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가끔 그런 얘기하잖아요, 좀 야속하지만
자기는 그래도 좀 어떻게 해보려고
공부에 뜻을 더 깊이 하든지, 이걸 깨달아보려고
이렇게 저렇게 묻기도 하고 이런 말 저런 말도 하면은
“아직 안 급하고만”
이런 뭐 이런 야속한 말도 들으시잖아.
틀린 말은 아니에요. 틀린 말은 아닌데
아까도 제가 얘기를 했잖아요.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치료한다는 말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 본성이 한번 이렇게 확 드러나는
그걸 현정이라고도 하죠. 견성이라고도 하고.
하여튼 이 스스로 마음에 눈을 뜨는데
마음의 눈은 스스로밖에 못 뜹니다. 누가 어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눈을 뜨는데
좀 이렇게 자극을 주고 도움을 주는 거거든 설법이라고 하는 거는.
어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우리 그런 거 있잖아요.
저는 듣기만 했지 실제로는 그걸 해본 적은 없습니다.
모든 나비들은
나비가 되기 전에 애벌레로 살다가
이 고치를 만들어서 그 속에 들어가서 그걸 태라고 그러죠.
태는 아마 모습이라는 한자의 뜻일 겁니다.
바꿉니다. 모습을
그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서 나오는 거예요.
참 그 기적적인 일 아닙니까?
땅바닥 기어다니는 애벌레 있잖아요.
그게 고치를 지어서 그 속에 좀 있었는데
나올 때는 나비가 돼서 나와
이게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이게 그 날개가 어디에서 나온 거야? 도대체.
근데 어쨌든 나비가 되어서 나와요.
근데 나비가 되어서 나올 때
이 에벌레의 집이었던 이 고치를 뚫어야 되잖아요.
어떻게 뜨는지는 저는 모릅니다.
근데 이 고체를 뚫을 때, 이 나비가 뚫을 때
굉장히 힘겹다고만 제가 들었어요.
엄청 힘겹대요. 이렇게 보고 있으면
정말 아슬아슬하고 정말로 저걸 뚫고 나올 수 있을지
아니면 뚫다가 그냥 죽어버릴지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 살아온 습관이 있잖아요.
그런 어렵고 힘겨운 모습을 보면
우리가 도와주고 싶잖아.
그래서 조금 도움을 준다고 그 고치를 좀 이렇게 우리가 힘으로 열어주고 이러면
그 나비는 나와서 날지 못한답니다.
나비가 날지 못하면 죽는 거지.
그러면 이 설법은 뭐냐?
그 나비가 지금 그 고치 집을 지금 힘겹게 뚫고 있다고 그러나
뚫기 전이다고 해도 좋고
뭐 뚫고 있다고 해도 좋아.
그러면 이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밖에서
“나비야 나비야.”
그러니까 그 나비가 뭐 듣겠어 못 듣겠어
그건 몰라
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 마음으로 전달되는지 그런 건 모르겠고
나비야, 나비야, 그걸 뚫어야 돼. 뚫어야 돼.
그거 네가 한번 뚫어야 돼.
니가 뚫어야 날개를 펴고 훨훨 이 넓은 세상을 나를 수 있어, 하고
혼자 떠들고 있는 거라니까
뚫는 건 지가 뚫어.
그걸 대신 때려주는 게 아니에요.
뚫는 건 자기가 뚫어야 돼.
제가 TV로 본 건 하나 있습니다.
TV는 아니고 유튜브로 본 건데
동물들의 삶을 제가 좀 좋아해서
원앙 있잖아요. 원앙.
가끔 <세상에 이런 일이> 보면 그런 게 있는데
아파트 15층에 원앙부부가 집을 짓고 거기에 알 낳고
새끼 원앙이 부화되고
이런 거를 촬영한 이런 게 있잖아요.
근데 지금 기억은 안 나요
그 이 부화된 원앙이 며칠 안 걸리더라고
그걸 한자로는 이소라고 그래요.
집을 옮겨야 되는 거
지금까지 있었던 집에서 나오는 거, 이소.
이 이사 간다 이 말이죠.
근데 부화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 원앙을 어미 원앙들이 밖에서 불러요.
먹을 걸 안 갖다 주고 불러
밖에서 어디서 부르냐?
그 15층 아파트 맨 바닥에서 부릅니다.
“너희 엄마 여기 있으니까 이리 와” 하고 막 불러요.
우리는 말로 할 수 있잖아.
“야 이리 와, 뛰어내려” 이렇게 말로 할 수 있잖아.
근데 말이 안 되잖아.
원앙은 우리처럼 말 못 하잖아.
그러니까 우리처럼 이 그들의 언어가 있다그러면 내가 할 말은 없지만
불러 막 밖에서
“야 엄마 여기 있어 너 이리 와”
그러면 정말로 이만한 원앙이 15층에서 뛰어내려요.
날개도 없는데 그냥 뛰어내립니다.
한 놈씩 한놈씩 뛰어내리더라니까.
그 장면을 제가 보면서 참 정말 울컥했는데
우리 공부하고 똑같아
그게 원앙 새끼의 일이 아니야.
생각을 해보세요.
15층 높이에서 이만한 원앙이 뛰어내린다.
그저 뛰어내리면 죽을 것 같지
당연히 죽지
죽을 것 같아요.
근데 자꾸 저기서 오래, 엄마가
나는 죽을 것 같아.
그 생각을 따르면 못 뛰어내립니다.
여기 못 들어와, 절대 못 들어와.
엄마가 저기서 오라고 하니까 그냥 뛰어내리는 거예요.
죽을지 살지 모르고.
이 공부가 사실은 여기에 이렇게 통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거야.
그걸 우리가 믿음이라고 하는 건데
종교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게 그 믿음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보면 절대로 안 되는 일이야, 이게.
태어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날개도 안 나왔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근데 신기하게도 뛰어내리는데
너무 가벼워서 그런가?
살긴 살더라고요.
살긴 살어.
그러니까 이 법문 듣고 공부하시면서
이런저런 생각이나 느낌이나 감정이 드는 거는
그냥 부스러기처럼 여기시고
그냥 오로지, 오로지 그냥
저 밑에서 부르잖아요. 어미가 부른다니까, 여기라고
여기가 너희가 살 곳이라고
그 집에서 계속 못 살아.
엄마의 이 부름을 한 번만 믿어봐. 그냥 믿고 한번 뛰어내려 봐.
그래서 자꾸 여기라고 가르쳐 드리는 거예요.
내 힘으로는 내 생각으로, 내 뜻, 내 의지로는
도대체 갈 수가 없는 곳이야, 여기는.
그냥 한 번 믿고 뛰어내리는 거야, 그냥 한 번.
물론 저를 믿으라는 건 아닙니다.
저는 믿을 거 없어요.
이걸 믿으시라는 거예요.
이거를 믿으시라고.
25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거 하나 가르치셨고
그 이후에 역대 조사 선사들도 이걸 가르치셨거든
이걸 믿으시라는 거예요, 이거를.
근데 맹금류 있잖아요.
제가 원앙만 본 거 아니에요.
아파트에 집진 새 중에, 맹금류도 봤어요.
아파트 이런 옥상인가 여기에다가 집 짓고 새끼를 부화시켰는데
맹금류는 집을 떠나오게 만들 때 다른 방편을 쓰더라고.
그전까지는 새끼가 부화했을 때
열심히 쥐도 잡아 와서 입에 찢어서 먹여주고 그래요.
그러니까 새끼가 무럭무럭 크지
무럭무럭 커서 날개도 어미만 해지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아무리 무럭무럭 크고, 이 날개가 어미만 해져도
날아갈 생각을 안 해.
계속 어미가 먹이 물어다 주는데
저 같아도 그러겠어요.
왜 날아갑니까?
가만히 있어도...
이제 좀 크면은 그 둥지에만 있지는 않더라고.
둥지에 있다가 둥지 밖에도 나왔다가 이러더라고요.
그 카메라로 찍은 거 보니까.
근데 날아갈 생각은 안 해.
집이나 집 근처에만 있지, 집을 벗어나려고 안 해.
그것도 꼭 우리 중생들의 삶하고 비슷하죠.
그래서 날개가 이름만큼 컸어.
근데 안 날아가. 절대로.
딱 때가 되니까
어미가 얘를 날아가게 집 밖으로
집에서 벗어나게 떠나게 하는
그게 원앙하고는 다르게 어떻게 하냐 하면은
지금까지 계속 먹이 갖다줬어.
그냥 먹이 갖다주고 그냥 열심히 살아.
우리 그렇게 살아왔어요. 실은
그럼 이제 때가 된 거야.
이제 이 집에서 나와야 돼.
쉽게 말하면 그게 출가잖아. 출가
그럴 때 어떻게 하냐면
그것도 좀 불교하고 비슷하더라고.
이전처럼 똑같이 쥐를 잡아서 와요.
입에 쥐를 딱 물고 와.
그래서 이 둥지 아내 새끼가 먹겠다고 막 입 벌리잖아.
다른 때 같으면
분명히 둥지 가장자리 딱 밟고 쥐를 뜯어서 새끼 입에 넣어줬는데
가장자리를 안 밟아.
새끼가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둥지 밖에
그것만 물고 이렇게 앉아 있어.
그러니까 새끼는 왜 안 주냐고 막 이러거든.
그러면 막 이러는 걸 확인했잖아요.
그럼, 어미가 쥐를 물고 좀 더 뒤로 가요.
그럼, 새끼라는 놈은 더 조바심이 나는 거야.
지금 나를 줘야 하는데 자꾸 가지고 멀리 가니까
그러니까 집 밖으로 막 나와서 또 막 이래.
그게 확인이 되면
아예 그 아파트 그 옥상에서 다른 아파트 옥상으로 쥐 물고 가버립니다.
그래서 옥상 난간에서 새끼 있는 쪽을 바라본다니까.
새끼가 그걸 봐야 될 거 아니야.
그러면 자기가 알아서
원래 지 옥상 난간에 새끼가 올라가서
또 어미 있는 곳을 보고 막 해요.
그것까지 확인되잖아요.
그러면 쥐 물고 휙 날아가 버려요.
날아가서 어디 전봇대 전깃줄 위에 이렇게 앉아 있고 그러더라고
약 올리는 거지, 쉽게 말하면
“야, 여기 있어, 여기 있어. 여기”
좀 가까이 가려고 그러면
“여기 있어” 이러고.
자기 스스로 한번 이렇게 깨어나 보라고
자기 스스로 한번 날개를 펴보라고
사실은 이러는 거거든.
그러면 그 어미 입에 물려 있는 이 쥐는 뭐냐?
그 새끼가 좋아하는 먹을 거잖아.
좋아하는 거.
그게 부처고, 그게 깨달음이고, 도고, 해탈이고, 열반이에요. 그게.
저걸 내가 먹어야 되는데 왜 안 주고
자꾸 조금 떨어져서 그냥 이거라고만 하고.
그래서 자기 스스로 날개를 펴고 날아야
배고플 때 잡아먹고, 목마를 때 물 마시고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선에 딱 그 말을 하잖아.
이 선의 가르침은 사자 새끼를 키우는 거라고.
어떤 가르치는 스승이
먹을 걸 입에 넣어주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배우고 익힐 게 없는 거야, 이 공부는.
자기 스스로 자기 마음을 깨닫는 거예요,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 자기가 깨닫는 거예요.
근데 그런 거 있잖아.
그게 황조롱인지, 매인지 그랬는데
새끼가 먹을 걸 많이 먹고 배가 불러.
배가 부른데 어미가 쥐 잡아서 왔어.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이거 쫄쫄 굶겨야 돼. 쫄쫄 굶겨야 돼.
몇 날 며칠 먹을 걸 안 갖다 줘야 돼.
그러면 딴 생각 안 일어날 겁니다.
어미가 물어보는 그 먹을 거 이 쥐를 보는 순간
아무 생각 안 일어날 거야.
“오로지 저걸 내가 먹어야 된다” 이 생각밖에 못 할 거예요.
그거를 좀 유화적으로
관심을 가지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여기에만 관심을 가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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