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묻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 황벽 선사가 임재를 때렸습니다.
근데 임재는 거기서 못 깨달았어요.
그게 한탄스러운 거예요.
자기의 스승인 황벽이 저렇게 다 가르쳐주는데
저희가 못 보니까
그런 심정은 아마 이 공부하시는 도반들도 느끼셨을 겁니다.
저도 제 스승님 문하에서 공부할 때
그런 심정이 저한테도 있었으니까.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저는 몰라요.
근데 도가 뭡니까? 이겁니다.
부처가 뭡니까? 이겁니다.
깨달음이 뭡니까? 이겁니다.
이러는데 다 가르쳐 주시는데
다 가르쳐주고 다 드러내고 있는데
내가 못 보고, 못 듣고, 못 느끼고, 실감이 안 되니까
어떤 때는 참 자기 스스로가 한탄스럽더라고요.
임제 심정이 지금 그래요. 다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어요.
누가 뭐냐? 이거다.
부처가 뭐냐? 이거다.
깨달음이 뭐냐? 이거다.
‘이거다’ 하고 다 가르쳐 주고 있어.
근데 눈에 보이는 건 손가락이고
귀에 들리는 건 책상 두드리는 소리밖에 안 들리니까
손가락 보여주고 책상 두드리는 소리 들려줄 것 같으면
뭐 하러 지금 이렇게 가르치겠습니까?
조주스님이 ‘뜰 앞에 잣나무다’, 그럴 때
뭐 나무 이름 가르쳐주려고 잣나무, 소나무, 전나무, 측백나무 이랬겠습니까?
그게 아니거든
분명히 가르치는 게 있어요.
근데 이 가르친다고 하는 이거를
가짜 이름으로 도라고 하고, 깨달음이라고 하고, 우리 본래마음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은 싹 빼버리고
왜?
그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 이름으로 그 이름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이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제가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날 때부터 본래 자기 스스로 다 갖추고 있는 거고 쓰고 있는 거예요.
그게 실감이 될 뿐이야.
잣나무가 뭔 나무인지 실감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세간의 가르침이지
이건 잣나무다,
그건 모습이잖아.
세간 잘 생각해 보세요.
잣나무, 소나무, 전나무, 측백나무를 우리가 어떻게 이름을 붙이고 아는지.
모습의 차이를 가지고 얘기합니다.
전부.
우리도 다 마찬가지잖아요.
각자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이 뭐예요?
다 모습의 차이예요.
모습이 똑같으면 헷갈리고 혼란스럽습니다.
그거는 분명히 그래요.
제 위에 형님 두 분이 일란성 쌍둥이인데
제가 그런 경험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죠.
동네 사람들이 더 헷갈려 해요.
누군지를 잘 몰라.
이름은 분명히 둘이 있는데 몰라.
우리가 모습의 차이를 가지고 이름을 다 붙이고
그렇게 알고 이해하고 그러는 거거든.
그러니까 우리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표면적인 겁니다.
지혜가 없어요, 거기에는.
지혜라고 하는 건 알 수가 없어.
우리가 이름은 지혜라고 하는데
알 수 있는 건 지식이지, 이해되는 건 지식이지.
그러니까 분명히 가르치긴 가르쳐.
근데 이게 모습이 없어.
뭐라고 이거는 이름으로 뭐라고 이렇게 붙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렇게 가르쳐 주긴 가르쳐 주는데
통할 때는 이심전심이에요.
그래서 마음으로 통해야 됩니다.
머리로 통하는 게 아니고.
자기 본성이 확인이 되면 그냥 이심전심이 돼.
자기 본성을 계속 지금 가르쳐주고 있거든.
저만 가르치냐?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모든 모습이
이 컵이니, 뭐 하여튼 선인장같이 생긴 이거
시계니, 죽비니, 책상이니, 마이크니
이 모든 이 모습이 지금 우리 본성을 다 가르쳐주고 있거든.
이거를 경전에서는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느냐?
“이 무정물의 설법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 이렇게 말이에요.
모든 무정물이 살아서 이 법 하나를 막 가르치고 있어요.
모든 무정물이.
이렇게 얘기하면
또 이 과장인 것 같고, 억지인 것 같지만
자기 스스로가 통해 보십시오.
성경에 그런 말도 나오는 것 같아요.
제가 읽은 지가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 죽어 있는 모든 게 이 살아나고 깨어난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 같은데
여기 통해서 이게 이렇게 분명해 보십시오.
죽어있는 모든 게 살아나 버립니다.
죽어있는 게 없어요.
이 세상은 다 살아서 이 법 하나를 얘기하고 있지.
예를 들어서
이 하늘의 별이 죽어있는 거였다.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역사에서 이렇게 나타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양반이 이 새벽별이 반짝하는 걸 보고 깨달았거든.
새벽별이 반짝하면서
이 살아있는 마음을 가르쳐 줬으니까 깨달을 수 있었지.
그게 죽어 있는 거였다.
그러면 못 깨달았어요.
부처 못 됐습니다.
다 살아있어요.
우리가 이 공부하는 이 본성이라고 하는 건
살아있는 마음을 공부하는 거거든.
죽어있는 마음, 아무것도 느끼지도 못하고 고요하기만 하고, 깨끗하기만 하고
이런 마음을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살아있는 마음을 공부하는 거예요.
깨달은 마음이 살아있는 마음이에요.
이렇게 가르쳐 주는데도
이게 확인이 안 되고 실감이 안 되니까
여기에 이렇게 뜻이 있고
이 공부에 관심이 있는 입장에서는
좀 스스로가 한탄스럽죠.
/수자가 말했다.
“한 번 더 가서 물어보게”.
임제가 다시 가서 물었으나 황벽은 역시 때리기만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세 번을 물었으나 세 번 다 때렸다.
그러자 임제는 수자를 찾아가 말했다.
“다행히 스님의 자비를 입어서 방장스님께 법을 물었습니다.
세 번을 묶어서 세 번 다 두들겨 맞았으나
한스럽게도 인연이 가로막혀서 그 깊은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공부를 해보면 이런 심정이라든지
이런 걸 이렇게 같이 겪기 때문에 공감이 돼요.
이렇게 다 가르치고, 다 드러내고, 다 보여주는데
자기 스스로가 이게 실감이 안 되니까
정말 한스럽죠.
근데 어쩔 수가 없어요.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야.
애를 쓸 수도 없고, 노력할 수도 없고, 욕심을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떤 방법을 취해서 정진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어, 그냥 한스럽더라도
또 이거를 해결하겠다라고 하는 그 뜻, 그 마음으로 가르침을 듣는 수밖에.
이 가르침이라고 하는 건 다른 거 아닙니다.
우리가 찾고 구하고 얻으려고 하는
그걸 도라고 하든, 깨달음이라고 하든, 실상이라고 하든, 부처라고 하든
본래 마음이라고 하든
그거를 그냥 곧장 바로 이렇게 보여주는 걸 가르침이라고 그래요.
다른 거 안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구질구질한 건 얘기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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