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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經 | "이름을 붙이는 순간, 온 우주가 생겨난다" - 안다고 여기고 넘기는 말 | 월인선원

Buddhastudy 2024. 8. 1. 20:01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하고 대조로

이 두 번째 문장이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입니다.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런 말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으로는

두 번째 문장도 생각으로 이해해 보려고 그러면

이해할 면이 없지는 않아요.

그런데 첫 번째 이야기보다 이 생각으로는

두 번째 이 문장을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첫 번째 거는

도는 도라고 할 수 없는 거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거니까

이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이건 우리가 이해는 돼. 이게 이해

지금까지 전부 이걸 전부 그런 식으로 이해만 했죠.

 

두 번째 문장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그럼 가짜 이름이라는 말인가?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돼요.

이름에도 무슨 가짜 이름이 있고 진짜 이름이 있나?

 

이런 사물을 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그럼 컵이라는 이름은 가짜 이름이고 진짜 이름은 또 따로 있나?

이런 식으로.

생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이 두 번째 문장은.

 

훨씬 첫 번째 문장보다

이 두 번째 문장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이 도에 더 가깝다고 해야 됩니까?

 

좀 그런 느낌이 있어요.

두 번째 문장이 도에 더 가까운 느낌이 있어요.

물론 첫 번째 문장도 당연히 도를 얘기한 거죠.

분별하지 마라는 이야기잖아요.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이 말이니까

분별하지 마라.

분별만 했다 그러면 그건 도가 아니다.

 

두 번째 문장은 그렇기 때문에

깨달아서 자기가 이런 부분을 공감하지 않으면

이게 쏙 다가오지가 않습니다.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참되다 거짓되다라고 하는 거는

이름에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이름은 전부 거짓된 거예요.

이 부분을 우리가 공감하려면 깨달아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분별할 때는 이름이 진실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걸 컵이라고 그래야지

이거를 뭐 종이다 그러면 틀렸다고 그래요.

 

근데 깨달아서 보세요.

얘를 컵이라고 하든 종이라고 하든

얘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거야.

얘하고는 아무 상관없기 때문에 그 모든 이름은 다 거짓되다고 그러는 겁니다.

진짜가 아니야, 그거는.

진짜는 얘지. 쉽게 얘기하면.

 

사물만 가지고 얘기해도 그래요.

진짜는 예지, 얘 이름이 진짜일 수는 없잖아.

이름은 전부 가짜라니까.

 

우리가 가짜를 약속한 거야.

얘를 컵이라고 부르자고

얘를 전화기라고 부르고 시계라고 부르자고.

약속한 거지.

그게 그 대상, 사물의 어떤 진실이냐?

진실일 수는 없죠.

우리끼리 부르는 가짜 이름이죠.

그건 편의상 붙인 겁니다.

그래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이름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야.

참된 이름이 아니에요.

전부 가짜지

 

참된 거는 이거밖에 없어.

이거밖에 없어.

그러면 이 모습이 그렇다면 우리가 참된 거냐?

하나만 더 들어갈게요.

얘를 컵이라는 이름을 빼버리고

이 모습이 그러면은 이게 참된 거냐?

그게 진실한 거고 그게 진실이냐?

 

또 그렇지도 않죠.

이 모습조차도 진실이라고 할 수 없는데

이 모습에 가짜로 붙인 이름이야말로

그걸 어떻게 우리가 참되다 진실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평생을 이 말을 쫓아서

말에 의지해서 살아온 버릇 때문에

참되다, 옳다. 여기에 이렇게 매여 있지만

우리가 이름을 붙여서 부르고 있는 그 대상, 그 사물, 그 모습조차도

우리가 진실하다고 할 수가 없는 건데.

 

진실한 건 이거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참된 이름일 수가 없어.

참된 이름이 아니야.

그냥 이름은 다 가짜 이름이야.

 

근데 이 이름이라고 하는 거는

계속 제가 말씀드렸지만, 전부 우리 생각의 세계입니다.

망상의 세계예요.

진실의 세계가 아니야.

 

 

그래서 이 본질과 현상을

도와 이름으로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무명, 이름 없음,

그다음에 유명, 이름 있음.

 

세 번째 네 번째 문장도 이렇게 대조돼 있고

다섯 여섯 번째 문장도 대조돼 있습니다.

 

무명 천지지시(無名 天地之始)

유명 만물지모(有名 萬物之母)

 

무명, 이름 없음은 천지지시해서

천지의 시작이다.

 

두 번째로는 이름 없음과 이름 있음으로

근본과 현상을 또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첫 번째 문장에서 얘기했던 이 도라고 하는 게 무명이에요.

무명, 이름 없음이야.

우리가 도라는 말로 얘기하고 싶은 건

이름 없는, 분별되지 않는, 이거를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름이 없는데 도라는 이름을 지금 붙였잖아.

가짜지, 당연히 가짜지.

 

그래서 이 무명이라고 하는 거는

분별되지 않는 세계를 얘기하는 겁니다.

분별되지 않는 거, 우리 본성을 얘기하고 있어요.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천지의 시작이다.

 

당연히 천지라고 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주라고 하는 게 천지잖아요.

우주라고 하는 건 모습 지어진 세계입니다.

무명 천지지시라는 말은

창조를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기독교식으로 얘기하면 창조

 

모습 지어진 이 우주 삼라만상은

이 모습 없는 여기에서 다 생겨났다.

시작이라고 했잖아요, 시작.

창조라니까.

 

불교에서도 그런 말이 있죠.

일체유심조라고.

일체라고 하는 건 이 우주를 얘기하는 겁니다.

모습 지어진 이 모든 걸 얘기하는 거예요.

이 모습 지어진 세계.

 

이 모습 지어진 이 세계는

이 우주 삼라만상은 어디에서 나온다?

마음에서 나온다.

이 마음이라고 하는 거는 우리가 분별되지 않는 걸 얘기하는 거거든

똑같은 얘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깨달을 건 이 무명이죠. 무명.

이름 없는 이 무명.

 

근데 한번 잘 보세요.

이름이 없다는 말도 말이고 이름입니다.

이름이 있다. 이름이 없다하는 것도 말이고, 이름이야.

 

그러니까 이름 없음이라고 하는 이거를 이해하시면

안 되는 거죠.

이름 없음이라고 하는 이 무명으로 가르치고

이 무명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거는

이거밖에 없는 거예요.

 

어떤 문명의 세계가 있다, 그런 이상적인 세계가 있다.

무릉도원이 있다,. 신선의 세계가 있다.

그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거기에도 당연히 세계가 있기만 하면 다 이름이 있죠.

이름을 붙일 수가 있고

신선이다, 천사다, 천녀다

다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모습이 있다 그러면 다 붙일 수가 있어요.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이 무명이 공입니다, .

공이겠죠?

 

천지, 모습 지어진 모든 것은

무명이라고 하는 분별되지 않는

이 진실에서 다 나온다.

이게 천지지시입니다.

 

유명 만물지모다.

그러니까 이 도덕경 1장을 보면은

도덕경을 보는 이유가

도에 관심이 있어서 보기 때문에

아무래도 명가명이라든지 유명

이쪽에 관심을 집중해서 보기보다

이 도가도, 무명, 이쪽에 관심을 집중해서 봅니다.

 

그러니까 명가명 비상명이나 유명 만물지모 이럴 때

이 말은 그냥 별로 관심 없이 그냥 지나가 버리는 거예요.

이 말이 100% 소화가 안 된 채로 지나가 버립니다.

 

보세요, 이름 있음이 뭐냐?

만물의 어머니라는 거예요. 만물의 어머니.

이게 이해가 됩니까?

 

첫 번째 문장에서 나왔듯이

무명 천지지시는 우리가 생각으로 헤아려서 이해할 면이 있다니까

하도 많이 들어서

기독교에서도 창조를 얘기하고

불교에서도 일체 유심조를 얘기하고

적어도 이 마음공부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이다 그러면

이 말이 당연한 말이야.

 

우주 삼라만상은 전부 이 마음에서 나오고

알 수 없고, 분별되지 않는 여기에서 나온다.

이 말은 그냥 머리로라도 그렇게 알고 있어.

물론 그걸 알고 있는 게 진실한 건 아니죠.

그건 이해고 앎이기 때문에

 

근데 이 두 번째 문장들은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이름 있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다.

이 만물이나 천지나 똑같은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명가명 비상명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두 번째 문장이 소화되고 공감이 되려면

당연히 깨달아야 됩니다.

안 깨닫고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창조하는 부분이

하여튼 제가 기억나는 건 그거예요.

빛이 있으라 해서 빛이 있었다고 그러잖아요.

그 말하고 똑같습니다.

이 세상이 있으라 하니까 세상이 있었다.’

이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이름 있음이라고 하는 게 만물의 어머니니까.

만물이 다 여기에서 나왔다. 이 말이니까.

 

불교에서는 이걸 뭐라고 얘기하는지 아십니까?

한 생각이 온 우주를 다 만들어낸다이렇게 얘기합니다.

 

한 생각이 온 우주를 다 만들어낸다.

그래서 제가 깨달아야 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깨달아보면 이 말이 공감이 돼요.

 

이름 하나 붙이면

이걸 컵이라고 이름을 하나 딱 붙이잖아요.

컵이라는 이름이 딱 생겨났잖아요.

그럼 우주 만물의 이름이 다 생겨버립니다, 그 순간.

그러니까 만물지모죠.

유명은 만물지모예요.

 

물론 우리가 분별을 넘어서야 된다, 그럴 때는

그렇게 방편을 안 쓰고

한 생각이 온 우주를 오염시킨다고 쓰죠.

왜 오염시키겠습니까?

이 모습 지어진 모든 거에 이름을 다 갖다 붙여버리기 때문에

오염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이름 하나가 생기면

이 우주 삼라만상이 생겨나 버리는 겁니다.

 

사실은 이 우주 삼라만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름 하나를 붙이기 때문에 생겨난 거예요.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게 무명인데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은

이 모습 지어진 세계가 있다 없다 할 수도 없고

모습 없는 세계가 있다 없다 할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히려 제가 볼 때는

두 번째 문장에 더 이렇게 집중을 해야 되는데

자기가 관심이 도에 있고, 깨달음에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두 번째 문장도 다 깨달음을 얘기하고 도를 얘기하고 있는데

도라고 하는 글자라든지

유명이라고 하는 건 자기가 안다고 여기니까

이 무명이 도대체 뭐냐?

이쪽에 이렇게 집중을 하다 보니까

그냥 넘겨버리는 거예요.

 

근데 진짜 이해하기 힘든 거는 다 두 번째에 들어 있어요.

명가명, 유명 이쪽에 들어 있어요.

제가 볼 때는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