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편견과 오해, 혐오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미니멀 그룹 패러다임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더불어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이라는 전시회도 소개해 드릴게요.
이 전시를 보고 오늘 주제를 떠 올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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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은 안으로 굽는다.
보편적인 인간의 속성이죠.
같은 학교 동창에게 고향 사람에게 한국 사람끼리 더 잘해주고 싶은 그 마음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더 잘되기를 바라는 이 당연한 마음을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치 독일이 벌인 홀로코스트도 이런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에서 출발한 것이니까.
우리편, 남의 편.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대체 얼마큼 알고 친해야, 혹은 어떤 집단 소속일 때
‘우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사회심리학자 헨리 타지펠이 실험을 했어요.
그가 고안한 실험 방법을 미니멀 그룹 패러다임이라고 부릅니다.
설마 이런 사소한 기준으로 우리와 그들이 갈릴까?
이렇게 생각했던 너무 점 같은 기준으로 편이 갈리는 것을 보고 타지펠은 깜짝 놀랐습니다.
14살 남자 아이들에게 그림을 보여주었어요.
평소에 추상화에 관심이라곤 1도 없던 친구들이죠.
이 두 그림은 폴 클리, 그리고 바슬리 칸딘스키가 그린 거야.
어떤 게 더 좋으니?
이런 식으로 12개 그림을 보여주고, 어떤 그림을 선호하는지 물은 다음에
“너는 클리를 더 좋아하는구나”라고 말해주었어요.
“그런데 말이야, 너처럼 클리 그림을 좋아는 어떤 남자애가 있어.
이름은 몰라.
클리 74호라고 부르자.
그리고 칸딘스키를 좋아하는 다른 애도 있는데
얘는 칸딘스키 44호라고 불러.
여기 돈이 이 만큼 있어.
네가 원하는 대로 이 두 아이에게 나눠 주면 돼.
아, 그런데 너는 이 아이들이 누군지 알 수도 없고, 나중에 만날 수도 없단다.
그리고 너는 돈을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누구에게 얼만큼씩 주겠니?
대부분의 소년들은 자기처럼 클리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돈을 더 많이 주고 싶어했어요.
그림? 하나도 안 중요해요.
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클리 74호가 그래도 내 편인 거예요.
이것을 내집단 편애, In-group favoritism이라고 합니다.
다음 상황에서 아이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어차피 내가 갖지도 못하는데 두 아이들에게 많이 주면 좋잖아요?
놀랍게도 14살 소년들은 옵션 A를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닌 ‘그들’이 더 많이 받는 꼴은 보기 싫은 거예요.
옵션 B에서 내편이 19불을 갖는 건 좋지만
쟤네가 25불을 가져가는 건 싫어요.
그래서 차라리 내 편이 고작 7불 밖에 받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쟤네한테는 1불만 주고 싶다는 거죠.
우리가 아닌 그들에게는 불이익을 주고 싶어 합니다.
이것을 외집단 혐오, out-group animosity 라고 해요.
더 황당한 실험을 볼까요?
소년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 화면에 점이 몇 개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뭐라고 대답하든 상관없이 무작위로 어떤 애들에게는
“너는 실제보다 점이 더 많다고 대답하는구나, 과대추정자네”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너는 실제보다 점이 더 적다고 대답하는구나. 과소추정자네”
라고 이야기 해줘요.
이것도 우리와 그들을 구분짓는 기준이 될까요?
네, 그랬어요.
“과대추정하네” 이런 말을 들은 아이들은
자기와 같은 과대추정자에게 돈을 더 많이 줬습니다.
아니, 점이 몇 개라고 생각하든, 이게 뭔 상관입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준으로 우리는 내집단과 외집단을 가릅니다.
순진한 14살 아이들조차도요.
헨리 타지펠은 폴란드 출신 유태인 사회심리학자에요.
나치 홀로코스트로 가족을 모두 잃었어요.
본인도 간신히 살아남았죠.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 나치가 자행한 잔혹한 행위들을 목격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독일인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어요.
“원래 타고나기를 횽악한 사람들이야!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민족이지.”
하지만 정작 피해자인 타지펠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니야, 독일 사람들이 더 악하게 태어난 게 아니야.
사람은 누구나 아주 사소한 기준으로 순식간에 우리와 그들을 구분짓고
편애하고 차별하지.
홀로코스트는 이런 인간 속성의 매우 극단적인 사례일 뿐이야.“
편가르는 우리의 경향성은 수많은 미니멀 구룹 패러다임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입니다.
이것이 편견과 오해, 왜곡과 균열의 시작점입니다.
그림에 대한 선호, 추정한 점의 개수로
타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시작될 수 있다면
국적과 피부색, 종교와 성별, 나이 정치적 성향과 성적 지향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얼마 전에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이라는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공기처럼 ‘혐오’가 만연한 요즘
예술 작품을 통해서 혐오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극복해야 할 현상임을 교감하고자 기획한 전시랍니다.
멋진 도슨트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작은 차이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거기서 혐오가 시작된다.”
이제 며칠 안 남았지만
가보시면 좋겠네요.
여러분, 우리는 다 같은 사람이죠.
생김새와 태어난 곳, 인생 경험, 가치관이 다르지만
우리 모두 작은 일에 기뻐하고
작은 일에 상처받는 같은 사람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늘 여러분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