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문득 생각이 잦아들고
그냥 평범하게 깨어 있던 그런 시절이 돌아보면
인생에서 문득문득 있었어요.
모든 사람이 있어요.
그럴 때 생각은 잦아들었고, 깨어는 있고, 할 때
자기를 돌아보면
깨어 있는 그 평범한 의식.
생각이 없어도
생각이 없으면 의식도 없는 건 아니죠.
이해는 되잖아요.
생각이 없어도 의식은 그냥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 같으면
하여튼 그런 구절구절들이 이렇게 떠올라요.
문득 툇마루 앉아서 마당을 보고 있는데
소나기가 갑자기 내리면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그 냄새
혹시 옛날 분들 기억나세요?
그 냄새 있잖아요.
그 냄새 맡고, 튀어오르는 그 광경을 물끄럼이 보고 있을 때
그럴 때 그 냄새를 통해서
자기가 깨어 있다는 자각은 분명한데
생각은 없는 상태.
예를 들면 그런 상태.
저는 바닷가 살아서 지금 돌아보니까
고등학교 때 뭔가 울적할 때는 친구들이랑 하굣길에
바닷가 가서
저희 고등학교하고 해운대하고 그렇게 멀지 않았어요.
그래서 해운대 백사장 가서 친구끼리 가방 옆에 놓고 앉아 있으면
뭔가가 잦아들면서
백사장 해안선 따라, 수평선 따라, 마음이 확 열려서
뭔가 모르는데 그때 그런 생각을 했죠.
“바다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 생각을 했었죠.
지금 서울 살지만, 그런 적이 있었다 이거예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냥 자기의 의식을 깨닫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의식이 있습니까?
그냥 이런 말 듣고, 그냥 빨리 알아채는 거예요.
그냥 앞에 군더더기 형용사 붙이지 말고
그냥 의식.
의식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지금도 의식 있잖아요.
그게 우리의 본질이에요.
생각이 있건 없건
그 깨어 있는 의식은 변함이 없다.
항상 바탕으로 항상 존재하고 있다.
생각이 있건 없건
우리들의 의식은 바탕으로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근데 그 의식을 한번 알아채는 것은
법문을 듣다가 궁금해하다가 법문 듣거나 청소하거나 산책하거나 뭐 하다가
문득 “이걸 말하는 거네” 하고 알아챈다, 이거예요.
깨달음은 의식을 깨닫는 건데
그 깨달음이 완성되려면 의식이 분명해져야 돼요.
‘의식이 분명해져야 된다’ 이 말의 말뜻을 지금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지금 혜명이 깨달았지만
다시 “다른 비밀한 뜻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본 것은
아직 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보세요.
깨달음은 의식을 깨닫는 거예요.
그러면 의식을 깨달으면
가장 핵심 포인트, 길게 말할 것도 없어.
의식을 깨달으면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의식을 깨닫건 못 깨닫건 상관없이
매순간순간 실제로 살았던 것은 의식이 살았네.
이렇게 되어야 확실히 의식을 깨달은 거지.
따라오십니까?
못 따라오는 분들 이해해요. 다시 또 말씀드릴게요.
보세요. 어떤 차이점이 있다 이거야? 차이점이.
깨닫기 전에는 혜명으로 살았잖아요, 이분이.
혜명으로 살다가
육조 스님의 지시를 직지인심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그 말
생각하지 않을 때의 당신 상태
생각하지 않을 때 당신 정신 상태
여러분,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의 상태는
그냥 형용사가 없는 순수의식이에요.
이게 우리의 본질이에요.
그리고 이걸 한 번 깨달으면
의식을 확실히 깨달았다는 말은
곧 무슨 말하고 연결되느냐 하면
이 의식은 깨달은 그 순간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의식은 처음부터 언제나 있어 왔다는 거
앞으로도 언제나 있을 거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돼요.
맞죠?
그러면 보세요.
자기가 자기의 입장이 문제예요.
입장
예전에 제가 알던 출판사에서 입장 시리즈, 그게 있었거든요.
입장(立場)_서 있는 장소,
입장이 돼지 눈에서 부처 눈으로 바뀌어야지 깨달음이에요.
그러면 돼지 눈은 뭐냐 하면
돼지 눈은 자기가 “돼지다” 하면
돼지 눈이야
부처 눈은 뭐냐?
자기가 “부처다” 하면 부처 눈이에요.
여러분한테 물어볼게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돼지예요? 여러분이 부처예요?
돼지 대신에 중생이라고 말 써봅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중생이에요? 여러분이 부처예요?
그러니까 요 말에 ‘부처입니다’라고 말하기가 쉽지는 않죠.
조금 그렇잖아요.
네 그러니까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고 하는 말이 좋아요.
이럴 때는.
그러면 봅시다.
여러분 우리가 중생이에요? 우리가 부처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중생입니다.”
이러면 돼지 눈이고
“우리가 부처입니다” 하면 부처 눈이에요.
의식을 깨닫는다는 말, 음미해 보세요.
의식을 깨달으면 내가 의식이 되잖아요.
그리고 그 의식은 예전부터 의식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의식을 깨닫는다는 말은
내가 아무개, 여기여기 같은 혜명
“내가 혜명이 아니었구나, 혜명이라는 거는 착각이었구나”
하고 연결되어야 한다, 이 말이에요.
“의식을 깨닫는다”는 말은 다만 단순하게
“아, 이게 지금 깨어 있는 이게 의식이구나” 하는
그거 가지고는 택도 없고, 너무 약하고
시작은 그렇게 되지만, 한 걸음 더 나가서
“아, 지금 깨어 있는 이건데
근데 깨어 있는 이것이
지금만 이게 아니라 언제나 이것으로서 살았구나. 내가”
따라오십니까?
“언제나 내가 의식으로서 살아왔구나
그동안에 아무개로서 살았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구나.
실제로는 나는 의식으로서 살아왔고
지금도 의식이고
앞으로도 의식으로 살아가 가는구나” 하고 전환이 되는 것이
돼지 눈에서 부처 눈으로 전환이 된다.
이 말이에요.
의식이 진짜 나고
나는 평생을 의식으로서 살아왔다는 것이
자기가 확인이 되면
소위 말하는 이게 ‘대오’다, 이거예요.
대오가 되면 많은 변화가 일어나요.
첫째, 자기가 의식이 자기일 때는 크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크기 없지요, 모양 없지요.
의식은 생겼다가 사라지는 법이 있나요? 없나요?
없지요.
그러면 생사가 의식한테는 있을까요? 없을까요?
변화도 없지, 생사도 없지.
자 의식한테 공간의 제약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시간의 제약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인간의 제약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잖아요, 얼마나 어마어마해요.
좀 신비롭지 않나요?
의식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여러분 ..신비로워요.
우리한테 의식이 있다는 이 사실이
이 의식은 시공간의 제약도 안 받지, 모양도 없지
그러나 없는 건 또 아니지
되게 신비로워요.
그러면 의식의 입장에서 보세요.
의식의 입장에서 이 세계 현상이라고 하는 세계를 보면
의식의 입장에서 보는 이 세계는
찰나찰나 변화해 가죠.
맞아요?
그러니까 의식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보면
이 세계는 현상인데
현상은 찰나찰나 변해서
제행이 무상하다는 말이 실감이 나기 시작을 한다.
제행이 무상하다.
그리고 이 현상에 나타나는 모든 에브리싱
이걸 제법이라고 그래.
제법이라는 말은 에브리싱
제법_ 에브리싱
현상에 나타난 에브리싱은
인연 따라 나타났다가 인연이 닿으면 사라지니까
영구불변한 어떤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고유한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
어떤 것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제법이 무아라고 하는 말이
이거 부처님의 말인데
이 말이 맞네.
그러면 지금 제행무상 제법무아하고 하는 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입장은
입장은 현상 안에 있어요?
아니면 본질이 있는 의식의 입장이에요?
의식의 입장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입장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이거예요.
혜명이 깨달아도 아직도 혜명의 입장에 있으니까
“이것 말고 뭔가 좀 특별한 뭐 다른 것은 없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이거예요.
그런데 아직까지 깨달음이, 확철대오가 아니다, 이거예요.
확철대오라는 거는 의식의 입장이 되는 거다. 이거예요.
‘의식의 입장이 되는 거다’
이 말은 사실상 알고 보면 어렵지 않은 게
우리가 정확하게 의식을 한번 느껴보면
여러분, 태어나서 지금까지 매 순간순간 움직이면서 살았는데
모든 그 움직임의 주어가 의식이었다, 이거예요.
제 말 틀렸나요?
여러분이 평생 살아오셨는데
그 순간순간 모든 동작의 주어가
여러분 아무개가 움직였어요? 의식이 움직였어요?
의식이 움직였잖아요.
실제로는 아무개가 산 게 아니고
의식이 살아온 거잖아요.
그럼, 지금도 아무개가 사는 게 아니고 의식이 사는 거예요.
이거는 상당히 큰 뜻이 있어요.
아무개가 한다고 생각하면 일체개고예요.
그 아무개는 모든 사람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어요.
그리고 심지어 아무개는 자기가 자기 마음에 안 들어
자기하고도 갈등하고 있어요.
이해돼요?
근데 의식 입장에서는
여러분 의식 입장에서는 일단 크기가 없잖아요.
모든 것이 자기 품에 있지 않나요?
이해되세요?
어떤 의미로는 정말 의식의 입장이 되면
모든 사람이 나와 갈등 관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귀여워 죽겠는 나의 분신이
너무 사랑스러운 나의 분신이 되는 거죠.
의식의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한 인간이 입장을
돼지 입장에서 부처 입장으로
의식을 부처라고 해요.
붓다라고 하는 말 자체가, 의식이라는 뜻이에요.
딱 한마디로 말해서
인도 말에 붓다라고 하는 말 자체가
깨어 있는 것
여러분, 깨어 있는 것이 뭐가 깨어 있는 거예요?
우리한테 인간한테 깨어 있는 것이 뭐예요?
의식이잖아요.
그러니까 부처라는 말 자체가 의식이라는 뜻이에요, 말 자체가.
그러니까 ‘의식의 입장으로 선다.’ 이 말은
사실은 돼지 입장에서 부처 입장으로
내가 입장이 바뀐다는 뜻이에요.
‘입장총서’라고 하는 그 출판사에서 시리즈를 낼 때
왜 그런 말을 썼느냐 하면
모든 철학자가 철학책을 쓰잖아요.
그 철학서는 그 철학자가 서 있는 입장에서 쓴 거다 이거예요.
이해되나요?
모든 인간은 자기 입장에서 살아간다 이거예요.
그럼 우리가 지금 나의 입장이
아무개의 입장에서 살아가면 ‘일체개고’를 벗어나기가 어려워요.
근데 의식의 입장에서 살아가면 ‘열반적정’이 돼요.
왜냐하면 의식의 입장에서는
이 현상계가 자기는 안 변하는데
현상계는 계속 변해가기 때문에 실체라고 할 수가 없어서
마치 환영처럼 느껴져요.
의식의 입장에서는
안 변하는 의식의 입장에서는
이 변하는 이 세계가, 이 현상계가
환영처럼 느껴져, 영화처럼 느껴져요.
자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이고
이 세계에는 영화가 지금 이렇게 펼쳐지고 있고
그 영화 속에 이 몸도 들어가 있는 거죠.
의식의 입장, 정견은
정견이 무엇인가?
의식의 입장이 정견이다, 이거예요.
그럼 이런 질문이
여러분, 의식의 입장이라면 의식을 깨닫고요.
“아, 이게 의식이구나” 하는 걸 깨닫고
그다음에 “나는 혜명이 아니라 의식이 나구나
지금까지 나의 몇십년 인생을 실제로 살은 것은 의식이 살았구나”
앞으로도 “나는 의식이구나” 하면
의식의 입장이라면 이런 말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그러니까 혜명의 입장이니까
의식을 보고
“이거 말고 좀 더 뭔가가 좀 비밀한 뭐가 없습니까?”라고 질문이 나왔다, 이거예요.
근데 정말로 깨달음이 확철대오라면
이런 질문은 안 나오고
의식을 가지고...
보세요. 중요해요.
여러분 아무개로서 살아왔잖아요.
아무개로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말은 아무개로서의 인생관이 있다.
맞아요? 틀려요?
아무개로서의 세계관이 있다.
맞아요?
아무개로서의 인간관이 있다.
이 모든 관이 세계관, 인생관, 정치관, 무슨관
무슨 관들이 누구의 입장이에요?
아무개의 입장이잖아요.
그게 무명이다, 이거예요.
그게 꿈이다, 이거예요.
그 무슨무슨관, 그게 꿈이다 이거예요.
아무개의 세계관이 꿈이다, 이거예요.
근데 그 사람은 철석같이 그것을 믿고 살고 있어
그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어.
맞아요?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요, 그죠?
그럼 이걸 바로 잡는다는 말은
아무개의 세계관을 의식의 세계관으로 바로잡는 거죠.
맞아요?
그러면 여러분, 우리 마음공부의 내용은 뭐예요?
아무개의 세계관, 인생관, 연예관, 결혼관, 무슨 온갖 관들이 있잖아요.
그것을 의식의 세계관, 인생관으로 바꾸는 것이 진정한 마음공부다.
그러면 이 사고방식을 바꿔 가는 게 중요하다. 이거예요.
단순하게 의식을 본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거는 시작에 불과하고
그것이 완성되는 모습은 이 관점이 바뀌어 나가는 것이다.
이해돼요?
예, 그거를 그 하여튼
석가모니라고 하는 정말 위대한 깨달은 분은
딱 초전법륜에서
“아무개가 나다” 그게 무명이다 이거예요.
그것이 정전으로 바로 잡히면
“의식이 나다” 이거예요.
그리고 ‘의식이 나다’ 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의식이 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이게 팩트라는 사실
나한테만 팩트가 아니라 모든 인간한테서 이것이 팩트라는 사실을
내가 한번 딱 이렇게 한번
이때나 한번
깨닫는다는 말을 써야 돼.
한번 깨닫는다 이거예요.
그러면 보세요.
“내가 의식이 나다.” 의식의 입장에서 딱 서면
진짜 공부는, 우리 마음공부는, 혹은 수행은
그 의식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바꿔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제일 먼저 바꿀게, 뭘 바꿔야 되느냐?
생각을 바꿔야 돼.
보세요.
정견이 서면 ‘내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확립되면
그다음에 해야 될 일이
나한테서 일어나고 있는 생각이
정사유_ 바른 생각으로 바꿔야 돼.
그러면 어떤 식으로 바꾸는가?
내한테서 일어나고 있는 생각이
여러분, 모든 생각은 문장이에요.
맞아요?
모든 생각은 문장이에요.
그 문장의 주어를 ‘나’에서 ‘의식’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러면 정견을 한 사람이라면
정견이라 하는 것은
모든 주어가 본성이 주어라는 것을 확립한 사람이 정견이죠.
정견의 내용은 참 좋네요.
정견의 내용이 뭐냐?
나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동사의 주어는
본성인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확립된 것이
바른 견해, 정견이다, 이거예요.
보세요.
문제의 해결은
내가 갈고닦고 아무개가 갈고닦고 성숙해져서
어떤 그런 깊은 슬픔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봤더니
“아무개가 나가 아니고,
처음부터 그건 착각이고, 아무개는 착각이고
처음부터 의식이구나.
근데 의식한테는 기쁨 슬픔이 없구나.
질문 자체가 지금 틀렸구나” 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이다, 이거예요.
그럼 여러분께서 만약에 이런 방금 제가 한 것을
여러분이 좀 진지하게 받아들이신다면
여러분한테서 일어나고 있는
“나는 지금 이것이 문제야”라고 하는 그 생각, 생각 있죠? 없어요?
있지요.
그 생각의 주어를 보라 이거예요.
주어를 보면 틀림없이 “나는”이라고 할 거야.
그때 그 나는이 아무개냐? 의식이냐?고 할 때
아무개다 이거예요.
그러면 “나는 이런 문제가 있어” 하는 것 자체가 틀렸다, 착각이다.
그 자체가 틀렸다.
그걸 착각을 어떻게 해결해야
여러분 착각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착각의 답이 나와서 해결될까요?
아니면 그 착각이 착각인 줄 알아서 이게 해결될까요?
어떻게 해결될까요?
착각이 착각이라는 걸 알면 저절로 해결이 되잖아요.
지금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는 게 깨달음의 세계예요.
그게 이 선이라고 하는 이 세계예요.
그러니까 [정견]이 되면
그다음에 진짜 공부가 [정사유]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각의 주어를 살펴서
그 주어가 ‘나’가 된 모든 문장은 착각인 거죠.
맞아요?
그걸 바로잡는 게 수행이다. 이해되세요?
진짜 정사유를 한다 이거예요.
생각을 바로잡는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각을 바로잡는다.
정견을 세우면
그다음에는 생각을 바로 잡는다.
이해되나요?
이것을 실제로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어떤 멋진 복잡다단한 이론을 공부할 게 아니라
지금도 자기는 의식이잖아요.
의식의 입장에서 딱 앉아서
안에서 생각은 일어나,
그럼, 그 생각을 가지고
“나는 기쁨 슬픔이 있다”라는 문장이 성립하는가를 따져봐.
그러면 “아, 이거는 주어가 지금 아무개니까, 나는이니까
이 자체가 지금 문장 자체가 틀렸구나” 하고
그런 모든 생각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바로잡아 나가는 것
그게 정사유다, 이해돼요?
그래서 실제로 하면
자기 생각이 바로잡아져 간다, 이거예요.
그럼 결국에는 어떻게 될까요?
나는 의식이고
의식한테는 모든 현상은 꿈이고, 꿈과 같고
의식한테는 모든 현상은 꿈과 같고
그리고 꿈을 꿈으로 본다면
여기에 내가 집착하고 욕망을 일으키고 있는 모든 것이
지금 헛된 꿈에 일으키고 있는 이 욕망이라는 것도 바로잡혀지고
그러니까 지금 [정사유] 하나 하기가
이거는 굉장히 저는, 이런 대목에서 약간의 희열이 있어요.
어떤 기쁨이 있어요.
어떤 기쁨인가? 왜냐하면 어떤 기쁨이 있냐 하면
여러분 정사유 수행은
이거는 굉장히 리얼리티라는 거예요.
리얼하다는 거예요.
뜬구름 잡는 수행이 아니고
정말로 의식의 입장에서
근데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습관적인 생각을 보면
그것들이 바로 바른 문장들이 아니라는 거죠.
그거를 바른 문장으로 잡아나가는 것.
그걸 실제로 하게 되면
이거는 굉장히 현실적인, 구체적인 그런 수행이라서
기쁨이 여기서 나옵니다.
생각 다음에는 뭐예요?
[말]이에요. [정어]
저는 하여튼 석가모니라고 하는 분이
너무나 구체적인 실질적인 분이다.
[눈]이 바로 [정견] 눈이에요.
눈이 바로잡아지면 [생각]을 바로잡아야 돼.
그냥 “눈 이게 의식이구나” 하고 끝난 게 아니라
우리한테 길을 제시하기를
“의식이라는 거를 깨달았으면
그다음에는 실질적으로 생각을 바로잡아라.”
여러분, 안 그래요?
이건 굉장히 구체적인 자기의 변화예요.
생각을 바로잡아 가면
저절로 생각다음에는 [정어]_ 말을 바로잡는다, 이해돼요?
생각이 말로 나오잖아요.
그리고 말은 다음에 또 뭐로 나오느냐?
[정업], 행동으로 나오는 거예요.
정견- 정사유- 이게 지금 순서대로 돼 있어.
실제로 일어나는 순서.
정견, 눈이 바로 잡히면
정사유, 생각이 바로 잡히고
정어, 말이 바로 잡히고,
정업, 행동이 바로 잡히고,
[정명], 명은 생활이에요.
행동이 바로 잡히면
행동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생활이 바로 잡히고
순서가 맞지 않나요?
생활이 바로 잡히면 [정념]
이때 념(念)은 보세요
념은 마음이 지금 ‘금(今)’자죠.
마음이 지금에 오는 것.
의식이 의식을 스스로 자각하는 곳, 이게 념이에요.
[정념], 그러니까 마음이 현재에 와 있는 것.
현재 깨어있기가 지속되는 것이 [정정진]
정진, 수행이잖아요.
정진이 바로 잡힌다. 바른 정진이 일어난다.
이거를 부처님은 [팔정도]라고 불렀어.
8가지 바른길
정말로 인간을 성숙시켜서
인간을 인간답게 바꾸는
정말로 그냥 임시적인 어떤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인간교육의 길이 팔정도예요.
그것이 정견
자기가 누구인지 바로 보는 것
자기가 의식임을 확립하는 것
그러면 거기에 따라서 자기 생각을 바꿔 가야지 변하지
정견만 가지고
생각은 그냥 계속 옛날처럼 해버리고 이러면 아무 소용 없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까 실제로 자기 생각을 점검해서
일어나고 있는 생각의 주어를 따져보고
여전히 아무개가 한다고 할 거예요.
한동안 그럴 거예요. 그죠?
그래서 나는 우울하다, 나는 슬프다, 나는 불행하다
온갖 이런 자책을 할 거라고요.
또 나는 무슨 상처가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마음에 안 든다
온갖 이런 것들이 있을 거예요.
그것이 다 착각이다, 틀렸다, 망상이다.
그리고 주어를 의식으로 놓으면
여러분 의식은 ‘나는 우울하다’ 안 하죠?
의식은 뭐라고 하느냐면
의식은 별일 없다, 의식은 그냥 무사다, 무사태평이다, 그냥 별일이 없다.
그리고 이 사람이 와도
“어 맞다” 그러고
의식한테는 다 자기니까
저 사람이 와서 말을 해도 “너도 맞다” 그러고
“다 맞다” 할 거다 이거예요.
정말 의식 입장에서 생각을 잡아 들어가고
말을 바로하고
행동을 바로 하고
생활을 바로 하고
그리고 현재 깨어 있기를 자동적으로 바로하게 되고
그러면 그거야말로 현재 끼어있기가 쭉 이어지는
바른 정진이 쭉 되어서
결국에는 마지막이 [정정]이에요.
우리가 그토록 활구참선을 계속해 왔는데
그 활구참선의 첫 모습이 팔정도의 마지막 모습이에요.
바른 선정,
바른 선정이라는 건 뭐예요?
완전히 의식이 의식으로서 깨어 있는 거예요.
구체적인 인간 변화는
첫 번째 눈을 바로 뜨기
눈을 바로 뜨기는
내가 누구인가예요.
아무개가 아니고, 현상의 아무개가 아니고
이 모든 현상을 포용하고 있는
불생불멸의
반야심경처럼 말하면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고_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부증불감_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이 의식
이 의식이 나라고 하는 이 주체성이
의식의 주체성이 딱 확립되는 게 정견
그리고 그 정견에서 정견의 빛이 확 깨어 있으면
일어나는 생각,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생각들
그 생각을 바로잡아 나가면
여러분, 재고 조사가 돼요.
재고 조사는 어떻게 하는가?
자기 생각을 보면 돼.
자기 무의식에 어떤 재고가 쌓여 있는가?
무의식의 정화 안 된 부분들이 깔려 있어.
그걸 알려면 자기 생각을 보면 돼요.
그 생각이 무의식의 상태를 알려주고 있어요.
근데 그걸 바로잡아 나가면
무의식이 정화된다 이거예요.
당연히 그렇겠죠.
그렇게 해서 생각을 바로잡아 나간다.
그러면 어느새 말이, 왜곡된 말이 나오는 게 아니라
다시 말하면
아무개가 주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의식이 주로서 하는 말
부처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 되겠네요.
그 주어가 뭔지 재밌겠네요. 그죠?
이렇게 공부가 구체적으로 보인다 이거예요.
그 한 사람이 말을 할 때
그 사람 말의 주어가 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입장이 나오잖아요.
그 입장을 알면
돼지 눈인지, 부처 눈인가를 금방 알아낸다 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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