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가 부처라고 하는데
그냥 믿어야 합니까?
어떻게 얼마나 정진하면
자기 자신이 우리 모두가 부처임을 알 수 있습니까?//
답이 됐는지 모르겠어.
얼마까지 안 해도 금방 알 수 있어.
문제는 내가 가만히 정신을 차리면 되는데
우리는 거의 정신을 잃고 산다 이거예요.
아무리 마약에 오래 중독되고, 담배 오래 피우고, 술을 많이 먹은 사람도
지금은 그 습관으로만 하면
술 안 먹으면 못 살고
담배 안 피우면 못 살고
마약 안 맞으면 못 살고
피우면 또 좀 낫고 안 피우면
또 못 살고 또 피우면 좀 낫고
그러니까 어떻게든지 피워야만
이게 조금 좋아지는데, 맛이 들어져 있는데
여기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저렇게 아무리 저렇게 중독이 돼도
지금부터라도 이렇게 딱 끊고
그 힘든 거를 조금만 기간을 좀 경과하면
그 사람 건강이 좋아진다”
그래 됩니까? 안 됩니까?
되지.
근데 본인은
그 순간순간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정신만 조금만 차리면
누구나 다 이거를 알 수 있어.
특별한 사람 막, 공부를 많이 하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머리를 깎아서 알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머리 깎아서 알면
이발소만 갔다 오면 다 알게.
옷을 입는다고 알게 되면
옷만 갈아입으면 되잖아.
기와집 밑에 저 절에 가가 좀 며칠 살면 알게 된다면
그거 얼마나 쉬워, 가서 그냥 며칠 살면 되지.
그렇기 때문에 스님이라고 깨닫는 게 아니에요.
그건 다 착각이예요.
음식 좀 가려 먹는다고 깨쳐지겠어. 이게?
이런 이치를 아는데
지금 오늘 본문 들으면서
오늘 올 때 생선 먹고 온 사람, 내 말 못 알아듣고
풀만 먹고 온 사람 알아듣고
그런 거 아니잖아.
근본적으로 그런 거하고 관계가 없는 거예요.
지금 안 듣기 때문에 안 되는 거지.
그러니 조금, 조금만
내가 볼 때는 답답해.
왜 저리 사는지
조금은 조금만
많이도 말고,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환하게 알 수 있는데
왜 똑같은 짓을 저렇게 수도 없이 반복하는지.
근데 내가 아는 거사가 알코올 중독자가 있어.
머리도 좋고, 재산도 있고, 부인도 착하고, 물려준 유산도 있고한데
술만 안 먹으면, 알코올 중독만 안 되면
아주 참 훌륭한 거사예요, 마음씨도 착하고.
근데 술만 입에 들어갔다하면 제정신이 아니야.
자기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야, 알코올 중독은. 아시겠어요?
그냥 술 먹고 행패 피우는 거하고 알코올 중독은 틀려.
알코올 중독은 정신병에 속한단 말이예요.
첫째 신용이 없죠.
제정신이 없죠.
그러니까 사업하면 돈 다 날리죠.
정신 있을 때 투자했다가 해까닥 하면 뭐 다 날리니까
신용이 없으니까 거래가 다 떨어지죠.
알코올 중독이라는 게 우리로 말하면 뭐다?
업이다.
업을 우리가 못 이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도 못하니까
“너 끝내라” 이래 말 안 하죠.
왜?
그게 병인 줄 알기 때문에, 내가.
게을러서 안 하는 게 아니고 뭐다?
병이기 때문에 10번을 그렇게 해도 보살핀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10번을 그렇게 해도 스님이
또 물으면 또 대답하고
또 갔다가 와도 또 받고 또 하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
그건 이 중생의 업이 병이란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이 눈에 물건이 보이거나 눈에 뭐가 보이면
머리가 돌아버린단 말이야, 순간에
남자에 미쳐서 남자를 보면 돌아버리니까
그전에 약속한 것도 아무 소용이 없어져 버려.
미친 걸 가지고 얘기하면 뭐 하겠어.
그러니까 이치는 확실하다가
이름으로 나를 삼았다.
이치로 따지면
“이름 부르고, 아무리 욕해도 이름 나하고 상관없다” 이러면 괜찮은데
근데 이런 업으로 자기를 순간으로 탁 삼아서 발칵 한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이치를 조금 아는 사람은
발칵 하는 거는 순간적으로 자기도 무의식적으로 했다 하더라도
금방 어때요?
“아이고 내가 또 집착했구나.
아이고 내가 또 습관에 끌려갔구나”
이렇게 착 돌아오는 맛이 좀 있으면
누구나 다 해탈할 수 있다.
누구나 화내고, 짜증 내고, 엉등성등 해도
이 사람 오뚜기처럼 어때요?
엎어지기는 엎어져도
실제로 언제나 늘 서 있는 게 많다.
엎어졌어도 서는 데 아무 지장이 안 돼.
엎어지면서 또 서 있어.
엎어졌느냐 하면 금방 뚝 서 있다 이 말이야.
근데 그걸 어떻게 엎어져 넘어졌다 그러겠어?
넘어졌느냐 하면 벌떡 서 있는데
그냥 계속 서 있으나
한 번 엎어졌다가 서 있으나 무슨 상관이야?
그거 뭐 그리 중요한 거 아니야
대승불교는 그런 거야.
발이 좀 빠져도 금방 나오면
그거 갖고 시비 안 한다 이 말이에요.
이게 대승불교와의 차이예요.
소승불교는 한 번도 화를 안 내야 되고
한 번도 뭘 안 내게 되고 이러지만은
대승불교는 지 업식으로 원래 성질이 좀 뻑뻑 화를 벌컥벌컥 내도
그것이 가슴에 담아지는 것도 아니고
금방 “아이고 미안합니다. 내가 화냈네요”
넘어가 버린단 말이에요.
자기 가슴에도 안 남아 있고 상대편도
“저게” 했다가 또 생글생글 웃으니 어때요?
넘어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이 중생의 습마저도
인생을 사는데 장애로 등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때요?
양념을 얻은 격이에요. 아시겠어요?
그냥 조용히 가는 것보다 재밌다 이거예요, 재밌다. 아시겠어요?
그냥 둘이 막 그냥 그저 이렇게 조용하게 사는 것보다도
둘이서 그냥 언쟁도 해가면서
그냥 또 싱글벙글.
언쟁하면서 “못 살겠다” 이래 가는 게 아니고
언쟁도 해가면서, 성질도 내가면서, 욕심도 부리고 가는데도
욕심 턱 냈다가도 그냥
“아이고, 욕심을 또 냈네”하고 그냥 가버린단 말이에요.
그러니 뭐라하냐?
업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업을 타고 간다]
파도에만 푹 빠지는 게 아니라
파도까지 없애버리고 잠잠한 데서 뱃놀이 하는 게 아니라
그 파도를 큰 배로 만들어서 파도를 타고 간다 이거야
출렁출렁해 가면서 간다 이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출렁출렁 해가면서.
그럼 놀 때 더 재미있을 거 아니야
가만히 가는 거보다 출렁출렁해 가면서 가면 더 재미있을 거 아니야
출렁출렁했다고 그걸 가지고 막
“이거 안 됐다. 공부가 안 됐다” 이런 말 안 해. 일승에서는.
출렁출렁해도 안 빠지면 돼.
아시겠어요?
설렁 빠져도 배에 기어 올라와도 끄떡없어요.
그러니 불법이 얼마나 재밌고 좋아.
우리가 이걸 모르는 중생은
이 인생사, 온갖 거에 매달려서
한탄하고, 좌절하고 산다, 이거야
이치를 아는 사람은 팔이 하나 부러지면
사는 데 조금 불편해.
옛날에 자동차 없을 때 우리 불편했어? 안 했어?
했지.
그래도 다 살았나? 안 살았나?
살았잖아.
자동차는 있어도 도로포장이 안 되어서 얼마나 불편했어.
그래도 다 살았잖아.
그때 라면 없을 때 국수 먹고 살았잖아.
국수 끓여서 끼니해서 먹으려면
라면보다 시간이 좀 많이 걸리지만
그때도 살았잖아. 그지?
그러니까 육신이 요래 말짱할 때보다
하나가 좀 떨어지면 좀 불편하나? 안 하나?
불편해도 다 살아.
달리기 하면
말하고 사람하고 누가 더 잘 달리노?
말이 더 잘 달리잖아.
달리기만 생각하면 사람이 좀 못하지, 말보다.
“전생에 업이 많아서 왜 못 달리나?”
이래 생각할 수도 있잖아.
그런데 사람은 대신 뭘 만들었다?
자동차를 만들어서 말보다 빨리 달리죠.
그러니까 올림픽 할 때
두 다리 성한 놈이 죽어라 뛰어서 가는 올림픽
2시간, 제일 빨리 달려야 2시간 넘어가는데
장애자올림픽, 앉아서 휠체어 손으로, 엔진 안 달고 그냥 밀었는데
그거는 몇 시간 만에 가나?
1시간 만에 가잖아.
그러니까 뛰는 것보다 배나 빨리 가. 아시겠어요?
그럼 요즘 거다가 손으로 밀다
모타 달아서 조그맣게 만들어 도르르 다니니까
오르막이 좀 못 올라가서 그러지
평지에 사는 데는 지장이 있나? 없나?
없잖아.
그러니까 또 어떻게 어떻게 해서 건물에도 다 계단 없애고
다니도록 자꾸 시설 만들면
사는 데 별 지장이 없어
조금 불편할 뿐이야.
그건 또 연구를 하면
그걸로 인해서 더 좋아져.
사람이 약간 불편을 느껴야 좋아.
그래야 또 편리를 위해서 연구를 하지.
그러니까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인생이 실천적이야.
그래서 낙관론자라 하는 거야. 수행자는.
낙관론자는 막연히 ‘잘될 거다’ 이게 아니라
어이대든 [늘 좋은 점을 찾아낸다] 이거야.
그걸 갖고 울고불고 난리야 안 피운다 이거야.
남편이 살 때는 잘 같이 살고
죽으면 좋은데 재 지내주고
혼자 사는 게 어때요?
스님도 평생 혼자 사는데
“아이고 난 같이 살아봐서 혼자 살아도...”
난 두 번 해보잖아. 그지?
같이도 한번 살아보고, 혼자도 살아보고, 얼마나 좋아.
나는 혼자 사는 것밖에 못 해봤는데.
그럼 뭐가 문제야? 그게.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
“죄가 만해서”
그런 생각할 거 뭐 있어?
또 혼자 어니 사냐?
그럼, 시집 하면 더 가면 되잖아.
그럼 나는 한 번도 못 가봤는데 두 번이나 가보고
얼마나 좋아.
놔놓고 가면 원망 사잖아. 그지?
그런데 죽었으니 원망 살 일도 아니잖아.
그러니 사람이 한 생각을 딱 내려놓고 살면
어이해도 좋아.
‘죽어라’가 아니라
어이해도 좋다 이거야.
'법륜스님 > 2001년 그 시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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