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입장에서는
“도가 뭡니까?”
이 말이 어처구니가 없어요, 사실은.
“깨달음이 뭡니까?”“불교가 뭡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이 질문이 어처구니가 없다니까
뭐긴 뭐야 자기가 다 하고 있는데
자기 마음을 어디 토끼 간처럼 떼어서
어디 바위 위에다 햇빛 쐬고 있겠습니까?
우리가 마음 없이 살아본 적이 있어요?
자기 머리 없이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근데 이게 ‘깨달음’ 이러고 ‘불법’ 이러면
어디 멀리 나하고 상관없이
멀리, 내 손에 잡히지 않는, 어디엔가 있는 것처럼
그런 착각을 해버려요.
제발 그런 데 속지 마세요.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은 다 이유가 있어요.
도다, 법이다, 깨달음이다.
이게 물론 분별하는 입장에서는
이게 아무리 온 우주에 이렇게 다 드러나 있고, 널려 있고, 펼쳐져 있다 하더라도
분별하는 입장에서는
다가갈 수도 없고
손에 잡을 수도 없고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 굉장히
예를 들면
이 세상에 가장 귀한 보물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죠.
분별하는 입장에서는
그래서 불가사의하다고 그러는 겁니다.
근데 이 불가사의하다고 하는 이 법이
어디 그렇다고 내가 사는 이 현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
여기에는 없고
어디 멀리 있는 어떤 거다, 이 말이 아니에요.
다 드러나 있는데
내가 분별밖에 하지 못하고
그렇게 망상하고 있고 그 물속에 사는
물고기처럼 희한하게 물을 찾는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불가사의하다, 이러는 거예요.
근데 그게 아니고
진짜 사실처럼
이 불법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거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고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의도가 있는 거예요.
“이건 아무나 할 수 없고
나 같은 사람밖에 못하니까 니들은...”
이런 뜻이에요.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게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부처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고, 중생의 마음은 간장 종지처럼 좁겠습니까?
그런 거 없어요.
부처의 마음이나 중생의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자기 스스로가 이걸 실감해 보지를 못하니까
뭔가 나는 부족하고
더 가야 될 길이 있는 것 같고
당연히 모습만 분별하니까 그러지.
모습만 분별하면 당연히 부족하지.
예를 들어서
내 기분, 내 느낌, 내 견해, 내 지식
이게 다 모습만 분별하는 거거든요.
이런 것만 분별하면 당연히 부족하지.
더 완전하고, 더 좀 인격적이고, 더 좀 지혜롭고, 더 지식도 많고,
더 세상 경험도 많았으면
그건 해도해도 끝이 없는 거니까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지.
우리가 이 본질을 얘기하고, 법을 얘기하고, 도를 얘기하고, 깨달음을 얘기하는 건
그런 모습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모습을 떠나서 얘기하지도 않지만
이 모습의 차별을 얘기하지는 않아요.
그 차별되는 모든 모습이 진실로 드러내고
진실로 가리키는 실상이 뭐냐?
이게 불교죠.
이게 우리가 진실이라고 하는 거고.
우리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몸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알고 모르고, 이해하고 이해 못 하는 이 모든 현상들이
진실로 가리키는 이 실상이 뭐냐?
내가 지금까지 이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이 모든 것들이
진실로 드러내고 있는 게 뭐냐?
이거를 공부하는 거죠.
그게 불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에요.
이 공부는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야.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모습을 가지고 얘기하는 거지.
‘옳은 일을 하면서 살 거냐’
뭐 이건 다 모습을 가지고 얘기를 하는 거지.
모든 모습에
왜 이 모든 모습이라고 제가 얘기를 하냐면
이 옳은 모습을 가지고 살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한테는 스트레스가 있어요.
왜?
자기는 옳게 살고 싶은데
옆에 보니까 옳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너무 많아.
그럼, 스트레스가 생겨.
그러니까 모든 모습이어야 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자기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옳다고 여기든, 그렇다고 여기든
미워하든 사랑하든
모든 모습이어야 돼.
이런 얘기를 예수님도 하셨잖아요.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것만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이 도에 접근을 못한 사람이야.
그건 누구나 다 아는 거야.”
누구나 다 하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일만 좋아하는 건 누구나 다 해.
내가 사랑하지 않는 걸 사랑하는 것.
이게 도예요.
그게 모든 모습이야.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거야, 그게.
이 경험하는 모든 모습이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옳든 그르든, 좋든 싫든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그 모든 모습이
진실로 가리키는 게 있거든.
그거 하나 가르치려고 이 모든 모습이 생기고 사라지는 거거든.
그거 하나 가르치려고.
그거 하나 가르치려고
이 모습도 생기고 사라지고, 저 모습도 생기고 사라지는데,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모습은 좋아하고 어떤 모습은 싫어하고
어떤 모습은 가까이하고 싶고 어떤 모습은 멀리하고 싶고
그렇게 분별을 해버리는 거예요.
근데 내가 분별을 하든 말든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모든 모습이 진실로 가리키는 게 있다고.
그거를 이 석가모니 부처님은 뭐라고 그랬냐?
법계라고 그랬어요, 법계.
괜히 법의 세계라고 한 게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세계로 되는 게 법계가 아니야.
예를 들어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불교를 믿는 게 법계가 아니야.
그게 부처님의 땅이 아니에요.
가끔은 그런 얘기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종교를 믿는 분들
이럴 때는 제가 종교라는 표현을 쓸 때는
이 근본의 가르침을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종교라는 형식과 틀을 얘기하는 거지.
그런 분들이 있잖아요. 지금도.
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 전파를 해서 누구나 다 그렇게 해야 된다 하는 분이 있고
부처님의 말씀으로.
그러니까 서로 싸우는 거예요.
그 모습만 취하는 어리석은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가 이루어져야
그게 법계고 그게 바른 사회겠습니까?
그런 오만이 어디 있어요?
그게 중생의 어리석음입니다.
세계는 손댈 것도 없고 바꿀 것도 없어요.
우리 이 분별만 사라지면
그냥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원래부터 법계였음이 실감이 되고, 공감이 돼요.
분별만 사라지면.
이 분별이 사라지면
이 세계에 천차만별한 일들이
전부 그냥 이 진실 하나를 가리키고 드러내고 있을 뿐이거든.
그게 실감이 되고 확인이 됩니다.
그래서 이 하나의 모습에 통하면
이 우주 전체가 통하는 거예요.
이 하나의 모습과 우주 전체는 둘이 아닙니다.
둘이 되질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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