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뚝딱철학

5분 뚝딱 철학) 피론 : 고대 회의주의 (feat. 에포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아이네시데모스)

Buddhastudy 2025. 5. 12. 18:47

 

 

  • 세 가지 유형의 회의주의: 이 비디오는 철학적 회의주의를 종교적, 과학적 회의주의와 구별하면서 시작합니다 [00:05]. 철학적 회의주의는 진리 자체를 얻는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 고대 회의주의의 주요 인물: 이 비디오는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피론과 같은 주요 인물을 소개합니다 [00:47]. 프로타고라스는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믿었고, 고르기아스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반면, 피론의 회의주의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습니다.
  • 피론의 회의주의: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인도를 여행한 피론은 진리를 알 수 없음을 인정했지만, 판단을 유보(에포케)하고 진리를 계속 탐구할 것을 주장하는 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01:39].
  • 피론주의의 발전: 이 비디오는 티몬,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아이네시데무스와 같은 인물을 거쳐 미셸 드 몽테뉴에 의해 피론주의가 부활하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02:16].
  • 판단의 상대성: 피론주의자들은 판단이 관찰자와 판단 대상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03:35].
  • 에포케와 아타락시아: 이 비디오는 피론주의의 핵심 개념인 에포케(판단 유보)를 설명합니다 [05:27]. 판단을 보류함으로써 피론주의자들은 정신적 평온의 상태인 아타락시아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07:11].
  • 피론주의 대 독단주의: 이 비디오는 피론주의를 독단주의와 대조합니다. 독단주의는 충분한 증거 없이 신념을 굳게 지키는 행위로 정의합니다 [05:37]. 피론주의자들은 독단주의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초래한다고 믿었습니다.
  • 발표자의 관점: 발표자는 다양한 철학적, 과학적 질문에 대한 자신의 불확실성을 공유하며 피론주의 정신과 일치합니다 [08:30].

 

 

오늘은 피론의 회의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먼저 회의주의를 이야기할 때 세 가지를 구분해야 하는데요.

종교적 회의주의, 과학적 회의주의 그리고 철학적 회의주의가 그것입니다.

 

종교적 회의주의란

어떤 신이나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을 말하는 것이고,

과학적 회의주의는

심명률, 초능력 굿과 같은 의사 과학을 믿지 않는 입장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철학적 회의주의는

종교적 회의주의나 과학적 회의주의와는 다른데요.

철학적 회의주의는 특정 종교나 특정 의사 과학을 믿지 않는다는 입장이 아니라

진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알 수 없다는 입장을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회의주의자로 세 사람을 꼽는데요.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피론입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면서

세상의 진리란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고르기아스는

세상에 진리 따위는 없으며

설령 진리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영상을 참고하세요.

이 두 사람은 서로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죠.

프로타고라스는 진리는 상대적이므로 모든 것이 진리라는 입장인 것이고,

고르기아스는 진리란 없다는 입장인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같은 말이에요.

상대적인 진리를 진리로 보지 않으면

결국 진리는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피론의 회의주의도 비슷한데요.

피론의 회의주의를 피론주의라고 합니다.

피론주의도 결국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입장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조금 더 적극적이에요.

오늘은 이들의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잠시 후에 시작하겠습니다.

 

 

--피론주의의 계보

먼저 피론의 회의주의의 계보에 대해서 봅시다.

피론은 기원전 3세기경, 고대 그리스 출신의 철학자인데요.

그는 젊은 시절 알렉산드로 대왕을 따라 인도에 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러한 수행자들을 보고

금욕의 삶, 현재의 삶을 배웠다고 합니다.

 

피론은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았는데요.

그건 당연하죠.

자신은 진리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뭘 주장하는 글을 남기겠어요?

그나마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제자인 티몬이 그의 사상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세상은 잠시 명명이 끊어졌다가

기원전 2세기경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의해서 되살려지고

기원전 1세기 경 아이네시데모스에 의해서 집대성이 됩니다.

 

이러한 피론주의를 근대에 되살린 사람이

바로 르네상스 시기의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입니다.

 

몽테뉴는

피론주의를 계승하면서

카톨릭과 융합시키는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어 냈는데요.

그래서 피론의 회의주의라고 해서 피론주의라고는 하지만

피론주의는

피론 한 사람의 사상이 아니라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이 융합된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피론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제가 철학자들의 사상을 따로따로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전체를 그냥 뭉뚱그려서 피론주의라고 설명을 할 겁니다.

 

 

--상대주의

그렇다면 피론주의자들은

왜 우리가 진리를 알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을까요?

 

그것은 판단이라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판단하는 주체나 판단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컨대

한국의 가을은

열대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춥고

에스키모인들에겐 덥죠.

그리고 인간에게 빨갛고 시큼한 사과는

박쥐에게는 그냥 돌과 같습니다.

꿀은 혀로 맛보면 달달하고 좋지만

손에 묻으면 끈적이고 싫어요.

그리고 페르시아에서는 동성애가 허용되지만

로마에서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판단하는 주체와 판단하는 대상에 따라서

모든 판단은 상대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회의주의를 이렇게 한마디로 일가를 했죠.

감각을 믿지 마라

이성의 눈으로 꿰뚫어 보아라.”

그리곤 자신이 세운 아카데미와 간판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 들어오지 마라.”

기하학은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닫아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파악한 세계가 진짜 세계라는 겁니다.

 

 

--에포케

사실 이처럼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결론이

제일 마음이 편하죠.

그래서 프로타고라스는 진리는 상대적이라고 말하고

고르기아스는 진리는 없다라고 말을 하고 끝낸 겁니다.

 

이처럼 회의주의는

철학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기 쉬운데요.

 

하지만 피론주의는

무관심으로 끝내자는 것이 아니었어요.

이들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1) 우리는 아직 진리를 찾지 못했다.

2) 그러니 어떤 것이 진리라고 판단하는 것을 중지하자

3) 그리고 계속해서 진리를 찾아보자.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가

진리가 없다거나 진리는 알 수 없다고 선언하고

진리 찾기를 포기한 것이라면

피론주의는

잠시 판단을 중지하고, 계속해서 찾아보자는 겁니다.

 

완전히 태도가 다르죠.

이것을 판단 중지, 즉 에포케라고 하는데요.

간단히 말해서

괄호를 치고, 답을 계속해서 찾아보자는 겁니다.

 

 

--아타락시아

이렇듯 우리의 지식은 불확실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사람들은 불확실한 걸 못 견뎌해요.

그래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무엇이든 믿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되죠.

 

그래서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 질끈 감고

어떤 사상이나 이론, 주의를 맹목적으로 믿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입장을 피론주의자들은 [독단론]이라고 불렀습니다.

 

독단론자들은

인내심을 잃고, 조급하게 결정을 내리고 안주하려는

철학병에 걸린 환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맹목적 믿음으로 인하여, 마음의 평화가 깨진다는 건데요.

 

독단론자들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는 알지만

그것을 억누르고

확실하다고 자기 체면을 걸다 보니

마음의 평화가 깨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피론주의자들은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단 에포케, 괄호를 치고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생각해 보자는 거죠.

그러면 아주 놀라운 일이 발생을 하는데요.

그 놀라운 일을 섹스투스 엠비리쿠스는 이렇게 비유합니다.

 

어떤 화가가 말이 거품을 물고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그려보고 저렇게도 그려보고 하다가 잘 안 되니까

신경질이 나서 붓을 닦는 스펀지를 그림에 집어던졌는데

스펀지 자국으로 말의 거품이 잘 그려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스펀지를 집어던지는 행위는

어떤 것을 판단하는 것을 중지하는 행위이고

말의 거품이 잘 그려졌다는 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비유합니다.

 

말하자면 판단을 중지하면

이렇듯 우연치 않게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마음의 평화를 피론주의자들은

아타락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타락시아, 어디서 많이 들어봤죠?

,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그 아타락시아가 맞습니다.

최소한의 쾌락으로

최대한의 쾌락 효과를 나타내는 상태인

아타락시아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즉 판단을 중지하고

어떤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으면

스펀지가 말의 입에 거품을 그려냈듯이

우연치 않게 아타락시아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정리합시다

큰 틀에서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진리에 대한 세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는데요.

첫째, 진리를 찾았다고 주장하거나

둘째, 진리 따위는 없다고 포기하거나

셋째, 계속해서 진리를 찾아보자는 입장입니다.

 

첫 번째 입장이 바로 독단론이고

두 번째 입장이 바로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입장이 바로 피론주의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가만히 보면

프로타고라스나 고르기아스는

이들이 진리가 없다고 하는 진리를 말하고 있죠.

그래서 사실 이들의 입장도 독단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피론주의야말로 진짜 회의주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피론이 아무런 글을 남기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제 영상의 댓글에

그래서 니 입장은 뭔데?”라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괜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유물론이 옳은지, 관념론이 옳은지

과학적 지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심지어 제 전공 분야인 시간이 흐르는지, 흐르지 않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양쪽 얘기를 들여다보면 다 그럴듯해요.

 

저의 이러한 입장을 좋게 해석하면

에포케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에포케란

당장에는 진리를 알 수 없으나

계속해서 진리를 찾아보자라는 의미라고 했죠.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저는 죽을 때까지

제가 진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사실 피론주의는 철학사를 소개하면서

한 번은 정리해야 하기에, 의무적으로 만든 영상인데요.

자료를 찾다 보니까

이거 굉장히 매력적인 철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러저런 제 생각도 많이 끼워 넣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잘못된 부분들이 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바로잡아 주세요.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