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하고 대조로
이 두 번째 문장이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입니다.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런 말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으로는
두 번째 문장도 생각으로 이해해 보려고 그러면
이해할 면이 없지는 않아요.
그런데 첫 번째 이야기보다 이 생각으로는
두 번째 이 문장을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첫 번째 거는
도는 도라고 할 수 없는 거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거니까
이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이건 우리가 이해는 돼. 이게 이해
지금까지 전부 이걸 전부 그런 식으로 이해만 했죠.
두 번째 문장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그럼 가짜 이름이라는 말인가?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돼요.
이름에도 무슨 가짜 이름이 있고 진짜 이름이 있나?
이런 사물을 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그럼 컵이라는 이름은 가짜 이름이고 진짜 이름은 또 따로 있나?
이런 식으로.
생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이 두 번째 문장은.
훨씬 첫 번째 문장보다
이 두 번째 문장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이 도에 더 가깝다고 해야 됩니까?
좀 그런 느낌이 있어요.
두 번째 문장이 도에 더 가까운 느낌이 있어요.
물론 첫 번째 문장도 당연히 도를 얘기한 거죠.
분별하지 마라는 이야기잖아요.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이 말이니까
분별하지 마라.
분별만 했다 그러면 그건 도가 아니다.
두 번째 문장은 그렇기 때문에
깨달아서 자기가 이런 부분을 공감하지 않으면
이게 쏙 다가오지가 않습니다.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참되다 거짓되다라고 하는 거는
이름에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이름은 전부 거짓된 거예요.
이 부분을 우리가 공감하려면 깨달아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분별할 때는 이름이 진실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걸 컵이라고 그래야지
이거를 뭐 종이다 그러면 틀렸다고 그래요.
근데 깨달아서 보세요.
얘를 컵이라고 하든 종이라고 하든
얘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거야.
얘하고는 아무 상관없기 때문에 그 모든 이름은 다 거짓되다고 그러는 겁니다.
진짜가 아니야, 그거는.
진짜는 얘지. 쉽게 얘기하면.
사물만 가지고 얘기해도 그래요.
진짜는 예지, 얘 이름이 진짜일 수는 없잖아.
이름은 전부 가짜라니까.
우리가 가짜를 약속한 거야.
얘를 컵이라고 부르자고
얘를 전화기라고 부르고 시계라고 부르자고.
약속한 거지.
그게 그 대상, 사물의 어떤 진실이냐?
진실일 수는 없죠.
우리끼리 부르는 가짜 이름이죠.
그건 편의상 붙인 겁니다.
그래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이름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야.
참된 이름이 아니에요.
전부 가짜지
참된 거는 이거밖에 없어.
이거밖에 없어.
그러면 이 모습이 그렇다면 우리가 참된 거냐?
하나만 더 들어갈게요.
얘를 컵이라는 이름을 빼버리고
이 모습이 그러면은 이게 참된 거냐?
그게 진실한 거고 그게 진실이냐?
또 그렇지도 않죠.
이 모습조차도 진실이라고 할 수 없는데
이 모습에 가짜로 붙인 이름이야말로
그걸 어떻게 우리가 참되다 진실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평생을 이 말을 쫓아서
말에 의지해서 살아온 버릇 때문에
참되다, 옳다. 여기에 이렇게 매여 있지만
우리가 이름을 붙여서 부르고 있는 그 대상, 그 사물, 그 모습조차도
우리가 진실하다고 할 수가 없는 건데.
진실한 건 이거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참된 이름일 수가 없어.
참된 이름이 아니야.
그냥 이름은 다 가짜 이름이야.
근데 이 이름이라고 하는 거는
계속 제가 말씀드렸지만, 전부 우리 생각의 세계입니다.
망상의 세계예요.
진실의 세계가 아니야.
그래서 이 본질과 현상을
도와 이름으로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무명, 이름 없음,
그다음에 유명, 이름 있음.
세 번째 네 번째 문장도 이렇게 대조돼 있고
다섯 여섯 번째 문장도 대조돼 있습니다.
무명 천지지시(無名 天地之始)
유명 만물지모(有名 萬物之母)
무명, 이름 없음은 천지지시해서
천지의 시작이다.
두 번째로는 이름 없음과 이름 있음으로
근본과 현상을 또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첫 번째 문장에서 얘기했던 이 도라고 하는 게 무명이에요.
무명, 이름 없음이야.
우리가 도라는 말로 얘기하고 싶은 건
이름 없는, 분별되지 않는, 이거를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름이 없는데 도라는 이름을 지금 붙였잖아.
가짜지, 당연히 가짜지.
그래서 이 무명이라고 하는 거는
분별되지 않는 세계를 얘기하는 겁니다.
분별되지 않는 거, 우리 본성을 얘기하고 있어요.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천지의 시작이다.
당연히 천지라고 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주라고 하는 게 천지잖아요.
우주라고 하는 건 모습 지어진 세계입니다.
무명 천지지시라는 말은
창조를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기독교식으로 얘기하면 창조
모습 지어진 이 우주 삼라만상은
이 모습 없는 여기에서 다 생겨났다.
시작이라고 했잖아요, 시작.
창조라니까.
불교에서도 그런 말이 있죠.
일체유심조라고.
일체라고 하는 건 이 우주를 얘기하는 겁니다.
모습 지어진 이 모든 걸 얘기하는 거예요.
이 모습 지어진 세계.
이 모습 지어진 이 세계는
이 우주 삼라만상은 어디에서 나온다?
마음에서 나온다.
이 마음이라고 하는 거는 우리가 분별되지 않는 걸 얘기하는 거거든
똑같은 얘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깨달을 건 이 무명이죠. 무명.
이름 없는 이 무명.
근데 한번 잘 보세요.
이름이 없다는 말도 말이고 이름입니다.
‘이름이 있다. 이름이 없다’ 하는 것도 말이고, 이름이야.
그러니까 ‘이름 없음’이라고 하는 이거를 이해하시면
안 되는 거죠.
이 ‘이름 없음’이라고 하는 이 무명으로 가르치고
이 무명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거는
이거밖에 없는 거예요.
어떤 문명의 세계가 있다, 그런 이상적인 세계가 있다.
무릉도원이 있다,. 신선의 세계가 있다.
그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거기에도 당연히 세계가 있기만 하면 다 이름이 있죠.
이름을 붙일 수가 있고
신선이다, 천사다, 천녀다
다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모습이 있다 그러면 다 붙일 수가 있어요.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이 무명이 공입니다, 공.
공이겠죠?
천지, 모습 지어진 모든 것은
무명이라고 하는 분별되지 않는
이 진실에서 다 나온다.
이게 천지지시입니다.
유명 만물지모다.
그러니까 이 도덕경 1장을 보면은
도덕경을 보는 이유가
도에 관심이 있어서 보기 때문에
아무래도 명가명이라든지 유명
이쪽에 관심을 집중해서 보기보다
이 도가도, 무명, 이쪽에 관심을 집중해서 봅니다.
그러니까 명가명 비상명이나 유명 만물지모 이럴 때
이 말은 그냥 별로 관심 없이 그냥 지나가 버리는 거예요.
이 말이 100% 소화가 안 된 채로 지나가 버립니다.
보세요, 이름 있음이 뭐냐?
만물의 어머니라는 거예요. 만물의 어머니.
이게 이해가 됩니까?
첫 번째 문장에서 나왔듯이
무명 천지지시는 우리가 생각으로 헤아려서 이해할 면이 있다니까
하도 많이 들어서
기독교에서도 창조를 얘기하고
불교에서도 일체 유심조를 얘기하고
적어도 이 마음공부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이다 그러면
이 말이 당연한 말이야.
우주 삼라만상은 전부 이 마음에서 나오고
알 수 없고, 분별되지 않는 여기에서 나온다.
이 말은 그냥 머리로라도 그렇게 알고 있어.
물론 그걸 알고 있는 게 진실한 건 아니죠.
그건 이해고 앎이기 때문에
근데 이 두 번째 문장들은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이름 있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다.
이 만물이나 천지나 똑같은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명가명 비상명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두 번째 문장이 소화되고 공감이 되려면
당연히 깨달아야 됩니다.
안 깨닫고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창조하는 부분이
하여튼 제가 기억나는 건 그거예요.
‘빛이 있으라 해서 빛이 있었다’고 그러잖아요.
그 말하고 똑같습니다.
‘이 세상이 있으라 하니까 세상이 있었다.’
이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이름 있음’이라고 하는 게 만물의 어머니니까.
만물이 다 여기에서 나왔다. 이 말이니까.
불교에서는 이걸 뭐라고 얘기하는지 아십니까?
‘한 생각이 온 우주를 다 만들어낸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한 생각이 온 우주를 다 만들어낸다.
그래서 제가 깨달아야 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깨달아보면 이 말이 공감이 돼요.
이름 하나 붙이면
이걸 컵이라고 이름을 하나 딱 붙이잖아요.
컵이라는 이름이 딱 생겨났잖아요.
그럼 우주 만물의 이름이 다 생겨버립니다, 그 순간.
그러니까 만물지모죠.
유명은 만물지모예요.
물론 우리가 분별을 넘어서야 된다, 그럴 때는
그렇게 방편을 안 쓰고
한 생각이 온 우주를 오염시킨다고 쓰죠.
왜 오염시키겠습니까?
이 모습 지어진 모든 거에 이름을 다 갖다 붙여버리기 때문에
오염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이름 하나가 생기면
이 우주 삼라만상이 생겨나 버리는 겁니다.
사실은 이 우주 삼라만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름 하나를 붙이기 때문에 생겨난 거예요.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게 무명인데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은
이 모습 지어진 세계가 있다 없다 할 수도 없고
모습 없는 세계가 있다 없다 할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히려 제가 볼 때는
두 번째 문장에 더 이렇게 집중을 해야 되는데
자기가 관심이 도에 있고, 깨달음에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두 번째 문장도 다 깨달음을 얘기하고 도를 얘기하고 있는데
도라고 하는 글자라든지
유명이라고 하는 건 자기가 안다고 여기니까
이 무명이 도대체 뭐냐?
이쪽에 이렇게 집중을 하다 보니까
그냥 넘겨버리는 거예요.
근데 진짜 이해하기 힘든 거는 다 두 번째에 들어 있어요.
명가명, 유명 이쪽에 들어 있어요.
제가 볼 때는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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