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이란 선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선이란 하나로 보이는 것이다.
나와 세계,
좋은 것과 싫은 것으로 구분되고, 갈라지고, 대립되는 것들의 종식으로 얻어지는
번뇌의 종식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길이다.
여래선, 조사선, 화두선, 염불선, 물조선 등등의 여러 갈래가 있지만
방법론이 중요하지 않으며
단지 분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전부다.
장좌불와와 용맹정진은 잊어도 되며
하안거와 동안거의 결제와 해제는 생활인에게는 의미가 없다.
24시간 참선에 있어야 한다.
참선에의 접근은 더욱 쉬워졌다.
마음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오늘은 참선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에 요즘 국제선 명상 대회
이런 것들이 광화문에서 열리고
그렇게 해서 ‘참선’ 이런 부분에 대한 관심도 있고
그다음에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조계종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해서 선불교 아니겠습니까?
물론 종합적이지만
선불교라고 하는 것을 다는 몰라도
선불교가 참선이라고 하는 방법론을 핵심으로 한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죠.
그런데 ‘참선한다’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것은
하한거 동안거, 해제법문 결제법문 이런 게 있고
그다음에 화두, 용맹정진, 장좌불와, 10년 결사
이런 되게 용맹하게 뭔가 정진하는 그런 것도 떠올려지고 합니다.
그래서 선불교라고 하는 것도
이름이 다양하고 내용도 많죠.
그래서 조사선이냐 화두선이냐? 염불선이냐? 묵조선이냐?
다양한 선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선농일치, 선다일치 이런 얘기도 있고 하니까
참선에 대해서 조금 이해를 하는 것은
마음공부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는 선나 또는 디아나라고 하는 당연히 인도 말이겠죠.
뜻으로 풀이하면 정려
이렇게 정려라고 하는 것은 정밀하게 생각한다는 거잖아요.
또 사유수, 사유 생각을 닦는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사유수라는 얘기는
생각을 깊이한다거나 골똘이한다거나 밤새워서 한다거나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자기 생각을 생각한다
요즘 같으면 메타인지의 그 의미에 오히려 더 가깝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생각을 생각한다
또는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닦아 나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은 이 생각을 닦아서 어떻게 된다는 거냐?
그건 또 선나라고 했는데
나자를 빼버리고 ‘선’이라고 하고
그 선을 한자로 표현한 게 선 禪, 아닙니까?
그래서 선 자를 보면은
홑 단單, 보일 시示를 결합한 거거든요.
홑 단單, 보일 시示를 연결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로 보인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내 눈에 나와 세상이 둘로 보이거나
더 좋은 것과 더 안 좋은 것이 있고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밀어내는
이런 어떤 둘로 쪼개진, 둘로 쪼개진 세상으로 사물이 보인다면
그것은 아직 선이 아니다.
/그럼 선은 뭐냐?
하나로 보이는 것
즉 더 좋은 것과 더 안 좋은 것으로
나와 세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 분별되지 않는 것
이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또 요즘 말로 하면 As is하고 To be일 수도 있고요.
심리적으로 보면
되고 싶은 것과 지금 현재 나의 상황
차이가 없다, 하나다 이런 뜻도 되겠습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인도의 명상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고
소리로 번역한 것이 선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하나로 보인다.
즉 분별하지 않는다, 구별하지 않는다.
분별과 구분으로 인한 번뇌와 갈등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선불교라고 하는 것은 초기불교, 아비달마 불교, 그다음에 대승불교
대승불교도 여러 가지가 있죠.
대승불교에 중관불교, 유식불교
그 뒤에 말이 너무 많다.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 읽어서 될 일이 아니다라고 해서
선불교의 주창자들이 나오고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거기서 반야심경과 금강경에도
이미 그런 요소들을 충분히 아예 드러내놓고
이 선불교의 사상이 이미 거기 풍부하게 녹아 있죠.
그래서 반야심경은 보통 법무아
무아이지만 인무아 뿐만 아니라
법도 또한 자성이 없다, 본성이 비어 있다라고 하는
법무아를 주장한 것 같고요.
금강경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모든 이미지, 모든 개념, 모든 언어로 도달할 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인무아와 법무아
그러니까 아공, 법공, 필경공을 확인해 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
그래서 선불교를 주창하는 조계종의 소의 경전에
가장 의지하는 기초 경전이 금강경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이고
금강경의 핵심도
나와 세상으로 보는 것, 이것과 저것으로 보는 것을 깨고
어떠한 언어나 이미지에 닻을 내리는, 머무르는 것도 불허하는
그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라고 하는 것은
초기 불교하고 똑같은데
원래는 거기서 끝나야 되는데
색과 공이 그런데 다르지가 않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인 공, 법신, 여래, 불성 이런 것들이
뭔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현상 속에 함께 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그런 것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해놓고
수상행식 역부여시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색수상행식 중에 색이 그러하니
수상행식도 다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것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마라
신경을 쓰지 마라라기보다
거기에 너무 집착하면 법집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뒤에 쭉 나오는 것이
사성제, 팔정도, 오온12처18계, 12연기
이런 것들을 다, 공중, 공이라고 하는 눈으로 보면은
그런 것조차도 없다
거기를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초기불교에서 나온 대표적인 불교적 세계관에 대해서도
사실은 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걸 부정하는 거냐?
논란이 있을 수 있는데
부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법집을 경계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다음에 또 무지역무득이라고 그랬거든요.
알 것도 없고
그러니까 지혜라고 하는 것도 없고 .
지혜라고 하는 게 있으려면
지혜롭지 않은 것이 있어야 되는데
이렇게 또 갈라지는 것 그것도 인정 안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역무득, 얻을 것도 없다
이게 중요한 것이죠.
그러니까 진리를 얻었다, 또는 나는 진리를 깨달았다라고 하는 문장 자체를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문제가 있는 거다.
내가 있고, 나와 세상으로 갈라져 있고
진짜와 가짜로 갈라져 있다 하는 것을 내가 인식했다
이런 것 자체가
대단한 문제적 상황이다.
‘아니다’ 라고 부정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불교의 목표가 이고득락인데
이고, 괴로움을 여이고
득락 기쁨을 즐거움을 얻는 것인데
이 문법도 틀린 것으로 보는 것이죠.
왜냐하면 괴로움과 낙이라 고와 락이라고 하는 것을 구분할 수 없다.
구분하는 것 자체가
또 이분법에 걸려드는 것이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로 보는, 구분하지 않고
즉 평가하고, 차별하고, 취사선택하지 않고 보는 그 눈이 뜨여야 된다.
그게 심안이고 혜안이고 불안이고 그렇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금강경을 잠깐 보면
이 금강경에서도 역시 아공, 법공, 필경공이
공에 대한 풍부한, 그리고 엄정한 해석을
해석이라기보다 권유를 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금강경에서 이미지나 개념이나 언어를 다 깨고
그 ‘이름이 그런 것이지 실체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 몇 가지 정리해 보면
첫 번째는
‘진리의 삶을 산다’라고 하는 모습을
금강경에서는 그냥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죠.
그래서 아침에 붓다가 때가 되어서
옷 갈아입고, 그다음에 밥그릇 들고 가서 밥을 빌어 와서 식사를 앉아서 하고
그다음에 손 씻고 발 닦고 앉아서 좌정해서 명상에 드는 것
요 일상생활을 그대로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고
아까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도 일체고액 거기서 끝난 것처럼
그냥 밥 먹고 앉았다.
여기서 사실은 금강경 전체가 끝나버렸다.
보여줄 거를 다 보여줬다.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로
진리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아니고, 글이 아니고, 이런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귀절의 마지막에 가부이좌_ 이렇게 다리 꼬고 앉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리고 그 뒤에는 좀 쉬려고 소화시키려고 앉아 있는데
수보리라고 하는 혜공제일_ 공을 잘 해석한
머리 좋은 수제자가 질문하는 형태로 금강경을 풀어나갑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생각을 잘근잘근 깨주는 쪽으로 가는 것이죠.
그것 역시 아공법공_ 아도 공이고, 법도 공이다, 필경공이다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생이라는 건 없다. 네가 왜 중생이라고 생각하냐? 다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니까
상당히 언어를 많이 깼습니다.
두 번째는
아까 아공_ 무아를 이야기했는데 또 한 번 되게 강조합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모든 상, 이미지,
그러니까 여기
-아상은 아트만이거든요.
-인상은 보트칼라 이래서 윤회할 때에 재생연결식 이런 거고
-중생상이라고 하는 것도 뭐죠?
깨닫지 못한 중세니까 이것도 구분되는 거 아닙니까?
-수자상은 영원히 세세생생 자기의 지은 과보를
플러스마이너스 플러스 마이너스 하면서 영원히 이어진다라고 그런 생각들이니까
하여튼 뭐가 죽으면 그만이 아니라 뭐가 있어야 되지 않아? 라고 하는
뭐가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에 대응하는
이런 혹은 저런 자아상, 자아개념을
그걸 상이라고 해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지금은 AI라든지, AI를 뇌에 이식한다든지
그거를 다른 사람한테 카피한다든지, 로봇에 심는다든지
이런 것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뭐가 있다, 주체가 있다, 이런 것들과 관련된 모든 아이디어는
다 배척한 것이죠.
그래서 그런 거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원히 깨달을 수가 없다
진실을 볼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세 번째 중요하다고 보는
금강경에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멸도와 관련된 거죠.
중생구제
아까 상구보리 하화중생 아닙니까? 그죠?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
또 이게 또 대승에서는 보살사상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살사상의 핵심은 뭡니까?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난 뒤에야
내가 성불 하겠다,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그걸 완전히 정면에서 깹니다.
“중생이 어디 있다고? 니가 뭘 구제한단 말이야?”
뭐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처음에 고등학교 때 금강경을 읽었을 때
내가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고 서원을 세우고
그걸 다 행하지만
사실은 이것도 동시에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한 사람도 제도하는 중생이 없다 라고 하는 것도 내가 알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그래서 그때 저는 이거를 유교적인 겸손으로 받아들였죠.
이거 엄청 겸손한 건데, 그 최강의 겸손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여기는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사실은 위대한데 위대한 겸손한 척 그런 게 아니고
“원래 중생이라는 게 없는 거야. 네 개념 속의 일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보살의 이상을 행하되
그 이상에, 그 이론에, 그 개념에 붙잡히지 말아라 ”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좀 혼란스럽죠.
어떻게 하라는 얘기야? 이런
그러면 그때 이런 얘기하는 거죠.
응무소주 이생기심
“머무르지 말고 마음을 내라고, 머무르지 말고 행하라고 ”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한다는 의식 없이 해라” 이런 얘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종합하자면
금강경에서는 언어로 표현된 진리에 대한 어떤 내용도 말일 뿐이고
계속 그게 반복돼서 나옵니다.
그게 말이 그렇지,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얘기가
계속 나오면서
언어의 자기 부정을 반복합니다.
지루하도록 반복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법공을 확실히 못을 박는 거죠.
그래서 법공의 혹은 아공의 핵심적인 내용이
자성이 없으며
얻을 것이 없으며
그다음에 어떠한 이미지도 세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무상, 이미지가 없으므로
무주, 그 이미지에 머무를 수가 없고
무언, 어떤 것도 바랄 필요가 없다, 바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에서
이렇게 고구정녕하게 개념을 깨주죠.
“내가 도를 닦고 있다. 내가 도를 얻었다. 내가 도를 얻어서 사람들을 구제한다.”
이런 개념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개념이고, 위험한 생각이고
그런 생각 자체가 대 망상이다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꼭대기를 완전히 따버립니다.
그렇게 한 것을
아공, 법공, 필경공을 그러면은 책을 갖고 할 것이냐?
아니면은 무슨 단전호흡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절을 3천 배, 만 배를 할 것이냐?
사경, 경전을 베껴서 또는 염불을 해서
어떤 것도 올바른 방법인 것 같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
선불교의 판단입니다.
이 내용을 그럼 어떻게 구현하지? 라고 했을 때
그 방법을 찾는 것은
또 하나의 미망이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선불교의 입장이고
더군다나 이거를 좀 지적으로 접근하는 것
그다음에 교학으로 접근하는 것
이런 것은
아무리 밥에 대해서 얘기해도 그걸로 배가 부를 수는 없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선불교의 핵심은
조사선이냐 화두선이냐 염불이냐 묵조냐
잠 안 자고 10년간 장좌불와를 하냐
이런 거하고 전혀 상관이 없고
[참선], 그러니까 [선에 참여한다]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선에 참여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방법이 없는 겁니다.
‘방법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결과에 대해서 그냥 쳐다본다는 겁니다.’
그 결과는 뭐냐 하면은
분별로부터 벗어나는 거잖아요.
정확하게는 분별로부터 벗어난다고 잘못 이야기하면
정신줄을 놓는 걸로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고
다 판단하고 구분할 수 있지만
그것에 심리적으로 이끌려가지 않는다.
거기에 끌려가서 휘둘림을 당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고
이것은 12연기에서 그대로 나타난 것이죠.
12연기도 연기법의 촉-수-애-취-유 그다음에 생-로-병-사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접촉하게 되면 뭔가를 접촉하게 되면 느낌이 있고
그 느낌이 좋으냐 나쁘냐라고 구분되고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는 이 취사가 일어나면
이미 뭐가 생겨난 것이다.
그게 유잖아요.
그래서 그 유가 되면
인생연기, 그 원인에 의해서
즉 애취에 의해서 유가 생겨나고
그것이 어떤 계기가 되면 일어나는데 그것이 생이다
그래서 생을 받으면
노병사, 이렇게 자연스럽게 우리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개가 된다
이렇게 보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참선이 선불교가 초기 불교와 다를 게 하나도 없고
오히려 초기 불교를 더 생생하게 되살리기 위한 방편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분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12연기에서
촉-수-애-취-유, 이 과정을 단절을 시킨다, 끊어낸다 라고 하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말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결론을 내자면
나와 세상이 따로 있다고 느껴지면
나라는 것이 어떤 피부 안쪽을 나라고 하는 것이 느껴진다면
이거는 아직 선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두 번째는
심리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고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리려는
이런 마음이 작용한다고 하면
또한 여전히 선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오늘 하나를 외운다면
참선 선,한 자인데
그 글자의 핵심은
홑 단單, 보일 시示
-그러니까 두 개로 보이지 않고 하나로 보인다.
-이것과 저것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심리적으로 보면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고
그걸 취하고 버리는
이런 것이 모두 다 뭐가 되겠습니까?
번뇌와 갈등의 근본이 되는데
이런 심리적인 정신적인 과정이 소멸하게 됨으로써 얻어지는 자유
그것이 참선의 근본적인 취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참선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여러분들과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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