요.
끝내는 뭐냐 하면
이 의식을 확인하는 작업이에요.
근데 그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지금 그 의심을 잠재우는 방법이
팩트다 이거예요.
팩트 앞에서 의심할 수 있어요?
없죠.
팩트가 뭐냐 하면
한순간도 의식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지금도, 과거는 두고
지금도 의식이라는 거예요.
모든 것이.
못 깨달은 사람한테는 이런 말을 못하지만
의식을 본 사람한테는 팩트가 뭐냐고 물어볼 수가 있다.
그럼 스승이 제자한테
“너가 지금 의식을 깨달았다면, 의식을 한번 봤다면, 진정으로 의식을 봤다면
팩트가 뭐냐?
너가 본 거냐?”
아무개가 이 순간 의식을 본다 할 때
본다의 주어가
여러분 본다의 주어가 아무개예요? 아니면 의식이에요?
이거 따라오셔야 돼.
지금 중요한 부분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저를 보시죠.
그 본다의 주어가 여러분이에요? 아니면 의식이에요?
이거 확실하게 해야 돼.
이게 지금 팩트다, 이거예요.
팩트 앞에서 의심이 무너진다.
의심이 무너지면 법안이에요.
내가 하는 에브리싱의 모든 동작의 주어는 의식이다.
요거 하나가 완전히 딱 떨어진다면
돈수다 이거예요.
지금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나는 지금 의식이 뭔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손을 못 들겠습니다.
의식이라고 확실하게 말 못 하겠습니다” 하는 그게 의식이다, 이거예요.
그게 의식이라는 증거다, 이거예요.
모른다고 하려면
의식이 있어야 되고
안다고 하려해도 의식이 있어야 되고
뭐든지 의식이 있어야만이 가능하다, 이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없었던 적이 있었느냐 이거지, 우리한테.
그리고 확인하는 것은 이 순간에 하는 거예요.
의식이 모든 것의 주어입니다, 맞아요?
그러니까 하는 이거라고.
이 순간에 사는 것이 아무개가 살아요? 아니면 생명이 살아요?
그 생명이 의식이다, 이거예요.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할 때
예수님이 나라고 하는 것은 의식이다, 이거예요.
의식은 길이요, 도요, 진리요, 생명이다.
근데 그것이 지금 나를 살고 있다, 이해돼요?
단 1초도 이 생명 의식이
지금 나한테서 작동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이게 지금 팩트다.
팩트 앞에서 모든 의심이 굴복한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한테 돈수의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정말 팩트에서 끝이 나는 거지.
내가 이걸 확인하려고 하면
모든 것은 여러분
확인되는 것은 본질이에요? 현상이에요?
대상으로 잡히는 것은 본질이에요, 현상이에요.
그럼 지금 솔직히 이야기해 보세요.
지금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현장에서 확인하려는 거예요? 아니면 본질에서 확인하려는 거예요?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의식이다, 이거예요.
이해돼요?
확인하려고 하는 그 주체가 의식이다, 이거예요.
내가, 아무개가 의식하고 하나가 되는 건 불가능해요.
대부분이 혜안을 뜨고, 법안을 뜰 때
계합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아무개가 노력해서 의식이 되려고 노력을 해요.
안 돼요, 불가능해요.
그게 아니라 그냥 전도몽상의 입장이
그냥 딱 바뀌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내가 노력해서 의식이 되는 게 아니라
의식과 하나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의식만이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경험하고 있다.
이 팩트에 완전히 내가 엎어진다.
팩트 앞에서 내가 완전히 그냥 엎어질 때
그때 법안이, 그때가 계합이다, 이거에요.
“나의 모든 것이 의식이 하는 것이다.”
거기에 에고가 끼어들 틈이
에고라고 하는 착각일 뿐이다.
에고는 착각일 뿐이다.
실제로는 모든 것이 의식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게임이 끝장나는 거예요.
에고는 착각일 뿐이다.
에고가 의식하고 하나 되는 게 아니고
에고 자체가 착각일 뿐이다.
무아에요, 그냥.
그 무아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게
모든 것이 의식이 하는 것이 분명할 때
나는 나라고 하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거기서 그냥 끝장이 나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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