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셨습니까? 목요일마다 여기서 법회를 함께하면서 선가귀감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법회에 나오셔서 법문을 듣고 이러면 법의 재산이 늘어나요. 불교는 법재란 말을 씁니다. 사회적으로 재산이 많은 분이 부자가 되거든요. 재산이 많으면은. 그래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사는 그런 사회가 되자. 이렇게 주장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 경제적인 부, 이것 못지않게 사람이 법의 재산을 갖추어야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 부처님 법이 내 재산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죠. 불법을 독실히 믿는 것도 재산이고, 법문을 들어서 불교교리나 경전, 그 외 여러 가지 법문 내용을 많이 아는 것도 재산. 그래서 용어에 信財신재. (믿을 신, 재물 재) 聞財문재. 많이 들어둔 지식. 이런 용어들이 있습니다.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은 내 자신이 무한히 성숙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내가 비록 가난하고 사회적인 어떤 지위가 높지 못하다 하더라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인간으로 살고 있는 한, 내 자신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이래서 내 인격이 결국 불격과 똑같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은 이 세상에 내 자신에 대한 어떤 열등의식이나 소외감 같은걸 극복할 수 있어요. 그래서 불교는 이걸 가지고 사람을 북돋워 주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이걸 알으켜줍니다. 그래서 이 부처라는 거는 사람의 인격이 최고로 높아진 거에요. 달리 말하면은 인간성이 성숙되면은 부처요, 인간성이 성숙되면은. 그래서 불교는 부처와 사람이 동격이다. 이래서 인본주의란 말을 써요. 인간본위로 가르친다. 이거에요.
서양종교는 신본위로 가르쳐요. 그래서 불교의 이런 특징을 우리가 바로 이해하고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선가귀감은 선불교에 관한 모든 것을 설해놓고 있으며 동시에 대승경전, 대승경전의 내용을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간추려서 설명해줍니다. 그런데 선불교 대승경전에서 가장 강조하는 말이 뭐냐? 마음이 부처다. 이 말이오. 마음이 부처다. 이게 소승불교에서는 이런 말을 안 썼어요. 마음이 부처다. 마음 없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다 사람이 마음가지고 삽니다. 또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정신작용으로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모든 세상 생명체들의 활동이 그 근본마음에서 나오는 거에요.
사람 이외에도 생명체가 많이 있잖아요. 그 생명체가 몸을 움직이고 먹이를 찾고 하는 것도 마음에서 하는 일이에요. 식물들이 자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 보면은 이 법성에서 그렇게 설명하는데. 똑같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마음이 부처다 하는 이 말이 선불교의 대의, 대승경전의 대의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처음 말해왔던 한 물건을 두고 한 물건 이걸, 달리 말할 때 마음이라 하기도 하고, 부처라 하기도 하고,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 34쪽 제4장부터 보아나가겠습니다. 굳이 이런저런 이름을 붙여서 마음, 부처, 혹은 중생이라 하나, 이름이 다르다고 다른 생각을 내어서는 안 된다. 이름이 다르다고 다른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 말이에요.
한 물건, 그 자체는 그것으로 그만 일뿐이오. 그냥 한 물건이 뿐이오. 예. 이 말이 묘한 말이죠. 이 한 물건에 대해서 생각을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생각을 가지고 뭔가 알아보려 하면은 한 물건에서 떠나 버린다. 이거에요. 한 물건 자리를 바로 찾아가지 못하고 엉뚱한 데로 가버린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한 물건을 마음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화엄경에도 경문 속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마음, 부처, 중생이 차별이 없다. 心佛及衆生심불급중생이 是三無差別시삼무차별이라하는 경문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선의 대의, 불교의 근본대의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물건을 두고 구태여 세 가지 이름을 세운 것은 가르치는 형편상 부득이해서다. 사바세계를 音聲敎體음성교체라 이릅니다. 음성교체란 말은 말을 해서 이해시켜가지고 알게한다는 얘기에요. 말이 가르치는 근본 바탕이 된다. 이런 뜻에서 음성교체라 이럽니다.
그러니까 이 사바생에는 말로써 의사소통을 하고, 말로써 서로 자기의사를 전달하며, 뭐 그때그때 어떤 기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이 필요한 거죠. 말이. 그래서 한 물건 이걸 말로써 중생들이 좀 이해하고 알아듣도록 때로는 이렇게도 설명을 하고, 저렇게도 설명해야 되겠다. 이런 뜻에서 한 말입니다. 이름을 지켜 견해를 내지 말라는 것은 선의 입장에서는 말로 하는 것을 금기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의 입장에서 그런 말이에요. 입을 열면 틀린다. 開口卽錯개구즉착. 이런 말이 있어요. 입을 연다는 말은 말을 한다는 얘기요. 말로써 이러쿵저러쿵하면은 근본 진리장태를 어긋나게 된다. 이거에요. 진리를 모르게 된다. 뭐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교의 입장에서는 말을 해서 이해하도록 해야 되지만, 선의 입장에서는 자꾸 말, 말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말로써 설명하려고 자구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는데. 이 구절에 대해서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만났고 타향에서 고행친구를 만났다. 이렇게 또 송을 읊어놓기도 했어요.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만났다. 가뭄이 계속되면 누구나 비 오기를 기다리잖아요. 특히 농촌에서 농사를 지을 때 가뭄이 오래 지속되면은 농사가 망쳐지거든요. 그래서 비를 기다립니다. 그때 오는 비를 단비라 이래요. 또 사람이 객지에 멀리 가 있다가 고향 친구를 만나면은 얼마나 반갑겠어요. 그러니까 逸物일물을 만나는 것, 逸物일물을 아는 것이 그와 같다는 거죠.
불교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자기가 모른다. 이래요. 우리는 흔히 마음속에 있는 어떤 감정의 희로애락. 이런 걸 두고, 또는 심리적인 어떤 자기 정신상태랄까. 이런 걸 두고 말할 때, 내 마음 내가 안다. 이러잖아요. 내 마음 내가 안다. 남은 내 마음을 모른다. 이런 말을 흔히 해요. 그런데 자기 기분을 자기가 그때 느끼고 있는 상황을 안다는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은 내 마음 나도 몰라요. 마음을 알기가 쉽지가 않아요. 예~ 선에서는 견성이 목적인데요. 성품 자리 보는 게 목적이라요. 견성했을 때 내가 내 마음을 안다는 거에요. 자기 정체를 알았다. 확인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걸 또 다른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건데, 내가 나한테 대해서 나는 이렇다. 이렇게 보통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내가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대로 남은 그렇게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이거 알아야 되요. 내가 나에 대해서 나는 이렇다. 내 마음이 이렇다. 나는 내가 알지 나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남은 모른다. 보통 이렇게 말하는데.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이 내가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처럼 남은 그렇게 생각 안 해준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남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는 얘깁니다. 미묘해요. 가족끼리도 마찬가지예요. 부부끼리도 마찬가지예요.
남편이 부인을 생각하는 것과 부인이 스스로 자신을 생각하는 건 다른 겁니다. 마찬가지로 부인이 남편을 생각하는 것과 남편이 스스로 자기를 생각하는 게 다른 법이에요. 그래서 중생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생각이 다른 존재에요. 서로 생각이 달라. 그런데 선의 기본을 선가귀감에 다음 장에서도 얘기 합니다마는 三處傳心삼처전심이라는 말이 있어요. 삼처.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해줬다. 이런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삼처전심. 37쪽인데요. 세 곳에서 마음을 전했다. 세존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은 삼처전심자는 이 선지요. 선의 종기가 되었고. 으뜸가는 뜻. 종기라 합니다.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했다. 이래요. 心印심인을 전했다 하기도 하죠. 마음을 도장에 비유해서 (도장 인)자를 붙여서 心印심인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것은 선이 되었다는 얘기에요.
그다음에 부처님이 일대에 걸쳐서 정각을 이루고 열반에 드실 때까지 요즘은 그 기간을 45년이라 이럽니다. 옛날에는 49년이라고 말해오기도 했는데 그걸 일대 소설이라 합니다. 성도하고 나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설해놓은 말씀이 그게 敎門교문이에요. 교는 부처님 말씀을 수록한 경전을 통해서 불법을 배우는 문을 교문이라 이럽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은 교문이 되었고. 부처님이 세 곳에서 심인을 전해준 것은 선의 종지가 되었다, 이 말씀이에요. 그래서 불교를 선가교로 말하기도 하고, 또는 저번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소승이니 대승이니 이런 구분을 하기도 하고, 또 현교니 밀교니 이런 구분을 하기도 합니다.
현교라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말이 맞게 설명해주는 거. 이걸 현교라 하고. 밀교라는 말은 비밀스럽게 말로써 알아듣도록 자세히 설해주지 않고 진언을 주라 합니다. 다라니. 이걸 수지해서 나름의 깨달음을 얻도록 한다. 이런 주장이 있어요. 방법을 씁니다. 그런 걸 밀교라 해요. 그래서 선, 교, 대승, 소승. 현, 밀, 현교 밀교, 그 외에 여러 가지 구분하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대충 크게 구분할 때는 이런 식으로 구분을 하죠.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선은 부처님 마음, 교는 부처님 말씀. 이것은 선교에 대해서 마치 정의를 내려놓은 말처럼 자주 말해온 말입니다. 이 말이.
삼처전심이 뭐냐?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게 뭐냐? 첫 번째는 다자탑 앞에서 탑이 있었어요. 탑이름이 다자탑이라. 그 탑에 기도를 하고 빌면 아들을 잘 낳는 모양인지. 다자탑, 아들이 많다는 뜻이에요. 그 앞에서 부처님이 제자들하고 같이 있었습니다. 그때 상수제자였던 가섭존자가 뒤늦게 왔어요. 부처님하고 다른 제자들이 다 탑 앞에 모여 있었는데, 뒤에 가섭존자가 그곳에 도착을 했습니다. 와 보니 대중이 다 탑 주위에 둘러앉아 자기가 앉을 자리가 없어. 그럴 때 부처님께서 당신이 앉으셨던 자리를 댕겨가지고 반을 가섭이 앉을 수 있도록 나눠줬다. 이런 뜻이에요. 多子塔前分半座다자탑전분반좌라는 말이.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반으로 나눠줬다. 이 사실이 부처님이 가섭에게 마음, 심인을 전해준 것이다. 이게 선이다. 이게 바로 선의 그 기원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다음에 또 두 번째가 뭐냐? 靈山會相영산회상. 영산은 영축산을 줄여서 영산이라 합니다. 부처님이 직접 머무셨던 인도 가면은 부처님 당시에는 그 지역을 마가다국이라 했습니다. 지명을 라즈기르를 지금도 그렇게 쓰고 있죠. 라즈기르를 하는 곳인데. 거기에 산이 있어요. 기사굴산이라 하는데. 영축산으로 한역을 그렇게 했습니다. 가끔 불자님들이 인도 성지순례를 할 때 그곳에 꼭 들리죠. 가보면 산이 야트막해요. 우리나라 산처럼 이렇게 높아 보이지가 않습니다. 하여튼 그 산을 영축산이라 해요. 거기서 대승경전인 법화경을 설했다. 이럽니다. 대승경전 가운데에 법화경이 영산회상, 영산을 영축산을 무대로 설해진 거로 되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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