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삼법인(무상, 고, 무아)과 유목민족의 가치관

Buddhastudy 2023. 12. 18. 19:56

 

 

유목민은 풀을 찾아 이동하는 생활을 한다.

한 곳에 멈추면 문제가 생긴다.

풀은 무상하다.

풀을 찾아 떠도는 삶은 괴롭다.

어떤 특정한 땅에 묶인 정체성이 생길 수 없다.

즉 무상, , 무아가 기본적인 상식이다.

더구나 이동할 때는 조리식 텐트를 걷어가고 새 땅에서는 결합한다.

조건따라 생멸하는 연기법이다.

석가족은 그리이스인들이 샤카족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스키타이족으로 구분되는 유목민이다.

그들이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에 정주하여 농경을 했지만

유목민의 사상과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불교 사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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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붓다의 삼법인 무상, , 무아죠.

붓다의 삼법인과 유목민족의 가치관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붓다 종족이 석가족이라고 하는데

그리스인들은 이 사람들을 샤카족이라고 불렀고

오늘날 역사적으로 보면 이 사람들은 스키타이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키타이족은 흑해 연안에 머물렀던 유목민족이죠.

 

이 유목민족이 히말라야를 넘어서

오늘날 부탄과 인도의 경계 정도의 정착을 하고

붓다의 아버지는 정반왕이잖아요.

깨끗한 밥이라는 뜻이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으로 정착하고 있던 단계의 도시, 혹은 나라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이론 사상은

정주한 농경민족의 사상과는 조금 달랐고

그것이 혁신적이고 혁명적일 수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죠.

 

그래서 유목민과 붓다의 사상과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를

개연성만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유목민은 기본적으로 정주를 안 하고 이동을 하지 않습니까?

이동을 할 때 집을 뜯어갈 수 없으니까

텐트를 걷어가죠.

텐트는 조립식이잖아요.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첫 번째 이동

두 번째는 조립과 그다음에 그걸 위한 분해 결합

그다음에 모듈화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요소들을 결합하면 집이 되고

요소들을 해체하면은 그냥 짐이 되는 거죠, 집이.

이런 것이 기본적인 생활양식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불교의 무상, , 무아라든지

연기라든지 하는 것들의 기본적인 콘셉트하고

굉장히 유사하다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붓다는 사람을 형이상적인 실체

즉 영혼 불변하는 어떤 아트만

또 영원한 불멸의 영혼

우주의 근원

이런 것들로 보지 않았던 것이죠.

 

그냥 눈앞에 있는 그대로 봐라.

사람이라고 하는 게 결국 뭐냐?

몸이 있고, 그다음에 정신 활동

이 두 개가 있지 않냐?

 

그러니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유목민식으로 이해하면

심신의 결합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죠.

 

신은 또 몸은 지수화풍,

또 마음은 수상행식

이렇게 8가지 요소가 결합되면

이것이 결합되어서 조화를 이룬 것이 사람이라고 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붓다의 인간관은

당연히 유목민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연기라고 하는 것은

인과관계가 아니고

그런 요소들이 모여서 함께 일어날 때

우리는 이것을 생명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붓다 입장에서는

사람을 해체해서 분해해서 조립식으로 쳐다보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으로 그렇다면

모여서 요소들이 모여서 함께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는 것을 용어로

연기 또는 연기법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연기하는 존재의 특성이 뭐냐

그것을 세 가지로 추출했다는 겁니다.

그게 무상, ,무아라는 것이죠.

 

무상은 아까 이야기한 조건에 따라서

모이면 그것이 생기는 것이고

조건이 바뀌어서 흩어지면 그게 없어지는 것이니까

생과 멸이 무상하다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하는 것이 하나고

 

두 번째는 이렇게 조건에 따라서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있었다가 없었다가 하는 것이

해피한 건 아니지 않냐? 해피한 상황은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이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그거를 두카라고 하고

그거를 한자로는 고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 고죠.

 

근데 이 고라고 하는 것을 한자를 뜯어보면

풀초 밑에 옛 고 자거든요.

그 옛날 풀이 있었던 자리라는 뜻입니다.

 

유목민의 입장에서는

풀이 무성하게 잘 자라 있는 곳은

먹이를 먹일 수 있으니까 되게 해피한 것이죠.

그러나 무상한 것이죠.

그거는 풀을 다 뜯어 먹고 나면 황무지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거기서는 그것은 풀 있었던 자리가 되고, 이미 풀은 없는 거니까

그건 괴로운 것이죠.

먹을 풀이 없으니까

그럼 또 이동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유목민의 생활 조건입니다.

유목민의 생활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풀은 있다가 뜯어 먹으면 없어지니까 무상하고

그다음에 풀이 없어지면 괴롭고

그러니까 나는 또 움직여야 되고

 

그러면 나는 이 지방 사람이다.’

나는 이 지역 사람이다라고는 정체성을 갖고는 못 살죠.

나는 이동하는 사람.

그러니까 고정된 정체성에 붙들리면 안 되는 존재죠.

그것에서 무아라고 하는 정체성에 대한 개념이 나오는 거죠.

 

근데 아리안족의 인도에 와 보니

아트만, 브라만이라고 하는 영혼 불멸의 근원이라고 하는

그 형이상학적인 실체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단 말이죠.

안아나트만,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

이게 무아를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라고 해석을 해야 되는데

내가 없어라고 하니까

굉장히 불필요한 상상에 휘말릴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상- - 무아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삼법인, 바꿀 수 없는 법의 도장인데

이것은 유목민들의 입장에서 봐서는

그냥 대단히 상식적인 상황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붓다의 사상이 유목민의 사상과

사실은 거의 저는 비슷하다, 혹은 맥락이 같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아까 풀을 다 뜯어 먹었으면 이동해야 한다.

이동하지 않고 있으면 망하는 것이죠.

즉 그게 뭡니까?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고 생존의 조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생각할 문제가 아니고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동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유목민은 어떤 면에서는 고단하다

삶을 행복하다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초원길이라고 하는 것이 있죠.

정주 농업지대 위에 초원이 있고, 말을 달리고, 유목을 하는 집단들

저기 무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흑해까지

이 유목민들의 초원길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격언이 있습니다.

집을 짓는 자 그곳이 무덤이 되리라

이런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초원의 생존 법칙은

움직여라,

풀이 마를 때 풀이 없어질 때쯤 다른 풀을 찾아서 이동해라

이것이죠.

 

그러니까 나 여기서 살 거야라고 고집하면은 굶어 죽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게 서양 유럽에서는

지리상의 발견, 이런 때 뱃길을 열 때

이런 표현하고도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항구에 정박한 때는 안전하다

그런데 배는 그러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동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라 라고 하는 것을

격려한다, 고무한다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같은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불교를 너무나 염세적이고, 부정적이고

그다음에 세상을 막 안 살려고 하고

이런 세상에 대해서 굉장히 네거티브하게 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저는 조금 지나친 해석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악착같이

뭔가 잘살아보려고 하는 것들 중에 많은 것들이

가져갈 수 없는 허망한 것이긴 합니다.

그 부분을 직시해야 하지만

불교가 보는 기본적인 세상은

변화가 기본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불교는 어떻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대단히 진취적인

왜냐하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고

고정된 정체성도 없고

그다음에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서 생성하거나 소멸할 수 있다 라고 보는 거니까

현대에서 말하는 이 역동적인 변화의 시대에

어쩌면 가장 잘, 정확하게 통찰한 사상일 수도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변화에 대해서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아까 배가 닻을 내리지 않고 있으면

또 유목민이 집을 짓지 않는다면

즉 집착, 그게 집착이죠.

집착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겪는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아마 좀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안 그래도 살기 힘든데

그 어떤 생각이

어느 과거의 시점에 좋았던 때일 수도 있죠

거기에 묶여 있고

계속 그래야 된다라고 하는 생각과

변화하고 있는 현실의 불일치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스트레스가 정말로 커다란 것 같습니다.

 

 

오늘은 붓다의 삼법인 무상-- 무아는

유목민의 사상과 맥락이 같고

그것은 대단히 변화에 대해서 열려 있는 진취적인 마음이다.

 

그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스트레스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 라고 하는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