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생각과 느낌으로는
붙잡거나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무심하면
이미 나란 존재 현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은 대상이 될 수 없기에
의식을 주체, 대상, 행위로 나누어 몰아가려는 순간 어긋나고 맙니다.
이것은 지금 이렇게 보고 듣고 느끼며
세상을 비춰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죽은 몸은 이것과 분리되었기에
같은 몸이라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포도가 포도나무에서 분리되면
죽은 것이란 말씀은 이 뜻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선
안이비설신의가 무라고 설하니
그 뜻은
그런 것은 다 분별 속 이름이고
실재는 이것 하나의 작용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자상하게 구구절절 가르쳐 주시건만
우리는 자기 분별 속에 빠져서
끝없이 생각만 일으키며 이름만 따라다닙니다.
이름을 지으면 실제로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관념 생각이 만든 허상일 뿐 실재가 아닙니다.
실재하는 것은 단 하나
살아있는 지금의 나인 생명의식과 그 활동뿐입니다.
그것의 활동 결과에 대해
온갖 이름을 붙이고, 나눠 분별하다 보니
우리는 자기 감각기관과 생각에 속아서
제 꿈속에 헤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실재인 생명의식 그 자체로 깨어나지 못하고
자꾸 분별 속에서 찾으니
꿈에다 망상을 더하는 꼴입니다.
단지 몸과 마음 이전에 먼저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만 골돌히 관하십시오.
이것을 정견한다고 합니다.
죽비나 종을 치면
그 소리가 일어나는 순간
항시 이것이 같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가지고
다시 주체와 객체의 행위를 나눕니다.
그게 다 이름이고
죽은 개념, 생각에 불과함에도
그 행위를 멈추지 못합니다.
이것을 일체 중단하면
이미 죽비 소리 그 자체이며 종소리 그 자체입니다.
여기에 무슨 생각과 느낌이 개입되면
이미 어긋납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 같은 글을 백 번 반복해서 읽으면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
이런 말도 있듯이
죽비(종)을 100번 천 번 치다 보면
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피올라정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올라 정견) 일상에서 깨닫기 #25 - 시장 노파가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 (0) | 2025.02.27 |
---|---|
(피올라 정견) 일상에서 깨닫기 #24 - 몸과 마음을 나라고 여기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일까? (0) | 2025.02.26 |
(피올라 정견) 일상에서 깨닫기 #23 - 깨달음이 어떤 상태, 경지라는 착각을 버려라! (0) | 2025.02.20 |
(피올라 정견) 일상에서 깨닫기 #22 - 소리로 만나는 마음자리 밝히기 (0) | 2025.02.19 |
(피올라 정견) 일상에서 깨닫기 #21 - 알고 모름과 깨달음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0) | 2025.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