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정견

(피올라 정견) 일상에서 깨닫기 #30 -알아차림, 각과 각성

Buddhastudy 2025. 3. 19. 19:41

 

 

모든 경험의 본질은 알아차림,

알아차림이다.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본질은 정보 감각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산다는 것도

본질은 알아차림입니다.

 

어떤 이는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며 실재라고 주장하겠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 감각정보에 살면서

세뇌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현실이자 실재라고 강하게 믿는 모든 정보들은

단 한시도 머물지 않고 자꾸 변하다

종국엔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식(六識)이란

감각과 지능 정보를 가진 하나의 컴퓨터 같습니다.

그렇게 몸이란 하드웨어 안에

또아리를 튼 정보뭉치(소프트웨어)들을

우리는 엄청 소중하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모든 컴퓨터를 정말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죽은 정보가 아니라 살아있는 [전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란 존재 현상에 있어서

살아있는 전기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생명이며

생명은 일종의 [생체전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생체 전기는 본래적으로

모든 정보를 접해

즉각 알아차리는

신비한 능력과 힘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지요.

우리는 살아오면서

단지 의식의 내용물인 주은 정보들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입니다.

 

하지만 모든 정보들이 인식되고 저장되려면

먼저 전기에 해당하는

[생명의식활동]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에 살아있는 활동이 [알아차림]입니다.

 

그래서 깨어나려면

이제부턴 정보가 아닌

알아차림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깨어난다는 것은

늘 이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의 매 순간순간들은

활발발한 생명의 반짝거림으로 충만해집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사실은 알아차림, 그 자체이면서도

자고 죽은 정보에 떨어져

정보 감각만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깨어나지 못한 채

지루한 업습 속에 갇힌 것입니다.

 

 

2) 알아차림과 [()의 본질]

각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대체 각이 뭘까요?

 

각은 깨닫는다는 말이지만

깨달으려면 먼저 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이란 결국 단순히 보면

[뭔가를 앎, 또는 알아차림]입니다.

 

사실 일상속에서도 매일같이 우리는 각()하고 있지 않나요?

우리는 배고픔을 알아차리거나

커피 마시고 싶다는 몸의 욕구를 알아차립니다.

상대의 좋고 나쁜 말을 알아차리며

일이 잘 안 풀리고 있음도 알아차립니다.

슬프거나 화남을 알아차리며

마음이 편하거나 생각으로 복잡함을 압니다.

 

그래서 일상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매 순간순간 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각이야말로

모든 걸 인식하여 있게 하는 삶의 바탕입니다.

각이 없다면

삶은 영이 될 수 없으며

모든 인식 분별 행위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크고 작은

()의 의식 활동 자체로서 살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거나 [우리]란 것조차

()이 없으면 인식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각()이라는 의식의 활동은

매 순간을 인식해 있게 만드는

삶의 기본 토대 같은 것입니다.

 

더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삶 전체가

장대하고 신령스러운 앎(), 하나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각()이라 하면

대단한 걸로 오해하고 있지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의식이 활동하는 모든 행위는

,

다시 말해서 의식의 알아차림인 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식은 모두 생명자리에서 나옵니다.

생명이 없으면 의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과 앎의 본질은

결국 생명인 동시에 그 활동(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이러한 생명의식의 각성(覺性)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깨어난다는 것은

이런 자기의 존재 방식을 통찰, 정견하고

생각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삶]은 수많은 앎,

즉 각()의 순간들로 되어 있음에 눈 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 자체가

곧 각()과 앎의 한 덩어리이며

동시에 살아있는 생명의식의 눈부신 자기 활동인 것입니다.

 

 

살아있지만 내면이 죽은 자는

이름과 감정의 내용물만 따라다닙니다.

 

내면이 깨어난 자는

모든 이름과 감정, 감각의 내용물이 전해

활발발하게 살아있는 생명의 움직임을 봅니다.

그것을 [] 또는 각이라 하며

이 자리에 붙인 표식(이름)이 이것 O이요, ()입니다.

 

 

3) ()과 각성(覺性)

각이란

안이비설신의에서 색성형미촉법이

일어남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것을 보고도 인식의 각()이 안 일어난다면

그는 지금 혼탁한 무기혼침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동물들도 사람과 똑같은 생명성과 그의 작용인 각()을 갖고는 있지만

그들이 각()은 있어도 각성을 정견 자극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바로 이 무기혼침 때문입니다.

즉 식()이 너무 탁하여 각성(覺性)이 어둡습니다.

 

그래서 아둔하거나 무기혼침에 빠져 있는 존재는

안이비설신의 활동인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의식 활동은 하지만

여전히 그 자체를 정견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깨어 있지 못한 까닭에

봐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각성이란 다른 말로 바꿔 본다면

(알아차림)의 본질인

성품자리의 자각인식을 말함이니

[생명의식의 활동]입니다.

 

즉 의식이 활동하며

자기 활동의 매 순간 움직임을

스스로 관찰하는 능력을 각성(覺性)이라 합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곧 각성(覺性)이 스스로 빛나며 일체를 정견자각한다는 말입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각성(覺性)이 스스로 밝은 정신의 빛을 갖고 있는 이 특성을

잘 정견, 자각하여야 합니다.

 

무명이란 찰나를 정견 자각하지 못하니

각성(覺性)이 어두워서

본래의 성품 생명 자리를 알지 못하고

제가 만들어 가진 분별에

스스로 붙잡히고 얽매이는 걸 말합니다.

 

동물과 범인도

다 매 순간의 상황을 알아차리는 각()은 갖고 있으나

그걸 돌이켜 관()하는 각성(覺性)은 거의 없거나 희미합니다.

 

깨어난다는 것은

바로 정견하는 습관을 통해

자기의 의식과 마음 활동을 돌아보는 각성(覺性)

점점 더 밝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두운 동굴에 촛불을 갖다 놓으면

일단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촛불을 2, 3개 더 갖다 놓을수록

동굴 안은 점점 더 밝아집니다.

 

마음을 밝히는 정견공부란

마치 이와 같으니

정견이란 곧

자기 마음을 밝히는 촛불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동굴 안이

바깥처럼 환해지는 그날까지 정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