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상황이 반드시 같은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나의 해석에 따라 다른 느낌,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감정의 상대성을 파고들면 고정된 본체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상황도 나의 해석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상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상황을 해석하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오늘은 감각은 또 감각을 하면서 받는 느낌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나는, 당신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 감각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감각이 정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인데요.
몸이 있고, 몸의 감각 기관이 있고
그 감각 기관을 통해서 외부 상황이 접촉되면
그다음에 느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근데 그 느낌은 반드시 ‘그래서 좋은 거냐 싫은 거냐’
그러니까 애와 오
좋아할 애와 싫어할 오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면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버리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죠.
이것이 12연기의 전반 부분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이
이 상황이 반드시 좋아하고 싫어함이 그 상황에 따라서 정해져 있다고 하면
기계적으로 정해져 있어서 바꿀 수 없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상황은 반드시 괴로움을 겪어야 되겠죠.
그런데 마음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일이라도
맥락을 달리해서 보면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정서적으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내가 일을 열심히 하는 부하직원을 보았다.
그러면 흐뭇하겠죠.
열심히 생활하는 열심히 일하는
동생을 봤다, 아들을 봤다, 딸을 봤다 그러면 흐뭇하겠죠.
근데 만약에 내가 일을 열심히 하다가 산재를 당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과로로 몸을 크게 상했다.
그런 경험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나의 아주 가까운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다만 흐뭇한 모습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을 겁니다.
일을 열심히 한다라고 하는 그거는 팩트인데
해석이 그 해석이 주는 느낌이, 맥락이 달라지면
그게 좋은 느낌이다가 그것이 괴로운 느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즉 상황과 그 상황이 만들어 내는 정서 사이에는
절연점, 단층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친한 사람이나 가족 중에 성격이 좀 무뚝뚝해서
틱틱 거리고, 불친절하고, 조금 쏘는 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평상시에는 ‘왜 저렇게 불친절하지?
왜 사람을 좀 부드럽게 대하지 않지?’ 는 불만이 있을 수 있겠죠.
근데 그 사람 소중한 사람이 아파서 기운이 약해져서, 또 마음도 약해져서
평소에 이렇게 기 세게 얘기하다가
되게 부드러워지고 아니면 좀 소극이 되어서
나한테 되게 부드럽게 이야기한다.
그럼,그것이 꼭 즐겁기만 할까요?
그러니까 차라리
안 그래도 좋으니 건강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죠.
상황은 똑같지만
그 상황을 해석해야 되는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를 결정해야 되는 나의 상태에 따라서
그 상황은 전혀 다르게 해석이 되고
그 해석에 따라서 나에게 일어나는 감정은 달라지기 때문에
특정한 상황이 오면 나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든지
특정한 상황만 되면 내가 행복해질 거라든지 라고 하는
기계적인 판단은 불가능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한테 좋은 일이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정리하자면
객관적으로 언제나 어느 때서나 그런 감정을 일어나게 하는
A라고 하는 상황이 일어나면
반드시 a`라고 하는 감정이 일어나는 그런 식의 상황은 없다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해두고요.
두 번째는 그러면 상대적이잖아요.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정해진 감정 반응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다만 맥락
불교에서는 연기적인 관계라고 그러는데
연기적 결합에 따라서 맥락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 부분을 정확하게 평상시에도 기억하고 있으면
삿띠라고 하는 게
상황에 처해서 이런 상황의 본질을 상기한다, 기억해 낸다라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삿띠라고 하는 것이.
알아차린다는 게 뭡니까?
이것의 본성을 알아차린다는 거잖아요.
이것의 본성은 뭡니까?
정해진 것은 없고
내 상황에 따라서 내 감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이죠.
뭐 내가 기분이 좋거나 내가 컨디션이 좋으면
상대방이 조금 불친절해도 넘어갈 수 있지 않냐?
그리고 웬만한 일은 또 좋게 좋게 넘어갈 수 있지 않냐?
근데 내가 만약에 상황이 안 좋으면
별거 아닌 것도 내가 크게 반응할 수 있지 않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지나치게 무례하다면
나는 내가 아무리 컨디션이 좋아도 화를 낼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어느 정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라고 얘기를 할 수 있죠.
그런데 우리가 마음공부를 왜 합니까?
마음공부가 잘 되면
결국은 이것이 상대적으로 해석의 여지가 있다, 정도가 아니고
절대적으로 되어버리는 겁니다.
즉 바깥 상황이 나의 감정을 흔들 수 없게 되는 경지가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물처럼 좀 흐지부지, 흐리멍텅하게 되는 거죠.
‘그렇구나’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않을까?’
혹은 ‘그래도 이만한 게 다행 아닌가’라는 얘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멋있지는 않아요.
아주 강렬하지도 않고
하지만 물처럼 상황을 그렇게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물처럼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게 되면
웬만한 괴로움은 불가능하죠.
사라집니다.
그래서 굿 뉴스다, 좋은 소식은 뭐냐 하면
상황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죠.
뭐 어떤 이런저런 이유로 인연에 따라서 우리 앞에 닥쳐오죠.
그게 병이든, 돈 문제든, 인간관계 문제든,
하여튼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 또 가까이 일어나는 기상이변
상황은 내가 사실 어떻게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상황에 대한 해석은 달리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뉴스가, 굿 뉴스가 되겠죠.
왜냐하면 내 해석이 달라지면
내가 대응도 달라지고
대응이 달라지면
결과가 많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특히 가정에서 또는 친한 사람들끼리 다툴 수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다투고 헤어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칼로 물 베기처럼
다투어도 또 그다음 날 계속 이어져 가기도 하죠.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아웅다웅하는 것이
‘이게 행복한 나날들이었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해석이 달라지면 대응이 달라지고
대응이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져서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번뇌가 사라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해석하는 것은 남에게 의지할 수 없는, 의지해서도 안 되는
나만의 고유한 나의 권능에 속한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
주체적인 삶의 출발점이고
그런 사람만이 상황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불구하고
자유와 평안을 획득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이렇게 말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
눈 시퍼렇게 살아있으면
나는 내 인생을 살 수 있다] 라고 하는
뭐 뭐 때문에, 뭐 뭐 때문에, 뭐 뭐 때문에 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은
말을 해놓고 나서도
그렇게 기운이 나는 말은 아니죠.
어떤 경우에도 [해석]은 나의 것이고
[대응]도 그리고 그에 따라서 [결과]도 나의 것이다 라고 하는 것만
우리가 기억해도
대부분의 번뇌는 벗어날 수 있겠다
이렇게 말씀드리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덕마음공부] 붓다의 인과법과 연기법 (0) | 2023.12.19 |
---|---|
[현덕마음공부] 삼법인(무상, 고, 무아)과 유목민족의 가치관 (0) | 2023.12.18 |
[현덕마음공부] 마음의 자유로 가는 두 가지 길, 마음 해탈과 지혜 해탈 (0) | 2023.12.11 |
[현덕마음공부] 자아와 뇌 가소성 (0) | 2023.12.05 |
[현덕마음공부] 걱정, 고민 그리고 통찰 (0) | 2023.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