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딤 젤란드의 [트랜서핑의 비밀] 함께 하겠습니다.
바딤 젤란드는 구 소련의 양자물리학자였구요.
정보통신 분야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다중우주 이론을 기반으로 현실변환 기법을 설명한 [리얼리티 트랜서핑] 시리즈로
단숨에 러시아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는데요.
유명세를 원하지 않는 탓에
저자의 개인적 신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고 해요.
책에 소개된 개념들이 신비주의 교의들과도 통하는 바가 있어
‘현대의 신비가’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읽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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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곳적부터 사람들은 세상이 이중적인 행태를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해 왔다.
물질 차원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자연과학 법칙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정묘물질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대하면
과학법칙이 더 이상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들을
하나의 지식체계 안에 통합시키기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다.
우주는 마치 인간들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를 싫어하면서 말이다.
과학자들은 그 법칙을 발견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현상을 설명하다 보면
이전의 법칙의 틀로는 해결되지 않는 다른 현상이 벌어져 버린다.
진리는 잡으려 할수록 계속 달아나는 그림자와도 같다.
여기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세상은 단지 자신의 정체를 숨길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씌워주는 가면을 언제든지 뒤집어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한 예로, 미시세계의 실험에서 대상을 입자로 가정하면
그것은 입자인 것으로 확인되지만
그것이 입자가 아니고 전자기적인 파동이라고 가정하면
우주는 거기에 반대하지 않고
기꺼이 그에 일치하는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결과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주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넌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진 거지? 단단한 물질로?”
우주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 맞아.”
“아, 그런데 넌 혹시 에너지로 이루어진 건 아닐까?”
그 질문에도 역시 대답은
“그렇다”일 것이다.
알려진 대로, 진공 속에서는 소립자들이 쉼 없이 탄생과 소멸을 반복한다.
에너지가 물질로 또 물질이 에너지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우주에게 다시 물질과 의식 중 어느 것이 우선인지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
우주는 또 그렇게 음흉하게 가면을 바꿔 쓰고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쪽의 얼굴을 돌려댈 테니까.
수많은 선도적 과학자들이 서로 엇갈리는 관점들을 내세우며 다투고 있지만
현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냉정한 판결을 내린다.
본질적으로 그들 모두가 옳다.
결국 세상은 도망 다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의해 준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거울’처럼 행동한다는 뜻이다.
그 거울에는 우리가 현실에 대해 가정하는 것이 무엇이든
고스란히 그대로 반영된다.
그렇다면 현실의 본질을 밝혀보려는 모든 시도는 헛수고란 말인가?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그에 대해 생각하는 대로 동의해 줄 게 아닌가?
동시에 직접적인 대답은 끊임없이 회피하면서 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것은 이보다 훨씬 더 단순하다.
다면적인 현실의 낱낱의 현상 속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오직 이 사실만 받아들이면 된다.
현실은 거울과 마찬가지로 두 세계를 가지고 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인 면의 세계와
지각의 너머에 있으나 똑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면의 세계가 그것이다.
과학은 거울에 비친 것들을 다루고 있고
비전 체계는 그것을 다른 측면에서 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이 벌이는 모든 논쟁은 바로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다.
도대체 거기, 거울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트랜서핑은 비전 체계의 현자들처럼
이 질문의 대답 중 하나를 제시해 준다.
거울의 저편에는 가능태 공간이 존재한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사건들의 시나리오를 담고 있는 정보체다.
좌표평면 위에 존재할 수 있는 점의 위치 수가 무한하듯이
가능태의 수도 무한하다.
가능태 공간에는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현실세계에서 발생하는 어떤 사건은
많은 가능태들 중 하나가 물질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그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가능태 공간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게 있다는 것이 도무지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우리의 3차원적 지각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모든 곳에 있고 동시에 아무 데도 없다.
아마도 그것은 보이는 세계의 경계 너머에 있겠지만,
당신의 커피 잔 속에 들어 있을지 모른다.
아무튼 그것은 3차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누구나 밤마다
그곳엘 간다는 사실에 역설이 담겨 있다.
꿈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은 ‘환영’이 결코 아니다.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꿈을 환상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꿈이 과거에 일어났거나
미래에 일어날 현실의 사건들을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 세계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광경을
꿈속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럴 경우 그런 광경을
실제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다.
만약 꿈이란 것이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내는, 현실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면
생전 본 적이 없는 이런 광경들은 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인간의 정신 중에서
의식적인 모든 것을 마음과 연결 짓고
잠재의식적인 모든 것을 영혼과 연결 짓는다면
꿈이란 영혼이 가능태 공간 속을 날아다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은 꿈을 상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영혼은 정보장에 직접 접속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모든 ‘시나리오와 무대장치’들이
영화필름의 각 장면들처럼 정적인 상태로 저장되어 있다.
시간이란 단지 이 영화필름이 ‘돌아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마음은 수동적 관찰자의 역할을 하며
‘생각 발생기’와 같은 특성을 지닌다.
기억 능력 또한 가능태 공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두뇌가 사람이 평생 동안 축적하는 모든 정보를
저장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모두를 기억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사실 두뇌는 정보 자체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가능태 공간의 주소와 비슷한 무엇을 담고 있다.
사람은 육체가 죽을 때 그 주소들이 지워지기 때문에
전생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특정한 조건하에서는 그 주소가 복구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마음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단지 낡은 벽돌로써 새로운 형태의 집을 지을 수 있을 뿐이다.
과학적 발견과 예술의 걸작을 위한 모든 재료는
가능태 공간으로부터 영혼을 통해서 마음으로 전해진다.
투시력과 직관적 ‘앎’도 역시 거기에서 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썼다.
“과학의 발견은 논리적 과정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논리적 형태는 그것을 나중에 기술하는 과정에서 입혀지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발견은 언제나 하나의 깨달음이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몰래 귀띔해 주는 것처럼 외부로부터 문득 찾아온다.”
가능태 공간을
일반적으로 알려진 보통의 정보장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 개념의 정보장에서는
데이터가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다른 대상으로 전달될 수 있다.
가능태 공간은 정적인 매트릭스,
즉 우리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천이 되는 구조체다.
정통 과학은 가능태 공간을 설명할 수도 없고
그 존재 여부를 증명할 수도 없다.
고맙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지혜별숲] 이었습니다.
오늘도 고요하시고 평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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