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그 속성에 대한 지식은 적다.
마음에 원하는 것(소원, 집착)이 있으면 자유는 없다는 것이 원리다.
그런데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성공하는 것을
자유의 신장이라고 생각한다.
불경에서는 심해탈과 혜해탈로 자유의 길을 제시한다.
둘 다 욕망으로부터의 떠남(이욕)이 전제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한 노력이 번번이 좌절되는 이유는
집착하며 또한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다.
둘은 양립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유일한 길이다.//
오늘은 자유에 관한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 자유를 이야기할 때 두 가지 길을 제시 합니다.
-마음에 의한 자유
-지혜에 의한 자유
이렇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자,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우리가 자유를 누구나 원하지만
사실은 정확하게 자유가 뭔지에 대해서, 그 속성에 대해서, 구조에 대해서
정확하게 관찰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유를 원해서 하는 행동이
오히려 더 자기 자신을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이죠.
예를 들면
돈이 있으면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돈을 열심히 추구하는 행위 자체 속에
벌써 자기는 엄청난 부자율을 경험하는 것이죠.
그래서 심지어 돈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자유롭다고는 느끼지 못하는
나중에는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또 돈이 자기를 구속하는
이런 걸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다행히도 못해봤습니다.
자, 그래서 자유의 속성을 보면 핵심은 이거죠.
뭐가 있으면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죠.
Don't care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 상관 없어야 사실은 자유로운 것이죠
몸이 아니라 마음이
그래서 내가 마음에 뭔가를 이렇게 끼고 있으면, 딱 붙잡고 있으면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부자유스럽지 않습니까?
근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거라고 믿는 것들이 몇 개 있잖아요.
돈, 건강, 명예라든지 혹은 행복하게 되는 사랑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자유롭게,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게 있고
그리고 그런 것들을 꽉 붙잡고 있습니다.
혹은 미래의 획득하기 위해서 추구하고 있죠
노력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자유라고 하는 것은 걸리는 게 없어야 하는데
우리는 돈, 사랑, 명예, 건강에 다 꽉 붙잡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걸려 넘어져 있는 것이죠.
족쇄가 채어져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족쇄의 길이를 조금 늘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얘기를 본질적으로 해보는 겁니다 .
그래서 자유라고 하는 것은 걸림이 없는 상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무장무애, 그 말은 뭡니까?
내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극복할 수 있다거나
모든 것을 다 깨부술 수 있는 울트라 뭐 슈퍼맨이라든가
이런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내 마음속에서 집착하고 있는 것이 없다
이런 거잖아요.
근데 우리 지금 현대문명인들의 생활은
집착 없이 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조건은
매우 집착하라, 그 다음에 영끌하라
영혼을 다 바쳐서 뭔가 이루려고 노력하라
이런 거를 요구하는 그런 시대여서
그래서 악세다. 힘든 시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자유[라고 하는 것을 정의하기를
[마음속에 걸림이 없는 상태]다
이렇게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불경에 보면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이렇게 되죠.
심무가애- 마음에 걸림이 없고,
무가애고- 걸림이 없음으로
무유공포-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서
원리전도몽상- 우리가 돈, 사랑, 명예, 건강이라고 하는
생명이라고 하는 그런 그 전도된 뒤집어진 몽상
꿈과 같은 허망한 생각으로부터
원리- 멀리 떨어져서, 벗어나서
구경열반- 열반을 구현한다, 또는 궁극의 열반을 성취한다
이렇게 문장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포인트는 뭐냐하면
무소득고 무가애
이렇게 되는 것이죠.
얻을 게 없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게 없다
이것이죠.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저 자신도
“진짜 걸리는 게 없어?”
너 지금 건강이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너의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가족에 문제가 생기면
네가 당장 다음 달부터 소득 절벽이 되어서 잘려서
직장에서 짤려서 소득 절벽이 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쉬운 건 아니죠.
하지만 이치는 분명합니다.
무소득고- 얻을 게 없다, 얻을 만한 것이 없다.
돈, 명예, 사랑, 건강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나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비로소 심무가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다, 이거죠.
그냥 거꾸로 가면 안 됩니다.
마음에 걸린 게 없어야 되니까
난 다 포기, 다 포기
이렇게 해도 그게 안 되죠.
그래서 그런 거는 그냥 생각의 장난이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왜 하느냐?
궁극적으로 나에게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렇지 않은 것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깨닫는 데 있는 것이죠.
우리들이 생각하는 소박한 행복, 작은 행복이라고 하는 것 중에는
맛있는 커피를 한잔 마시는 것도 있지만
저도 커피 좋아합니다마는
실제로는 ‘내 돈 내 산’ 이런 것이죠.
내가 원하는 게 있는데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돈을 벌어서
내 돈으로 그런 것들을 즐기면
그 정도 살 만한 인생 아닌가?
이런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소박한 자유, 소박한 행복
그리고 그런 것들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면
삶이 좀 두터워진다, 삶이 좀 더 향상된다 라고 하는 것을 느끼니까
그건 좀 행복할 것 같다, 굿 필링
이런 정도가 우리가 바라는 것입니다.
근데 잔혹 동화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이 좌절당하죠.
그러니까 이게 노력만으로도 좀 안 되는 것 같고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시 불경에서
자유로 가는 두 가지 길을 찾아볼 수밖에 없는데요.
그 첫 번째 길이 심해탈입니다.
즉 마음으로, 심리적으로 해탈하는 겁니다.
해탈은 벗어나는 거 아닙니까?
그 메커니즘은 이렇게 돼 있죠.
무수하게 반복되는
사랑에 배신당하고 믿었다가 발등 찍히고
이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무수하게 현실로부터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다 좌절되어 보는 겁니다.
좌절되죠. 가만히 있어도.
그래서 반복되는 고통을 통해서 지혜가 관점이 생기는 겁니다.
‘이건 진짜 징글징글하다, 질린다, 진짜 그만하고 싶다, 마이 했다 아이가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거를 염오라고 합니다.
염증이 나고 그래서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염오
이때 염오는 어디까지 가는가 하면
나쁜 것도 나쁜 거지만은
시험에 합격하고, 사랑에 성공을 하고, 창업을 하고
IPO해서 엄청난 돈을 벌고 이런 모든
우리가 좋다라고 하는 것들이
결국에는 좋은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까지 가면
모든 것에 대해서 염오를 느낍니다.
그러면 싫은 것도 버리고, 좋은 것도 버려지는 정도의 염오
염증이 나고, 싫어하는 마음이 꺼려하는 마음이 이렇게 생기면
그때 비로소 이욕이 된다는 거죠.
자연스럽게 욕심 욕망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욕 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마음심이 붙은 慾욕이 있고
-또 하나는 없는 欲욕이 있습니다.
없는 유혹은
마음이 없이 하고자 할 욕은 약간 생리적인 욕구나
우리가 볼 때 그렇게까지 우리의 심리적인 왜곡을 일으키지 않는 욕구고
-그다음에 마음 심자가 붙은 慾욕자는
약간 탐욕일 수도 있고 망상일 수도 있는 그런 욕망이죠.
어찌 됐건 진절머리가 나야 싫어지고
싫어져야 “됐다, 니 먹고 떨어져라, 나는 안 한다” 이렇게 해서
이욕, 욕망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겁니다.
그다음에 오는 단계가 해탈
그래서 “나는 벗어났다. 자유롭다. 아무것도 나를 묶을 수 없다.
심지어는 이것이 좋다, 이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하는 것으로도
성공, 돈, 명예, 사랑 이런 것으로도
나를 묶을 수 없다”라고 됐을 때 이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그럼 이건 심리적 과정이죠.
이건 심리학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냥 마음의 해탈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근데 그렇게 꼭 무수하게 고통을 반복하고
근데 고통을 반복하기만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영원히 어둠에 잠겨 있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 고통에서 뭐랄까 통찰을 일으키는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근데 불경에서는
그 고통에서 통찰을 일으키기지 시간을 압축해라
그건 뭐냐 하면 지혜를 개발해라.
지혜를 개발하는 건 뭐냐?
그건 이런 프로세스입니다.
첫 번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그렇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다 자기 관점으로 사물을 보니까
그래서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고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다
어디서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있는 그대로 보자’ 라고 하는 것을 개발하는 것이죠.
있는 그대로 보면 뭐가 보이는가 하면
연기법이 보인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이게 불교적인 생각인데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세상의 만물이 나를 포함해서
인연이 만났다가 인연이 헤어지는 것
인연이 만나지면 생이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다.
그래서 생멸 또는 생사
이것을 이합집산 이렇게 보는 것이죠.
이합은 떨어졌다가 붙었다 하는 것이고
집산은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만물이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인연이 이렇게 만나면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흩어지면 없는 것처럼 보이니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이게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이런 대칭 상태에 있다라고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연기법이 관찰된 사실로 인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연기법을 사실로서 관찰하게 되면
거기서 하는 추론되는, 필연적으로 논리적으로 귀결되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첫 번째는 무조건 [무상]하다는 것이죠.
다르게 이야기하면
모든 것은 이 합집산의 파노라마이기 때문에
변화의 와중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의 것이 세상이라거나 나라 거나라고 하는
정해진 혹은 고정된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귀결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고정된 정체성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아죠.
이 무아라고 하는 것을
‘너는 헛깨비야’ 그렇게 하면 미치는 거죠. 사람이.
그럼 ‘나는 뭐지? 나는 완전히 미쳐버리겠다’ 이건데
아니 그게 아니고
어느 시점의 인연이 합쳐져서 어느 시점에서 네가 이렇게 되어 있지만
또 다른 시점 다른 장소에서는 다른 인연으로 합해져서 또 다른 모습을 띨 수도 있기 때문에
정해져 있는, 고정불변 된 영혼불멸의 어떤 특정한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오늘 뭐가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해도
이번 생일에 내가 망한 건 아니잖아요.
나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순간순간 재구성되는 하나의 임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이 나의 절망을 막아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패자부활전이 아니고
순간순간 새로운 우주가 펼쳐진다
이렇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혜를 통한 통찰이라고 하는 것, 명상을 한다는 것
아니면 마음공부를 한다라고 하는 것은
고통 속의 통찰을 압축해서
“야, 세상만사를 봐봐
보면 팩트가 뭐야?
팩트는 이합집산의 파노라마라는 거야.
그럼, 거기서 영원한 것도 없고
영원한 정체성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너는 마음이 편안해질 수가 있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연기법이 무상과 무아를 논리적으로 품고 있으면
그러면 거기서 어떤 것들이 나의 것이고
내가 틀어쥔 것이 영원해야 된다라고 하는 내 마음속의 욕망은
사그라든다 이거죠.
그 욕망이 사그라드는 것이 이욕
욕망으로부터 떠나는 것이고
그것이 해탈
그리고 이런 과정들을 이해하고
해탈지견- 그런 지혜가 생긴다.
남에게 설명해 줄 수도 있고
남을 어떻게 보면 도와줄 수도 있는
그런 지견이 생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우리는 자유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고
자유가 매우 부족하다라고 느낍니다.
그것이 밖으로부터의 억압인지 스스로 묶어놓은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죠.
그래서 휴가 날을 정해놓고 비행기표를 끊어놓고
그때까지 숨도 안 쉬고 잠수하는 것처럼
그때까지만 버티자
이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삶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우리는 잘 사실 모르잖아요.
근데 어쨌든 그렇게 빡빡하게 살고는 있습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원하는 것도 얻고 또 동시에 자유롭고도 쉽고
이런 것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그런데 그거를 되게 교묘하게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자
혹은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서 시간이 많은 부유한 백수가 되자
이런 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내가 다 포기하고, 요거 하나는 포기 못한다라고 하는 그거 하나 때문에
나는 내 마음은 완전히 족쇄에 묶일 수 있는 것
그것이 마음의 법칙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마음에 있어서는
누칼협, 누가 칼을 들고 협박한 건 아니죠.
다 스스로 자기 마음의 감옥에 갇히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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