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현대선76] 몸이 나라는 습관적 생각/ 피올라 현대선 12강 "몸밖으로 나오기" 2회

Buddhastudy 2025. 2. 25. 19:20

 

 

우리가 이 몸 바깥으로 나온다는 건

다시 말하면 깨어난다는 거예요.

뭐에 깨어나냐면

자기 마음자리에 깨어난다는 거예요.

 

절대 유체이탈시켜주고

무슨 뭐 이상한 꿈나라로 데리고 가는 게 아니고요.

깨어나는 걸 말하는 거예요.

몸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시공간이나 또는 이런 느낌이나

이런 오온이 만드는 모든 분별 내지

그것들이 만든 경계로부터 벗어난다는 거예요.

 

그럼, 거기 뭐가 있는데요?

그렇게 대상화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모든 대상을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뭐가 있어요?

 

여러분이 그것과 하나 돼야 되는 거예요.

그게 깨달음이에요.

 

그러니까 몸 밖으로 나온다는 게 다시 말하면

깨어난다는 거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여러분이 흔들림이 없으면

그게 바로 깨달음인 거예요.

 

근데 그 자리는 대상화할 수가 없어요.

왜 할 수가 없느냐 하면

대상화한다는 것은

그거를 보는 또 다른 상대가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에

절대 진리는 이렇게 둘로 나눠질 수가 없잖아요.

 

절대 진리는 유일한 게 하나뿐인데

하나가 어떻게 자기를 인식하겠어.

그거 아닌 게 있어야 인식을 하니까.

 

그래서 우리가 몸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

불경이나 이런 경전들이 말하는 게 한결같이 뭐냐 하면

그 오온개공

생각이나 감정, 느낌 이런 거를 공하다고 봐라.

왜냐하면 이 자리를 자각하고 발견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또 육조 혜능 같은 분은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응무소주_ 어디에도 머물지 말아라

 

여러분, 어디에도 머물지 말라고 그러면

어디에 머물러야 돼?

어디에도 머물지 말라는데, 그럼 어디 있어야 돼?

그 말로는 말이 안 되잖아요.

 

근데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면 돼요, 자기는.

그러면 어딘가 있게 돼.

근데 그건 말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머물지 말라고 할 뿐이에요.

그러면 너 스스로 알게 된다.

 

3차원 안에서는 3차원적 사고방식으로는

그럼 어디에 있어야 돼?” 이런 생각이 나오는데

4차원의 열린의식으로는

어디에 있어야 돼?”라는 그런 생각에 빠지지 않으면 돼.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래서 몸에서 나온다는 거는

3차원 시공간 안에도 있지 않고

자기 몸의 생각이나 감정에도 머물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선문답에 보면

본래무일물이란 말이 있잖아요.

 

본래무일물이라고 답을 하니까

그 스승이 인가를 해줬다고 그래요.

 

근데 본래무일물이라는

생각에, 3차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을 하면은

그러면 없다는 얘기인가?

그러면 뭐 깨달음도 없네.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깨달을 사람이 어디 있어?”

뭐 이런 생각으로 빠져가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근데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은

본질이 이겁니다.

우리가 뭐가 있다 없다 하기 위해서는

꼭 오온이 작동을 해야 돼요.

생각, 감정, 느낌이 작동을 해야 돼.

생각, 감정, 느낌이 작동하지 않는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오온 가지고는 있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본래 무일물이라고 할 수 없이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 말 따라가고

말에 떨어지면 안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죠.

본래무일물이니까 없구나하면 벌써 말이 떨어지는 거예요.

 

, 그러면 우리가 몸 바깥으로 나온다라고 하는 것은

왜 몸 바깥으로 나와야 되느냐?

보통 사람은 자기가 몸 안에 있는 마음이고, 의식이라고 생각해요.

안 그래요?

여러분들도 그러고 살았잖아.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태반일 수도 있어.

 

그런데 그거는 여러분이 잘 정견을 해 보시면

자기 생각이고

아까 내가 처음에 던진 그런 자기 감각, 느낌에 기반한

습관적인 대답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자기를 잃어버릴 때

아주 아름다운 경치 앞에서

정말 경치 보고

이야할 때

또는 너무나 재미난 영화나 TV 연속극에 홀딱 빠져 있을 때

자기가 있어요? 없어요?

몰아의 경지에 있잖아, 벌써. 안 그래요?

 

그때 자기가 어디 있냐고

그때는 그 대상에 가서 빠져 있어요.

그때는 이미 몸 밖에 있는 거야, 사실은.

몸 안에 있는 게 아니야.

그런데도 다시 몸을 붙잡고는

또 내가 이 안에 있다고

자꾸 번뇌 망상을 부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몸 바깥으로 나와야 되는 이유는

사실은 이미 나와 있지.

근데 자꾸 자기가 안에 있다고 분별하는 이유는

그렇게 살아온 업습, 습관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다른 이유가 없어요.

 

자기가 그냥 그걸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그게 자기 안에 세뇌가 된 거예요.

최면이 걸린 거죠.

 

근데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있느냐?

자기를 뭐라고 한정하고, 그렇게 한계 짓고 규정짓는 순간

그건 생사에 빠지는 거예요.

?

한정 지어졌기 때문에.

한정 지어진 것은 생사가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죠?

 

여러분이 나를 몸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생사에 빠진 거예요.

그래서 죽고 다시 태어나고 하는 일이 반복되는 거야.

 

나를 만약에 아무것도 아니다.

본래무일물이다하면 생사가 있어요? 아니면 다시 태어나겠어?

윤회 끝이야.

3차원을 졸업한다고.

그래서 4차원이 열리는 거야.

 

근데 이런 모든 한계나 경계라고 하는 것들이

본질적으로 뭐냐 하면

오온이 만든 정보 놀이예요.

생각, 감정, 느낌이 만든 정보 활동이라고, 안 그래요?

 

그러니까 자기가 자꾸 끝없이 우리는 자기를 규정해요.

뭐라고?

나는 무엇이다.

 

여러분 잘 봐요.

여러분이 자기를 소개할 때

나는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무한히 열린 생명 자체인데...”

이렇게 설명한 사람 없어.

그러면 미쳤다고 그래

저놈 돌았나?”

 

그럼, 뭐라고 설명해?

나는 뭐 몇 살 먹었고, 고향은 어디고 학교는 어디를 나왔고

누구의 신랑 또는 아내고

또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들 딸이고...”

뭐 이런 식으로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이 발견하신 이 본래면목, 이 자유는

한마디로 모든 차원을 다 품고 있는 자리지

3차원 안에 갇힌 자리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영생하는 자리고

시공간을 초월한 자리고

그야말로 하나님의 자리인 거야.

 

근데 그것과 정말 확실하게 계합이 되려면

본질적으로 첫 번째 해야 되는 게 뭐냐면

나를 뭐라고 한정하면 안 되는 거야.

왜냐하면 한정하는 순간 그것에 갇히니까.

 

그래서 나를 한정하는 순간

그것에 갇히고

그렇게 됨으로써 나 아닌 것이 생겨나요.

 

그래서 금강경에서 보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려라이 말이 뭐냐 하면

나를 한정하지 말란 얘기야.

현대어로 말하면

나를 제발 그냥 내버려 둬, 있는 그대로 놔둬, 한정하지 마

이 소립니다, 아시겠죠?

 

그러면 여러분은 자기를

너는 누구냐? 너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뭐라고 답하실 거예요?

 

우선 자기를 뭐라고 생각해?

내가 여러분의 그 좋아하는

한정하고, 규정하는 식으로, 그 차원으로 좀 들어가서

거기서 말씀을 드리자면

여러분들은 지금 저랑 대화하고 있는데

사실은 몸이나 이런 몸에 대한 감각이나 느낌이 생멸하고 있고

생각, 감정, 느낌도 생멸하고 있는 의식이에요.

몸이 아니라고.

 

지금 여기 아무리 몸이 있어 봐야

의식을 잃으면

그건 송장이나 다름없어요.

몸이 여러분이 아니야, 그렇죠?

그럼, 의식인가?

그럼, 간밤에는 의식이 없었는데 어떻게 된겨?

지금은 의식이 있지.

 

그럼 의식조차 나오는 이 자리는 또 뭐야?

아침이 되면 딱 나와.

핸드폰 충전, 아침이 되면 딱 작동을 해.

저녁에 가서 탁 꽂으면 또 불 다 꺼지고.

 

그거를 우리가 생명 법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의식조차 투사되고 다시 돌아가는 이 자리를

생명 법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생각으로 말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이거에 딱 눈이 열려야 되는 거야.

그럼 일단 낮에는 의식이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구성하는 지금 의식은

몸 안에 있어요? 밖에 있어요?

 

지금 의식이 있죠?

그건 자기 몸 안에 있어? 밖에 있어?

...

 

 

, 옛날에 수염 잘 기르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누가 물어봤대요.

주무실 때 그 이불 안에 놓고 주무시냐? 밖에 놓고 주무시냐?”

그날부터 이 할아버지가 잠을 못 잤대.

이게 이불 안인 거야? 밖인 거야?

 

그러니까 이와 같이 생각은 번뇌를 만들어요.

여러분이 의식은 몸 안에 있냐? 밖에 있냐?

의식이 몸 안에 있겠지, 밖에 있을까?

 

그러니까 그런 것이

자기가 몸이 의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에 있다고 그러고

또 몸이라는 것도 생각+ 느낌에 불과하구나.

즉 몸이라는 것도

의식이 있고 난 다음에 느껴지는 대상에 불과하구나

이런 사람은 의식이 몸 밖에 있다고 그래요.

 

그런데 요 두 대답은 다 틀린 거지.

왜 그러냐면 자기 분별이거든.

분별에 의지해서 또 분별하고 있거든.

 

질문부터가 어떻게 대답해도 한 대 맞게 돼 있는 질문이예요.

좀 얄궂은 질문이죠.

 

그럼 어떻게 답을 해야 되나?

...

 

그래서 왜 이런 선문답이 있잖아요.

저 밖에 있는 저 큰 바위가

네 마음 안에 있냐? 밖에 있냐? 했더니

안이라고 해도 틀리고

밖이라고 해도 틀리고

이거 어쩌면 좋아.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