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일반 대중에게는 시계생천의 인과법을
사문에게는 무상, 고, 무아로 귀결되는 연기법을 설했다.
이른바 대기설법이다.
그것은 설법의 목적이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일깨움에 있기 때문이었다.
붓다는 위로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는 대신
통찰과 지혜를 일깨웠다.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서 시작해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주는 것이
붓다의 자비라고 하겠다.//
오늘은 붓다가 설법했던 내용이
때로는 인과법을 이야기했고
때로는 연기법을 이야기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붓다의 설법을 대기설법
그릇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설법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오늘날 마케팅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고객의 수준이나 고객의 니즈에 따라서 어프로치가 달랐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하고
그런 식으로 볼 수는 없고
일관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정당화가 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붓다의 일관된 목적은 오직 하나
‘나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붓다의 목적은 이고등락이죠.
중생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괴로움이 여의면 등락-기쁨이 되는 것이죠.
이고등락이 설법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고객한테 가 있죠. 중생한테 가 있죠. 괴로움을 겪고 있는.
그럼, 그 중생의 근기, 그 중생의 수준, 그 중생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중생의 언어로 끌어올려 줬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붓다에게는 일반 청중, 생활인인 청중도 있었고
또 아예 사문이라고 해서
모든 사회적인 관계를 단절하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진리에 헌신하는 구도자들의 집단
제자 집단이 있었지 않습니까?
이 두 쪽에 대해서 가르치는 중점이 조금 달랐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생활인에게는 뭐겠습니까?
설법을 통해서 이 사람들의 괴로움을 경감시켜주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야 되겠죠.
그럴 때는 이 사람들이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인과관계, 인과의 법칙을 얘기를 합니다.
즉 생활인들에게는 부다가 시계생촌을 이야기했거든요.
시계- 보시와 지계죠.
그러니까 남에게 베풀고,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생천-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도, 이번 생애에서도
생천- 천국 같은 마음이 생겨난다, 천국 같은 느낌 기분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베풀고, 나쁜 일을 하지 마라 라고 하는 것이
붓다의 기본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도 안 되면
청중들에게 줄 수 있는 실질적인 지침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베푼다라고 하는 것을
개념적으로 잘 알 수 있는데
‘나쁜 짓을 하지 마라’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법을 어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음살도망- 음행, 그다음에 어떤 살생
그다음에 주지 않는 데 가져가는 거, 빼앗아가는 거, 훔쳐가는 것
그다음에 여러 가지 말로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하고, 이간질시키고, 두 말하고
이런 음살도망이라고 하는 네 가지 나쁜 짓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마음이 천국처럼 편안해질 수는 없겠죠.
그렇게 해서 생활인들에 대해서는
인과법을 적용해서
‘네가 좋은 행동을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야.’
그래서 선인선과 악인악과라고 하는 인과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은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은
복잡하고 또 자본주의 사회니까 성공은 해야 되잖아요.
성공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있잖아요.
근데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은
‘그렇지만 사악하지는 않게’ 이런 거 아닙니까?
사악하지 않게 성공하고 싶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나의 몫이죠.
그렇게 해서 힘들죠.
그런데 어찌 됐든 그때 당시 2500년 전에도
생활인에 대해서는 너무 강한 요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보시와 지계 정도만 해도
‘네 마음이 혹은 그 이후에 많이 좋아질 거다’ 라는 얘기를 했죠.
반면에 진리를 찾아서 구도의 길을 떠나온 사문들에게는
붓다의 어떻게 보면 확실한 자기 목소리를 내어줍니다.
그래서 붓다가 원래는 사성제 팔정도 아닙니까? 그죠?
고집멸도- 멸도에 이르는 8가지 바른길
이렇게 해서 설법을 이렇게 했는데
그 팔정도의 시작이 정견 아닙니까?
똑바로 봐라. 사물을 똑바로 봐라.
사물을 똑바로 본다는 것은
붓다의 문법에서는 연기법으로 삼라만상을 보아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삼라만상에서 연기법을 발견해라
이런 말도 되겠죠.
그래서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모두 짝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연기법으로 보면은
모든 것은 조건이 만났을 때 이루어지고
조건이 해체됐을 때 사라지니, 생멸이죠.
생멸이 있는 것들은 전부 연기법에 속한다
이렇게 되어 있겠죠.
그래서 이 연기법으로 이야기하면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도 있을 수 있고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기쁨도 있을 수 있는데
이 둘 다, 어떤 조건들이 성숙해서 일어나는 일이고
이 조건들이 또 해체가 되면
이 기쁨도 슬픔도 사라진다.
즉 생멸은 무상하다 라고 하는 것이죠.
영원할 수 없다. 무엇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렇게 해서 무상을 이야기를 합니다.
무상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무상한 것은 좀 섭섭하잖아요.
이걸 영원히 가져 갔으면 좋겠고
또 안 좋은 일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왔다 갔다 하면서
끝없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이 상황을 우리는
아주 훌륭한 상태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불만족스럽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괴롭다 이렇게
그게 고죠.
그래서 무상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이 모든 것은 무아다.
그러니까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하기가 어렵다.
그 속에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죠.
나라고 하는 것은
울고 웃고 느끼고 하고 있지만
그것이 현상이고 현실이지만
그것의 본질적인 불멸의 영혼이라든지
세세생생 주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절대로 아트만,
그때 당시에 불멸의 영혼이라고 그 시대를 지배했던 사상이죠.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하기 어렵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붓다 연기법의 결론은 무아죠.
여기서 무아는 에고가 없다, 내가 없다 이런 것보다는
그때 당시에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시대 정신을 깨부셨던 것이죠.
그래서 붓다가 사상에서는 혁명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찾아 떠나온 구도자들한테는
무아론을 정확하게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오늘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는
일종의 개개인의 존재감 아닙니까?
그 존재감은 명함이라든지, 정규직이면 좋죠.
그다음에 특히 재산, 재산과 명함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의 존재감을 확인해 주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본질적으로는 필요 없다라고 이야기를 했으니까
굉장히 그때 당시로 보면
아나트만(= 無我)- 아트만이란 없어, 성립하지 않아라고 얘기했던 것은
굉장한 사상계에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은
붓다의 포석은 뭐냐 하면은
무상하고, 또 만족스럽지 못하며
영원한 영원불멸한 실체도 아닌 것에 대해서
우리가 굳이 집착할 필요가 있느냐 라고 격하시키는 겁니다.
해체한 다음에
조건에 따라서 생기고, 조건에 따라서 소멸한다라고 해서
현상을 해체한 다음에
어떤 것도 영원불멸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결론을 딱 내버림으로써
그다음 얘기가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거기에 굳이 집착할 필요는 없어’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걸 확실히 알게 되면, 체감하게 되면
사람들은 욕망에 대해서
욕망 자체를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걸 염오라고 합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다
진절머리가 난다 이거죠.
염오가 되면 그 욕망은 힘을 못쓴다, 빗바래진다.
그것을 이욕이라고 그럽니다.
욕망으로부터 점점 떠나게 된다.
이욕이 되고
그다음에 의욕의 끝에는 해탈이 있겠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이때 욕망은 욕망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탐진치, 우리 마음을 오염시키는 탐- 진- 치
이 세 가지 독심을 말하는 것이죠.
여기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마침내는 아까 붓다의 목적이 이고등락이라고 했잖아요.
고통을 없애는 거라고 했지않습니까?
이 괴로움의 완전한 제거인 열반, 니르바나를 이룰 수 있다
이렇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시 사람들은
사문들이 들었던 설법은 이런 종류의 설법이었죠.
그래서 붓다가 고통을 제거하는 방식은
대단히 인식론적으로는 지적인 방식이었죠.
왜냐하면 사물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집착이 사라지고
그때야 비로소 자유가 온다라고 하는
지혜가 심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라고 하는 얘기를, 그 설법을
붓다가 사문들에게 제자들에게는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활인과 구도자들에게 하는 설법이 달랐다.
달랐다기보다는 생활인에게는 좀 순한맛으로
그다음 사문들에게는 조금 제대로 된 매운맛으로 설법을 했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대기설법이 정당화되는 것은
한 입으로 두 말한 것이 아니고
목적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모든 중생, 내 밑에 들어온 제자 몇 명이 아니라 모든 중생에게
고통을 경감시켜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수준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을 해주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업경영으로 치면
연구개발 부서는 장인의 정신으로 연구개발만 하지 않습니까?
근데 그 경영자 입장에서는
이것을 어디다 쓸 것인가라고 하는 시장개척, 수요개척
그렇게 보면은 보급형 제품도 만들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관점에서도 되게 열심히 했다.
그래서 보통 진리 속에 안주하면서
말을 하자면 진리 속에 안주하면서
고고한 진리를 누리는 이런 것보다는
이런 말이 있죠.
‘자비는 열반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자비심 때문에
‘중생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덜어주겠다’라고 하는 자비심 때문에
어찌 됐건 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법을 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나중에 육바라밀 중에 보시와 지계로 바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승에서는 나중에 그 보시와 지계가 육바라밀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매김을 하는데
사실은 육바라밀은 6개를 다 닦는 게 아니고
한 개만 제대로 닦아도 건너간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때 보시와 지계는
매우 대단히 관념화되고 추상화되고 또는 고급화되고
이렇게 해서 이 보시를 행하는 것조차도
어마어마하게 작은 일이 아니고
이것만 제대로 하더라도 우리는 생사의 강을 건너갈 수 있다
이런 정도로 승화되긴 합니다.
어찌 됐건 초기에 소박한 불교의 출발점에서는
붓다께서는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라
그리고 심한 짓 하지 마라
이 두 가지를 제시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사성제 팔정도의 근간이 되는 연기법
그다음에 욕망의 빛바랜 해탈
이런 것들을 가르쳤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덕마음공부] 문제 해결과 마음공부 (0) | 2023.12.26 |
---|---|
[현덕마음공부] 나는 누구인가? (0) | 2023.12.25 |
[현덕마음공부] 삼법인(무상, 고, 무아)과 유목민족의 가치관 (0) | 2023.12.18 |
[현덕마음공부] 감정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당신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0) | 2023.12.12 |
[현덕마음공부] 마음의 자유로 가는 두 가지 길, 마음 해탈과 지혜 해탈 (0) | 2023.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