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대한 가르침은
너무나 많은 경전과 이론과 역사 때문에
초입자는 바다에 빠진 느낌이 들 수 있다.
심지어는 서로를 부정하는 듯한 이론들이 상충하기도 하여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도 불교적 가르침의 핵심은 단순한 데에 있다.
그것은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다.
여기서 붓다는
문제와 문제의 원인과
처방과 치료 후 생활 습관의 지침을 모두 설했다.
현대의 의료 전달 프로세스와 동일하다.
즉 논리적이며 실천 가능한 해법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청풍명월의 주인은 따로 있지 않고 즐기는 자가 주인이듯이,
고집멸도를 잘 이해하여 내것으로 만들기만 하면
불교는 마음공부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오늘은 불교의 시작과 끝인
고집멸도, 사성제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불교가 여러 가지 경전도 많고, 이론도 많고, 역사도 깊기 때문에
마음공부하기 위해서 불교에 접하는 사람들은
바다에 빠진 느낌을 받기도 하고
그다음에 방향을 잃기도 하는데요.
그래도 불교의 시작과 끝은
고집멸도라고 하는
이 네 가지, 네 마디에 다 들어가 있다
이렇게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당시에 고집멸도라는 말은
붓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설명할까? 진리를 어떻게 설명할까?
마음을 본뇌를 없애는데 어떻게 이것을 적용할까?라고 했을 때
마음의 번뇌를 일종의 병적인 상태로 보고
병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의료적 방식으로
고집멸도라고 하는 이 4가지의 단계를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당시로서는 그러니까 대단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전개를 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고집멸도는 의료적으로 보면
이 고라고 하는 게 증상이죠.
괴로움이라고 하는 증상이 있는 것이고
이 집이라고 하는 것은 그 병명을 진단해 준 거죠.
그건 “그거는 집이야. 집 때문이야. 집이라는 병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물론 그 병의 구체적인 이름은
‘근본 무명’이다 이렇게 되겠지만
집이 되겠습니다.
세 번째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처방이겠죠.
그게 멸이다.
집의 멸이 곧 고의 멸이다, 그죠?
그러니까 이 집을 멸하는 것이 괴로움을 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겠죠.
그리고 이 도라고 하는 것은
그러면 생활 습관을 어떻게 가져야 됩니까?
그 후 처리
치료 후에, 깨달음 후에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렇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고집멸도는
증상과 병명과 처방과 생활 습관이라고 하는 이 네 가지
현대적으로 보더라도 의료적인 어떤 프로세스를 그대로 따라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불교를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삼아승지겁
이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우주가 여러 번 흩어졌다 다시 생겨나는
그런 과정의 수행을 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그거는 좀 소설 같고요.
실제로 마음의 괴로움과 관련된 것은
딱 고집멸도, 이 4가지로 정리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가지 않습니까?
마음공부도 사실은
마음이 불편해서 공부를 시작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마음공부의 증상이라고 하는 것을
부처님이 대표적으로 8가지를 이야기...
108번뇌도 있고, 8만 4천 번뇌가 다 있겠습니다마는
대표적으로 생로병사가 괴로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상식하고 조금 다른 것이죠.
생_ 좋은 거 아니냐?
그건 아니다.
생을 ‘태어난다’라고만 보지 말고
‘살아간다’라고 보면
우리 살아가기 위해서 아득바득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생도 힘든 것이고
노병사는 당연히 괴로운 것이죠.
근데 젊었을 때는 그것을 모르는데
제가 환갑 나이 정도가 되니까
이 늙는다는 것 그다음에 병든다는 것, 또 죽음이 가까이에 있고 순서가 없다는 것
이런 것들이 되게 훨씬 실감이 되면서
실제로 한두 개씩 몸에 지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게 실감이 됩니다.
그래서 붓다가 생로병사
삶과 죽음 전체 과정이 괴로움이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감이 가고요.
두 번째는 좀 더 심리적인
네 가지 괴로움이 있죠.
[구부득고]라고 하는 게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괴로움
이 상실감, 박탈감, 크다고 하겠죠.
그리고 [원증회고]_ 이 싫은 사람과 만나야 되는
정말 먹고 살기 위해서 싫은데도 그 사람을 만나야 되는 거, 그 관계 속에서
또 세 번째는 [에별리고]_ 좋아하는 사람하고 헤어지는
이때 애별리고는 좋아하는 사랑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것
그것을 오래 가지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이겠죠.
그리고 [오음성고]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안이비설신의 모든 감각 기관이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이런 데 다 끄달리는 거죠.
거기에 끌려가서 나의 평정심이 깨어지는
이런 8가지를 대표적으로 이야기했지만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면으로 보면 삶의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 ‘고’라고 하는 병의 증상이죠.
그다음에 병의 원인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집’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근데 여기서 진단명이 ‘집’으로 나왔잖아요.
이 ‘집’은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잡을 집’ 집착하는 것
한자가 아닙니다.
이때 집 자는 ‘모일 집’ 자입니다
또는 ‘쌓일 온’ 자라고 표현했을 때 그 ‘온’ 자하고도 비슷한 얘기가 되겠습니다.
집착이 아니고 쌓여 있다는 겁니다.
뭐가 쌓여 있다고요?
경험이 쌓여 있다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경험이 쌓이면
“이게 이런가 보다”라고 하는 인식이 결론적으로 도출되거든요.
그 인식, 생각이 딱 틀을 갖추고 완고해지면
시각이 왜곡된 거잖아요.
그래서 경험이 쌓이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식의 왜곡을 가져오는데
이 인식의 왜곡을 가져오는 경험의 쌓임
즉 습관, 그죠?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이렇게 진단명이, 그렇게 병명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근데 경험이 왜 문제를 일으키는가 하면
경험이 쌓이면 아까 인식을 도출해 낸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무명, 모르니까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면 교훈을 얻고
“이건 잘됐다 이건 잘못됐다” 막 분류가 되어서
어느 순간에는 “이건 이거야” 이렇게 인식이 되죠.
근데 그 자체가 하나의 왜곡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인식을 그냥 하는 게 아니고
경향성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죠.
편향이 생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개개인이 하는 경험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 경험이 쌓여서 왜곡된 인식이 생기고
그래서 그 왜곡된 인식이
오판,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 때 판단해야 되는데
내가 그 판단을 왜곡된 인식으로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오판을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고
그 잘못된 판단은 사실은
무의식적일 수도 있거든요.
나도 모르게 “이게 당연한 거 아니야?”
이렇게 판단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인식이 그렇게 되면
“이건 잘못됐다”라고 감정이 생기고
그 감정이 생기면 거기에 따라서 행동하게 되고
그럼 잘못된 행동을 낳게 되고
그 잘못된 행동이 잘못된 결과를 낳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근데 잘못된 결과라고 하는 말은
마케팅 용어로 보면 진실의 순간인데
이것이 시장과 고객과 만나서 나의 상품과 서비스가 통하지 않을 때
그게 일치하지 않을 때
그건 잘못된 결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잘못된 결과라고 하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 밝혀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이 두카라고 하는 것의 단어적 의미는
“맞지 않다, 어긋난다” 이런 뜻이거든요.
뭐 하고?
내 생각하고 현실이 맞지 않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은 나는 현실적으로 먹이 활동
돈 버는 데도 문제가 생기고 실패를 하지만
마음의 번뇌를 가지게 되는데
불교에서는 이 마음의 번뇌를 좀 더 집중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일이 잘 안되면 괴롭지만
마음의 번뇌까지 안게 되는 것을
우리는 ‘두 번째 화살’이라고 해서
심리적 괴로움에 좀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가 병명으로 진단한 것은 뭐냐 하면
평상시에 ‘무명행식’으로 전개되는 ‘경험의 끝에 도출된 결론들의 묶음’
그 묶음이 ‘잘못된 인식과 행동과 감정과 결과’를 가져오고
그것이 ‘번뇌’를 가져온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공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는 그러면
붓다가 의사로서 의왕으로서
그럼 처방이 뭐냐?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했을 때
이 ‘멸’이라고 하는 처방을
그러니까 “그거 없애야지”
뭘 없애는가 하면 아까 집착을 없애라고 한 게 아니고
쌓인 거, 이 쌓임을
또 습관이 형성되는 이것을 없애야 된다.
그 습관의 결과에 따라서 도출된 결론들이라고 하는 것을
프리즘을 없애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처방으로 연고를 발라줬는데
그 연고의 이름이, 그 약의 이름이 ‘연기법’이죠.
연기법은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인과법의 세련된 인연과라고 해서
인과법의 세련된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몰라도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를 원망할 일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인연생 인연멸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서 생기고
또 인연이 닿으면 흩어진다 라고 하는 것이
첫 번째 연기법의 교훈이고요.
두 번째 연기법이 좀 더 결정적인데
이것은 지적인 통찰입니다.
그러니까 우주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 대칭적이다.
그래서 디스 댓 피어리 또는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것저것 법칙’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래서 이 음과 양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갈대처럼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있으면 반대로 반드시 저것도 동시에 있다, 생겨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내가 이것이 좋으면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반드시
내가 행복하면
행복하지 않은 상태도 반드시 있다
이렇게 그 개념의 세계는 그렇게 대칭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가장 근본적인 처방은
대칭성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우주의 법칙
‘연기법을 깨달아라’
이것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런 연기법을 알게 되면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세 가지 필연적인 결과가 있는데
그게 하나가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우리가 현상적으로도 그래 뭐 무상하지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겠어
이렇게 무상하다는 거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 무상한 것
새 닻을 내리고, 고집을 피우고
그것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새로운 현실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거죠.
두 번째는 그 괴로움 아까 이야기한
세상의 현상이 나의 왜곡된 인식 체계와 맞지 않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괴로움
이게 두 번째 논리적 귀결이고.
세 번째는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서
조건이 만났을 때 생겨나고
조건이 흩어지면 사라지기, 멸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멈추어 있지도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나, 참나, 영혼불멸의 어떤 나
이런 것에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다
이런 게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것이죠.
더군다나 사실은 괴로움을 느끼는 주체가
심리적인 자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심리적인 자아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를 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실체라기보다는
수단적 탈것, 수송 수단, 그런 데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심리적 저하가
이 생을 이끌어가는 데
굉장히 중요한 탈 것으로서의 기능은 있다.
근데 그것을 실체 목적, 혹은 참된 존재, 이렇게 보면은
거기서부터 무궁한 문제가 피어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아를 애지중지하는데
프로이드만 하더라도 이 자아를 에고라고 표현하면서
이 에고가 이 ‘슈퍼에고’와 ‘이드’라고 하는
본능과 어떤 윤리적 배움
이 사회화된 존재
이 사이를 잘 조율하고
현실감을 담당하는 그런 관리자로 상정을 하거든요.
그래서 에고를 없앨 게 아니라
에고는 건강해야 된다.
왜 에고가 무슨 죄가 있냐?
에고는 그리고 진짜 나도 아니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이야기를 하는데
프로이드도 일부 ‘건강한 에고’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볼 때 무상, 고, 무아로 보고
그것의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연기법으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고 하는
인연에 따라서 생기고 인연에 따라서 멸한다라고 하는
조건에 관한 인식이 명확해질수록
우리가 생각하는 심리적 번뇌 있잖아요.
“이래야 되는데 저렇게 되다니”
그런 것은 어떻게 보면은
깊지 못한 인식, 잘못된 인식이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좋아하는 것은 당기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내고
이런 것이 마음과정 속에서 일어나니까
그 마음이 지옥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어떤 공감의 정도를 가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교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 입장에서는 내가 괴롭다라고 하는 이 증상은
무슨 우리 흔히 생각하는 업보
불교에서도 업보를 얘기하는데 업보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원죄이거나
이런 주체가 있는
뭔가 주체가 벌을 받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그냥 밝지 못함, 어두움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어둠이 아무리 오래되더라도
빛이 오는 순간에 그곳은 밝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번뇌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인라이먼트, 자각으로 인해서 밝아지면 그건 사라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불교가 현실감도 가지고 있는 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인간사가 모두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죠.
여전히 돈 문제, 건강 문제, 인간관계 문제 이런 것들은
또 그 나름대로의 논리에 따라서, 인연에 따라서 흘러가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인간사회의 어려움이나 이런 것들은
여전히 전개되고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내가 아무리 무슨 이런 걸 자각했다 하더라도
탐진치라고 하는 심리적인 불편함에 휘말릴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거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하면
좀 시간이 좀 필요하다.
그러니까 어두운 곳에 빛이 밝혀지면
어둠은 물러가지만
그건 원래 실체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피어난 곰팡이 같은 거는
바로 그 순간에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전체적으로 환기가 되고, 또 빛이 들어오고
이러면서 슬슬슬슬 시간을 두고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사비돈제事非頓除잖아요.
일이라고 하는 것은 금방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절차를 따라서 없어진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는 인식이고
하나는 심리적인 수용인 것이죠.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이런 인연에 따라서 이런 조건에 따라서 생겨났구나
-그러면 수용은 뭐냐 하면
이거는 조건이 해체되어야 없어질 것이니까
이 상황을 내가 부정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겠다라고 받아들이는 것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게 옳다 이런 의미가 아니고
그렇게 묵묵히 지켜볼 수 있다
이런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다음에 그 도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진단도 되고, 처방도 되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보면 병근을 찾아서 제거하고 나면
즉 자각을, 깨달음을 얻고 나면 끝이냐?
그게 아니고 그것은
올바른 생활 습관으로 증명되거나 또는 확립되어야 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죠.
그게 도죠.
고집멸도의 도죠.
그거는 지금 우리 의료계로 치면은
수술 후에 올바른 생활, 생활 습관 붙이기
이런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도 보면은 8가지 대표적으로 팔정도 얘기했는데
그건 똑바로 하라는 것이죠.
바로 하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
전경과 정사유는
우리가 올바른 견해, 지혜에 관한 것이고
그다음에 정언, 정업, 정명 이런 거는
말과 행동과 생활을 똑바로 하라는
어떤 바른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리고 정진한다든지
그다음에 사띠, 정념이라든지
그다음에 삼마디, 삼매, 정 같은 이런 것은
당시에 도 닦음, 마음 닦음, 이런 것들에게 있었던 이야기인데
그중의 핵심은 제가 보기에는
사띠, 마음을 잘 챙기는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이고
어떻게 전개되고 있고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
자각 한 가운데 지켜보는 것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 생활 속에서 8가지 이런 문제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우리가 얘기했던
연기법과 관련된 결론들 이런 것들을 챙겨서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에서 그런 것들을 잘
사띠_ 관찰하는 것, 통찰해 내는 것
즉시 아는 것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이야기했던 것은
평생을 수십 년을 다리 꼬고 앉아서
수행을 해라, 수도를 해라, 뭘 닦아라
이거는 사실은 조금 좀 속 알맹이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정념이야말로
바른 닦음에 방법이 있다고 하면
그때그때 나의 편향을 알아차리는 것
이런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시작과 끝은 고집멸도인데
이 고집멸도에서도 핵심은 뭐냐 하면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고
좋은 것은 당기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밀어내는
어떻게 보면 생명이 있는 것의 본능인데요.
이것이 관념으로, 언어로, 그것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불필요한 고통이나 통증에 이어서
번뇌라고 하는 심리적 고통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이 가르쳤다.
저는 이렇게 고집멸도를 이해하고
이것이 불교의 시작과 끝, 아주 네 단어로
그렇지만 모든 것이 들어있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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