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지안스님_선가귀감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2회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어나다 (42:24)

Buddhastudy 2011. 12. 11. 23:35

  방송 보기: 불교TV

특히 선은 심층종교, 선은 종교라고도 할 수 없는데. 현대 종교학자들이 쓰는 말을 가지고 연관 지어 생각해 볼 때는 심층이에요. 심층이라는 거는 그 근본을 바로 알아야 되는 거에요. 근본을 바로. 단순한 어떤 신앙심을 그렇게 진리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마음스스로 그렇다 여기고 믿는 이런 종교를 표층종교라 이럽니다. 심층종교라는건 그게 아니에요. 사실대로 알아야 되는 거에요. 사실대로. 종교도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방편설이에요. 아까 부처님께서 있다고 가르쳐 줄때도 있고 없다고 가르쳐 줄 때도 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쳐줄 때도 있다. 이렇게 말씀 드렸잖아요. 그게 전부 상황에 따라서 말을 달리하는 방편설이에요.

그래서 불교는 방편설에 속으면 안된다는 거에요. 선에서 특지. 방편설에 속으면 안 된다. 이래서 여기 보면은 虛空藏經허공장공이라는 경 얘기를 두고 허공장경에 설해져있는 말이 마군의 말이다. 이런 말이 있어요. 허공장경에 어떤 구절이 있느냐 하면은 문자도 마구니하는 짓이오, 마의 업이요. 이래요. 글자로 뭐 설명하는 거 문자. 이름과 모양도 마의 업이요. 이름을 붙이고 모양이 어떻다 이렇게 하는 것도 마구니 하는 짓이다. 이 말이오. 이게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볼 때, 정법이 아니라는 얘기요. 그러니까 경전의 말씀이 부처님말씀인데, 부처님 말씀마저도 그게 마구니하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다는 거에요.

이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선은 어떤 면에서 순수한 이성이에요. 그리고 사실을 가장 심층적으로 바로 알아야 되는 거요.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겁니다. 부처님말씀마저 마의 업이다. 이렇게 하는 말이 있다. 본분을 바로 들 때는 한 물건, 그걸 가지고 말할 때는 부처와 조사도 소용이 없다. 이거에요.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이런 뜻에서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어났다.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불교는 무엇보다도 법을 아는 종교에요. 불교는 법을 바로 아는 종교입니다. 법을 알아야 되요. 불교에서는 맹신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믿기만 해선 안 돼요. 믿음과 동시에 바르게 알아야 되고, 빠르게 알면은 그대로 실천을 해야 되고, 실천을 해서 또 체험을 해야 되고. 이걸 信慧行淨신혜행정. 네 가지 수행과정이라고 말합니다.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체험하는 것.

그런데 법이 뭐냐? 법. 우리가 이 법을 진리,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참된 이치. 진리. 그리고 불교도 원래는 범어. 인도 말을 가지고 말하면은 불법이 더 적합한 말이에요. 통상적으로 종교를 뜻하는 그런 뜻에서 불교 (가르칠 교)자를 쓰는데, 원래는 붓다 다르마. 번역을 하면 불법입니다. 부처님 법. 깨달은 법. 부처가 깨달았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법, 이게 뭐가 법이냐? 이 말이오. 법이. 대승불교에서는 법이 다른게 아니고 중생의 마음이다. 이래요. 내 마음이 법이라는 거에요. 법. 마음밖에 법이 없다. 화엄경 경문에 나오는 구문입니다. 마음밖에 법이 없어. 법이라는 것이 전부 마음이다. 대승기신론은 대승불교의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책인데, 이 대승기신론에도 법을 중생의 마음이다. 이렇게 말해놓습니다. 법.

법구경의 첫 구절도 心爲法本심위법본이라는 말입니다. 한영으로 된 법구경을 보면은 첫구절이 마음이 법의 근본이다. 만법의 근본이 마음이다. 그래서 법, 이게 사람마음을 두고 법이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또 이해를 하셔야 돼요. 다음에 나오는 말은 이 법과 사람과의 관계를 놓고 말합니다. 법과 사람이라. 법. 불법할 때 법. 우리 삼보에 두 번째가 법이잖아요. 법보. 사찰도 삼대사찰할 때 제가 있는 통도사가 불보사찰이고. 부처님 사리를 모셔놨기 때문에. 해인사를 법보사찰이라고 팔만대장경 모셨지 않습니까? 송광사를 승보사찰이라 합니다. 역대로 국사를 역임한 스님. 16국사가 배출되었어요.

그래서 불법승 삼보 얘기가 있는데, 이 법. 다르마. 불교는 법을 바로 알아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정법을 강조합니다. 정법. 믿는 것도요, 어떤 마음으로 믿느냐? 그 믿는 정신을 중요시 여기는 거에요. 흐리멍텅하게 믿는 거는 그건 뭐 안믿는 거나 비슷한 거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정신이 살아있어야 되. 사람하는 일이 모든게 그렇잖아요. 정신이 살아있어야 돼. 그래서 어떤 마음으로 불교를 믿느냐? 단순히 믿는다 하는 말은 일률적으로 쓰는 말이긴 하지만 그 당사자의 믿음의 정신이 어떤가? 사람마다 다르다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무슨 얘기가 나오느냐? 그러나 법에도 이 말이오. 여러 가지 뜻이 있고, 법도 이렇게 설명하고 저렇게 설명하고, 여러 가지 의미를 두고 설명한다. 이 말입니다.

사람에게도 여러 근기가 있다. 근기란 말은 그 사람의 어떤 능력이라 할까요? 어떤 식견, 또 요새 흔히 학생들 두고 말할 때는 아이큐니, 이큐니 이런 말을 써요. 지능지수가 좀 높은 사람도 있고 낮은 사람도 있고. 신체적인 정신적인 영향이 남보다 좀 뛰어난 사람도 있고 보통인 사람도 있고 보통보다 조금 처진 경우도 있고 이런 차이가 있어요. 이런 걸 근기차이라 그럽니다. 根氣근기차이. (뿌리 근, 기개 기)자를 써요. 根氣근기. 내 능력, 내가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능력. 물론 이건 재주 같은 것도 근기에 해당되지요. 그래서 법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도 근기가 달라서 이런 사람 저럼 사람이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이 한 물건을 좀 여러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있도록, 방편을 써서 가르쳐줘야 되겠다. 설명해 줘야 되겠다. 이 말이오. 이래서 여러 가지 방편을 제시를 한다. 여러 가지 방편이라는 말이 우리 일반적으로 쓰는 방법이나 비슷한 말이에요. 이런 방법도 써보고, 저런 방법도 써보고.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는 것이 무방할 것같다. 이리 말합니다. 법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근기가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방편을 제시한다. 선가귀감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한 물건으로 시작했거든요? 한 물건이 법이에요. 한 물건이 마음이에요. 한 물건이 뒤에 나옵니다만은 부처에요. 법이라는 것은 한 물건을 바로 법이라 한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람마음이 법이다. 이 뜻입니다. 사람이라는 거는 중생이다.

중생. 중생도요 우리가 흔히 중생중생 많이 쓰는 말이지만은 불교는 공부를 하실 때 단어의 의미, 불교에서 많이 쓰는 용어들의 정확한 뜻을 알아두시면 훨씬 불교 이해가 잘 됩니다. 중생, 우리 부처와 상대적으로 쓰는 말이거든요. 중생. 중자는 이게 많다는 뜻이에요. 중, 대중할 때 중자. (무리 중)자 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는 여러 가지다 이런 뜻이에요. 생, 태어났다. 원래 구마라습이 원래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와서 결국 요새말로하면 기이한분이었죠. 진나라 때, 동진 때. 그래서 경전을 많이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구마라습이 번역한 경전을 구역이라 이렇게 말해요. 번역된 게 오래됐다. 이런 뜻이요. 그건 동진 때니까.

당나라 때는 현장법사가 경을 많이 번역했습니다. 역경사상 제일 많이 번역한 분이 현장스님입니다. 손오공, 저팔게, 현장법사. 소설이름이 뭡니까? 수호지라 안합니까? 수호지. 수호지에 나오는 스님이 현장스님이에요. 현장스님은 당나라 때 번역을 해서, 옛날에 그렇게 불렀던 말인데, 현장스님을 신역이라 하고, 구마라습 번역한 것을 구역이라 이렇게 말했어요. 구역에서 중생이라 이래 번역을 했어요. 현장스님은 이걸 있을 유, 정영, 유정이라 번역을 했습니다. 유정. 정식이 있다. 그래서 현장스님 번역한 말하고 구마라습 번역한 말이 조금 다른데. 지금까지도 오히려 중생이란 말이 많이 쓰이고 있어요. 중생.

그래서 중자가 (무리 중, 날 생)자인데. 이걸 설명을 하자면은 많은 인연에 의해서 태어난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어요. 중생이란 말이. 원래 법어의 원어는 사트바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트바. 이걸 중생. 이렇게 번역한 거에요. 반야심경에 보리살타, 살타라는 말 있죠. 살타가 사트바를 소리나는 데로 옮겨 놓은 말이에요. 보시살타 줄여서 보살이라 하는 겁니다. 번역을 하면은 깨달은 중생, 각 유정이라 할 수 있고, 각 중생이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중생이라는 말이 많은 인연에 의해서 태어난다. 이런 뜻이 하나 있고요, 두 번째는 생이 많다는 얘기에요. 생이. 전생, 금생, 내생. 생을 말하면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인데, 이게 계속 이어진다는 거에요. 윤회설에서 이렇게 설명하잖아요.

어제 오늘 내일 하루하루가 계속 이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전생도 있고 금생도 있고 내생도 있고. 전생 앞에 전전생이 있고 내생 다음에 내내생이 있고. 생이 끝없이 되풀이 되니까 생이 많다는 뜻에서 중생이라 합니다. 생이 많다. 오백생, 천생, 이런 말이 있어요. 그 생을 계속 어떤 일을 해 내려왔다. 이렇게 표현할 때 오백생을 뭐했느니.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중생은요, 서로서로 의지해서 공동생활을 해야 살아갈 수 있어요. 혼자는 못살잖아요. 혼자살면은 예를 들면 우리가 사회풍습을 가지고 말하면 결혼을 안 하면 2세를 낳을 수가 없잖아요. 혼자 못살아. 지 혼자 살면은 자녀 못낳는 거지. 그러면 이 지구상의 사람이 전부 결혼안하면 미신은 없어지는 거지. 하기야 없어져도 괜찮을 란지 모르지. 우리는 출가해서 안하니까.

그래서 생활자체가 여럿이 공동생활로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대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 중생이에요. 세 번째 그런 뜻이 있어요. 그래서 중생이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중생에게 근기가 다양하기 때문에 근기에 맞춰서 법을 가르쳐줘야 되겠다는 거에요. 알 수 있도록 해 줘야 되겠다. 이런 말을 이 대목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설명하자면 또 어떤 면이 있느냐? 법. 법에 변하지 않는 뜻과 인연을 따르는 뜻이 있다. 변하지 않는다. 불변. 인연을 따른다. 수연. 이 두 말이 중요한 말이에요. 불법을 설명하는데 이 불변, 수연, 이걸 달리 한자로 말할 때는 한글자로 최용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게 있어요. 변하지 않는 거. 허공자체는 우리가 생각해 볼 때 변하지 않는 거지 않습니까? 또 내가 이렇게 이 몸을 의지해서 살아가는데 생명이 있다면 내 생명이 변합니까? 생명 자체는 안변해요. 마음자체도 안변하는 겁니다. 우리가 마음에 생각이 일어났을 때 망념이 되고, 달리 번뇌가 된다. 이러는데 번뇌나 망념은 변해지지만은 마음자체 이걸 실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안변하는 거에요. 변하지 않는게 있어. 법의 당체는 변하는게 아니에요. 한 물건은 변하는게 아니라 했잖아요. 안 변하는 거에요. 안 변하는 건데. 이게 인연 따라서 변해져요.

수연이라는 말은 인연을 따른다. 이 말은 변해진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에요. 예를 들면 물을 비유해서 말하면은, 물에 비유해서 말하면은. 물이 한강물 흘러가잖아요. 그러나 한파가 오면 얼음이 돼 버려요. 얼어버려요. 물은 액체고 얼음은 고체입니다. 봄이 되면 또 녹을 거에요. 내년 봄에. 또 여름으로는 햇빛을 많이 받고, 온도가 높아지면은 물에서 증발하는 수증기기 있습니다. 수증기가 저 공중으로 올라가 구름도 되고, 비도되는 거에요. 그러면은 물이 기온상태에 따라서 얼어서 얼음이 되기도 하고 증발해서 수증기가 된다. 수증기는 기체 아닙니까? 구름도 되고 이슬도 되고 안개도 되고 눈도 되고 겨울에는. 변하잖아요. 변하지만은 근본 성분은 안변하는 거에요.

물을 학생들이 배울 때는 분자식으로 H는 수소를 뜻합니다. 두 개고. O는 산소를 뜻합니다. 수소분자2개, 산소분자 하나가 결합된 것이 물이다. 이렇게 배워요. 그럼 그거는 변하는거 아니에요. 수분 성질이 변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변하지 않는 면과 변하는 면. 변하는 면이 인연을 따라가는 거에요. 인연. 추워서 얼어지는 게 인연을 따라가는 거에요. 다시 봄이 와서 더워서 녹아지는게 인연을 따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중생의 세계는 현상적인 모습이 인연을 따라가는 수연하는 모습이에요. 인연을 따라가는 모습이오. 불교TV 무상사의 법회 참석한 것도 오늘의 시간에 맞춰서 우리가 여기 이 장소에 온 것이 인연을 따르는 하나의 행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인연을 따라가는. 예. 그런데 이 불변과 수연의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법이 이게 근본에서 볼 때는 영원하고, 무한하고, 진리를 어떤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표현을 해 본다면 영원한 거에요. 시간적으로 시작이 없고 끝이 없는 겁니다. 또 공간적으로 동서남북도 없어요. 무한한 거에요. 어떤 법위의 한정이 없는 겁니다. 그런가하면 또 원만하다. 이렇게 말하고. 원만하다. 그래서 법은 영원한 거에요. 법은 무한한 거에요. 법은 원만한 거에요.

또 부처님 법을 달리 또 형용할 때는 청정한 거에요. 정법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중생의 번뇌망상 경계를 벗어나 있다는 뜻에서. 그럴 때는 깨끗하다. 청정하다. 그래서 법 자체가 어떤 법이냐? 영원한 것이고, 무한한 것이고, 원만한 것이고, 청정한 것이다. 이게 법이다. 이렇게 또 일반적인 말로 바꾸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시간이 다 됐나 봐요. 다음 주에는 자리가 차겠지. 자리가 차야 내가 신나게 법문하지, 이렇게 쪼매와야 내가 법문하겠나? 예. 그래요.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거 오래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