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위로가 되는 空의 세 가지 이미지

Buddhastudy 2024. 10. 7. 19:38

 

 

을 너무 높이 보면 현실에서의 활용도가 떨어진다.

공이 가진 세 가지 이미지가 괴로움의 경감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외로움과 고통스러운 상황과 삶의 무의미 앞에서

우리가 공의 이미지를 떠올림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외롭다고 느낀다면 물방울과 물의 이미지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서는

구름 아래의 비바람과 구름 위의 늘 빛나는 태양을 떠올림으로써

그리고 삶이 허무하다고 느낄 때면

온갖 비바람, 눈보라, 천둥 번개에도 지나고 나면

언제나 텅 비어있는 허공을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위로를 받고

나아가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공을 생활로 끌어내려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삶에 도움이 된다.//

 

 

오늘은 위로가 되는 의 세 가지 이미지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의 정수]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로 실생활에서 공을 어떻게 끌어다가

우리의 이고득락, 괴로움을 여이는데 활용할 수 있을지를

잘 알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을 너무 추상적으로 어렵게 생각하면

좋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 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공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여러 가지 괴로움에 처할 때에 위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은

외롭다든지 고독하다 이런 거 있지 않습니까?

-외롭다는 것은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외로운 거고

-고독은 주변에 사람이 있더라도 홀로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때

고독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죠.

우리는 인간은 어찌됐건 던져진 존재로서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 다 외롭고 고독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공의 이미지로 보면 착각일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착각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을 좀 드러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우리는 나라고 할 때

그것은 이 피부 안쪽, 그 안쪽을 말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은 a skin deep라고 그럽니다.

피부를 경계로 해서 밭과 안이 구분되고

그 안을 어떻게든 유지하고 발전시키고, 번식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우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그 시작은 경계를 구분하는 겁니다.

나와 나 아닌 것

 

그래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이 경계라고 하는 것이

우리 괴로움의 출발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종착지도 경계를 허무는 데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양자역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입자)일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경계와 경계의 부딪힘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괴롭다.

(파동)일 때 우리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경계 없음, 무경계에 처하게 되고

그러면 괴로움은 없어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그림으로 이미지로 한번 보면 이런 겁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

물방울이라고 생각하는 물이다.

우리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경영해 나가는 우리는

물방울처럼 느껴지죠.

이 물방울이 경계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물방울이 짧게 튀어 올랐지만

다시 떨어져서 이 파동을 그리는 물이 되어버리면

물방울의 경계 자체는 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괴로움은

경계, 가장자리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외롭다고 느끼든, 괴롭다고 느끼든, 고독하다고 느끼든

삶을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그 삶을 느끼는 우리의 작용은

경계 안에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공의 한 측면이 무아거든요.

무아이기 때문에 공하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특히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낄 때

우리는 물방울이라고 생각하는 물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 물방울을 이미지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살다 보면 되게 어렵고 고통스럽고

단계적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정말 힘겨운 상황에 직면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 힘겨운 상황에 직면해서

우리가 용기를 잃지 않고 또 멘붕에 빠지지 않아야 되는데

그럴 때 또 위로가 되는 공의 개념은 이런 것입니다.

 

지상에 있을 때

이거 제주도 같은데요.

지상에 있을 때

구름 밑에 구름이 모여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날이 궂고

날이 궂은 날씨에는 또 몸도 안 좋죠.

컨디션도 안 좋고, 운전하기도 어렵고

모든 것이 질척거리고, 옷도 젖고

잘못하면 감기도 걸리고

이런 아주 나쁜 상황이

사흘 내내 비가 내린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죠.

 

하지만 제 경험인데, 제가 처음에 비행기를 탔을 때

첫 번째 비행기 여행이 마침 비가 오는 날이었습니다.

근데 비행기를 탔어요.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뜨나 싶었는데

비행기가 이륙을 해서 하늘로 올라가서 높이 올라가니까

어떤 게 펼쳐지는가 하면

이런 게 펼쳐졌습니다.

비행기 여행을 해본 사람은 너무나 잘 아는 그림이겠죠.

그래서 차창 밖으로 봤는데 이게 펼쳐지는 거예요, 이 그림이.

그럴 때 저는 충격을 받았죠.

 

왜냐하면 첫 비행기 유행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 땅 위에서는 이렇게 비바람이 불고, 궂은 날씨인데

구름을 박차고, 구름을 뚫고 올라갔더니

이렇게 하늘에 태양이 늘 빛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제가 직접 비행기를 타서 보니까 실감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다시 인문학적으로 되새기면

우리가 지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이라고 하는 것도

또한 하나의 현실이고

또 그 구름 위로 올라가면 태양이 늘 빛나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현실이다, 사실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태양은 상대적으로 영원히 변치 않게 빛나고 있는 반면에

그 밑의 구름과 이런 것들이 만들어낸 바람이 만들어내는 날씨는

천변만화하니까

대단히 자주 변하겠죠.

이렇고 저렇고 하겠죠.

그래서 이 차이가 있구나.

 

근데 요는

우리가 구름을 뚫고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비행기의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느냐?

이런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중요한

...

 

비록 비가 오지만

구름 위에는 늘 빛나는 태양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까먹지는 않거든요.

그건 대단히 충격적이기 때문에 잊혀지지가 않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도 현실이지만

이걸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구름 위에는 늘 태양이 빛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그 인식 또한 같이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지 그것이 여러분을 위로해 주고, 힘을 준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세 번째는

긴 인생을 보고,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열심히 살았는데

근데 삶이 여전히 의미가 별로 재미는 물론이고

삶의 의미가 뭐지?

허무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허물을 느낄 때에도

이 공의 이미지가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하늘을 보면

천둥번개가 칠 수도 있고요.

또 파란 하늘에 구름이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면서

이거는 뭐 곰 같다, 이거는 강아지 같다, 이거는 배와 같다

이런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구름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기도 하고요.

 

또 흰 구름이 아니라 먹구름이 층층이 쌓여서 어두컴컴해지기도 하죠.

그리고 또 눈보라가 쳐서 앞이 잘 안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하늘의 날씨는 천변만화

종잡을 수 없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죠.

그냥 텅 빈 하늘이 있을 뿐이죠.

마치 스크린에 드라마가 상영되듯이, 동영상이 상영되듯이 그렇게 보입니다.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이거를 우리는 거꾸로 생각해 보자 이거죠.

 

그렇기 때문에, 스크린에 아무 자국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동영상도 상영해서 즐길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나 가능한 것이 하늘에서의 어떤 그림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우리 인생도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에

또 새로운 하루, 새로운 한 달, 새로운 1년이 의미가 있어지는 거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보통 이런 거를

불교에서는 텅빈충만 진공묘유, 이렇게 이야기...

진공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없는 게 아니라, 없기 때문에, 비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밥상을 차리면 식당이 되고

이불을 깔면은 진실이 되고

책상을 놓으면 학습하는 공부하는 곳이 되고

찻잔을 놓으면 거실이 될 수 있다

이런 의미가 될 수 있는 거죠.

 

그것은 정해져 있지 않고, 고정되어 있지 않고,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공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이런 오묘한 양면을 다 가지고 있는 공을

진공묘유다,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에서 비추어 보면

우리가 삶을 이해할 때

가장 유사한, 근사한 모습은 드라마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드라마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보는 사람의 가슴을 졸이고

손에 땀이 나게 하지만

그리고 그 연기하는 배우들은 너무나 실감나게 진짜인 것처럼 연기하지만

진짜인 것 같은 가짜잖아요.

또는 가짜인 것 같지만 너무나 생생하잖아요.

이것이 삶의 이중성, 삶의 양면성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

그다음에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리고 외롭거나 고독하다고 느꼈을 때

공이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이미지를 끌어와서 생각을 해보면

위로가 되고, 괴로움이 낮아진다

이렇게 제안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세 가지 이미지로 본 공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

이런 주제로 여러분과 나누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