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선사는
“깨달으려면
공부하지 않는 공부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공부는
내가 따로 공부하지 않음에도
삶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공부가 되어 가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무위공부라고도 합니다.
마치 영어 회화 공부를
자기가 따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어 문화권에서 살다 보니까
어느덧 문득 영어가 능숙하게 된 걸
스스로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공부법 아니고는 다 자기 에고가 나서서
생각, 감정, 감각, 느낌으로
이건가? 저건가? 헤아리고 붙잡는 유위행에 불과하므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에 자기가 애써서 태어난 분은 없지요.
갓 태어나선 순수한 의식체로만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이란 능력이 생겨서
자기를 인식하게 되니까
있게 된 것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다
생명이란 무위적 섭리와 힘에 의해서 생겨난 현상들입니다.
본질적으로 무위적 존재가 유위 속에서 진리를 찾는다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공부하지 않는 공부는
생명인 O자리가 그 활동 능력인
오온(생각, 감정, 느낌)을 가지고
색성향미촉법이란 정보인식활동을 통해
세상을 체험하고 있다는 걸
항시 미혹됨 없이 철저하게 보고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정견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해서
봐야만 보이는 게 아니고
그냥 저절로 보여짐으로 무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하지 않는 공부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생명 그 자체인 O자리를 알고 난 이후
나와 세상이란 대상들조차도
모두 다 일시적으로 생멸하는
오온이 만들어낸 모습과 정보에 불과함이
항상 보여지고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행주좌와어묵동정이
모두 다 O자리의 활동임이
철저하고 밝게 보여지고
드러나 있는 깨어 있는 삶이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삶 자체(존재방식)이 바로 진짜 공부란 말이지요.
그렇다면 O자리란 무엇이며 어떻게 체험될까요?
오온개공을 철저하게 보다 보니
마침내 내 의식 안에서
나라고 할 게 일차 없는데도
그 없음을 보고 아는 생명 그 자체인 자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함석헌의 스승인 유영모 선생은
[없으므로 계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없음으로써 있는 것
전체성의 신이며
부처로서 대상으론 보이지 않지만
모든 대상을 분별해 있게 하는
[바탕의 생명의식]을 말합니다.
즉 자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본래 있던(없음으로 있는)
생명자리가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며 이런 존재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공부하지 않는 공부입니다.
--정견하기
번뇌망념 속 삶 속에 살아오다가
그런 삶을 버리고
이렇게 거듭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선
반드시 아래와 같은 세 가지를 정견해야 합니다.
정견한다함은
바로 아래 사항들을 늘 [보고 즉각 앎]을 말합니다.
생각으로 이해해서 아는 것은
정견이 아니라 해오로서 정견이 아니며
보고 즉시하는 안목이 법안으로
법안이 철저해지면 불안이 됩니다.
이처럼 즉각 알려면
나와 세상의 본질이 다 생명이자
그 활동에 불과한 것임을 깨쳐야 합니다.
첫째,
뭐든 있다(존재), 없다(비존재)는
다 내 분별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간과하거나 못 보고 지나간 것은
내겐 없는 것(비존재)가 됩니다.
남들은 못 보는데 나만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내게 분명히 있는(존재)가 됩니다.
내 가족이 내게 특별한 것도
다 내 분별이 만들어낸 환상세계입니다.
대체 어떤 자리이길래
있고 없음을 분별을 통해 일체를 다 창조해 낼까요?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없애라고 하는 것도
이미지나 신기루 같은 생각이나
감각정보를 집착해 있다고 분별하는 업습에서
즉각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비친 영상이니
온 세상이 실은 마음 하나뿐인 것이며
자연이 보이는 만물도 본래는 일체 다 평등했습니다.
따라서 일체가 평등해 보여야 합니다.
제 마음속에
누가 더 예쁘고, 누군 밉고, 뭐는 옳고, 뭐는 틀렸다면
다 자기가 만든 분별 세계 속에서 사는 것이니
정견을 못 하고 있기에 아직 멀었습니다.
둘째,
이미 있는그대로 자유하고 완전한데
자기가 법을 세우고 생각으로 정리해서
그것을 더 자세히 알려 하거나 체험하려 하는
추구심을 봐야 합니다.
[있는그대로] 완전하다는 법상을
또 생각으로 만들고 의지한다면
그 역시 자기가 만든 관념 속 분별에 떨어진 것까지도 봐야 합니다.
진짜 있는그대로란
생각에 갇힌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는 생각이전의 이 삶전체요, 모든 것입니다.
즉 철저히 정견함으로써
오직 실상(생명 그자체)과 하나로 있을 뿐
마음속에 일체의 속삭임이나 이해알음알이가 다 사라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있는그대로의 세계는
고요하고 텅 빈 마음 하나가
아무 차별 없이 비추는 세계일 뿐
선악시비가 본래부터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이것을 부처의 세계라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게 따로 있지 않으며
자기 분별이 다 멸진해 사라지면(정견하면)
본래부터 생명은
스스로 이미 그 자리에 있어 왔기에
자연스레 저절로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셋째,
일상속에서 뭘 해도 자연스럽게 인연 따라 한 것일 뿐
누가 했다는 분별 망념이 일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사인(無事人)이란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주 전체가 개체의 삶으로 나타난다고도 표현합니다.
하지만 자기들 생각으로 다시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는 법상에 걸려서
아무 일도 안 하다 보니
무기력증이나 허탈감에 빠지는 분도 많습니다.
이 말은 분별이 없으면
활발발하게 생각, 감정, 감각을 다 쓰고 살지만
매 순간순간 생명으로
충만한 경이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법신(생명)이 활발히 활동하기에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 감각의 능력이
최고도에 달한 인간이란 존재가 우주에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에 스스로 구속되어
자기의 참 본래면목을 잊어버린 채
자기가 만들어 낸 분별망상 속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나와 세상도 다 내 생각과 감각정보(matrix) 속에 존재하는 이미지요
생각 감각 속의 허상이니
정견을 통해 빨리 깨어나야 합니다.
즉 우리들이 만든
정신적 심리적 메트릭스의 허상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게임 중독자가
모든 게임의 본질은
전기력(생명)으로 만들어진 환영 이미지와
그 움직임(O + ->)에 불과했음을 보고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상 세 가지를 철저하게 정견해 나가신다면
삶에 적응하면서
익혀온 모든 분별들이 자연히 떨어져 나가거나 힘을 잃게 되면서
본래의 대자유한 생명의식자리가 문득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모든 온 의식 활동들도
동시에 다 함께
그 생명의식으로서의 진면목을
찬란한 생명의 빛 속에서 보여줄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진리요, 길이며
영원무궁한 생명을 되찾는 소식이니
인생에 이것을 성취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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