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재미있죠. 그 안에서 버티면서 바꾸는 것도 양심이고, 아니면 아니라고 또 하는 것도 양심이고. 상황 따라 다르니까 어떤 게 답인지는 그 자리에 계신 분이 제일 잘 알겠죠. 그래서 이런 일이 우리가 말로는 “양심 보살도 합시다.” 하기 쉽지만, 실전에 들어가서는 심각한 일들 아닙니까? 가정문제건 직장문제건, 이런 데에서 저는 바로 올바른 답을 내가 완벽하게 성인처럼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여유롭게 생각을 해보시자는 건데요, 뭐가 내 역량에서 제일 자명한 일인지를 그리고 또 혼자서 하면 힘드니까요, 홍익학당이 버텨줘야 되는 게 홍익항당에 이렇게 여러 연대가 있다고 생각하면 더 힘이 나시지 않겠습니까?
혼자라고 생각하는 거 보다. 상의할 때라도 있어야 되고, 어떻게 하시라고 힘내라고 할 동지들이라도 있어야 되니까. 학당이 버텨주는 게 좋을 거 같고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수련캠프도 양심캠프로 바꾸자하는 게 그날 왔던 사람은 1박 2일 계시면서 양심이 이렇게 양심이 더 힘을 타가지고 가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사회에서 힘드시든 분들이 오셔서 양심을 포기할까? 하던 분이 오셔서 다시 양심의 힘을 더 얻어가지고 가시고 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에 사회에 그런 곳 하나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명상도 그냥 명상하지 마시고 참나를 양심이라고만 이해하시면 엄청난 힘이 생깁니다.
참나라고만 하면요, 좀 마음의 위안이나 얻자는 마음이 커지고 양심이라고 생각하시면 죄짓고 못 산다 까지 가요. 그럼 죄 안 지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되나? 까지 더 시야가 넓어지고 가정이나 사회까지도 바로 잡을 힘이 그 안에 있다는 의식이 들거든요. 그래서 양심으로 설명하는 게 좋고 육바라밀이니 모든 성인들이 얘기하는 사랑이니 뭐 육바라밀이니 인의예지 아는 것들이 다 양심의 요소지 우리가 단순히 양심 그런 부분 단절시키고 그냥 시공을 초월해있다든가 그렇죠? 절대계라든가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참나로만 이해한다면 이게 대게 현상계를 우리가 버리게 되고 단절시키게 되죠.
그래서 이 참나가 양심이라는 요 발상 하나만 가지고도요, 엄청난 일이 가능합니다. 그래도 제가 이런 얘기를 주장하니까 다들 생소하게 여기셔가지고 반발이 되게 많았어요. “참나랑 양심이 어떻게 같냐?” 하면서 양심은 인간이 만든 그런 거고, 참나는 영원한 거래요. 제 트위터에두요. 엄청 그 부분에 대한 인도식 명상한 분들의 반발이 심했어요. 저한테 계속 날아와요. “무심해야지 왠 양심이냐?” 제가 답글에 “양심이 무심이다.” 그냥 보내요. 그 양심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그런 얘기를 합니다. 사단이 원래 하나 없으면 다 없어요. 그래서 뭐하나가 없으면요, 조심해야 되는 게 운전도, 우리 차타고 가다보면 운전이 앞에 차가 좀 이상하면 조심해야 되는 게 방어 운전해야 되잖아요.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거든요. 또 이상한 짓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 살면서도 누가 하나가 좀 이상한 언행을 보이면 좀 조심하셔야 되요. 마음속으로 방어를 하셔야 되는 게 언제든 준비하셔야 되는 게 예. 그 하나의 실수로 허용할 수 있는 그 정도의 영성과 사단능력이라면 다른 것도 얼마든지 허용하거든요. 그걸 그게 무서운 거잖아요. 우리가 저 사람이 대체 어디까지 막나올지. 그걸 모르니까 인간관계에서 늘 우리가 그걸 예민하게 보는 건데, 우리도 알게 모르게 사단을 가지고 보고 있는 거예요. 상대방을. 저 사람이 과연 돈을 갚을까? 안 갚을까? 다 판단해야 되거든요.
저 사람이 갑자기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 정도로 내가 저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는데. 이런 미묘한 문제가요 하루 종일 고민하시는 많은 문제들이 다 사단이 아니곤 해결이 안 나는 문제에요. 그래서 사단 전문가가 되셔버려야지 이게 해결이 나지. 안 그러면은 계속 또 실수하고 또 실수하고 자책하고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집니다. 줄 걸 안줘도 찜찜하시고 안 줄 걸 줘나도 찜찜하시고 이건 답이 없다. 그러면 이건 누군가한테 권위 있는 사람한테 아니면 점쟁이한테 듣고 하자. 이렇게 마음 판단하시기가 쉽거든요. 점쟁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이 그렇게 잘살면 왜 그러고 사시겠어요? 더 번듯하게 사시지.
귀신한테 자꾸 휘둘려요. 아니면 귀신 없는 데 있거나. 그러니까 도 닦는 분들이 거기가실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면 본인이 해결해야 되는데, 본인이 그러면 뭐로 그걸 해결할겁니까? 그러면 도 닦았다는 건 참나를 더 안다는 얘기인데 참나가지고 해결해야 되는데. 왜 참나의 답이 없을까요? 도를 조금 통하는 사람도 신통한말을 하는데, 도 자체랑 바로 연결되면 얼마나 신통할까? 이걸 생각하시고 제가 그래도 다른 분들 얘기 잘 안 해드리는 거 해드렸잖아요. 참나랑 대화하는 법. 인간적인 목소리로 대화하지 마시고요, 자명찜찜의 소리로 대화하세요. 자명하다는 느낌이 드는지 찜찜하다는 느낌이 드는지. 지난번 제가 강의 때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적인 목소리를 자꾸 듣고 계시다면요, 자기에고의 지금 한번 걸러져서 듣고 있다는 거 아셔야 되요.
자기 에고가 한번 왜곡시키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어요. 신기하게 학당에 오셔서 저는 참나랑 대화하는 분들이 오래 못 버티세요. 제가 참나는 이런 겁니다. 자명찜찜이다면 그걸 잘 못 받아들이세요. 내 안에 참아는 다 나한테 얘기해주는데 왜 자명찜찜을 신경 쓰라고 하지? 참나랑 나 사이를 이간질하는 거 같이 제 얘기를 그렇게 들어요. 그러니까 그 목소리가 들리고 뭐하고 다 좋은데요, 그거는 한번 걸러진 거고, 더 근원적인 신호는 참나랑 만남에 참나가 그리고 뭔가 나한테 하는 이렇게 했으면 하는 그 생각이나 그 말에는요, 자명함이 서려있다는 겁니다. 그게 깨어있을 때 느끼는 그런 자명함.
그래서 명상을 자꾸 해보시면서 자신의 생각 불순물들을 자꾸 날려 버리시면서 순수한 참나의 의도를 이해하시려고 노력하셔야지 참나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아~ 그러라”고 하고 따라하면요, 큰일 납니다. 예전에 대행스님이 주인공, 하고 대행스님도 주인공이랑 대화를 하시는 거 같아요. 그런데 그 얘기가 사연이 있어요. 어디 길을 가는데 뭘 해봐라. 하니까 해봤데요. 하다 다리가 다쳐가지고 한참 하다가 이것도 또 주인공이 나한테 또 이렇게 가르치는구나 하고 그렇게 하셨다는데, 그 사연 보면요, 주인공이 시킨 데로 해봤다 낭패 보는 일이 많아요. 대행스님이. 그러니까 그게 들린다고 다 하니까 그래요. 원래. 자명찜찜따져 보고 육바라밀 따져보고 인의예지따져보고 움직이셔야지 마구 움직이면 그게 에고의 소리가 교묘하게 섞여있어서 우리가 모릅니다.
혹시 그런 경우 대비하시라고 참나랑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분들은 제 얘기를 안 들으시더라고요. 자명찜찜 따져보시란 얘기를 안 들으세요. 그 말을 가지고 또 이게 자명한지 육바라밀의 맞는지 따져보셔야 되는데 따져봐서 손해 볼 거는 없잖아요. 참나의 소리가 아무리 들려도 소리로 들린다는 거는 내 에고의 한번 해석이 된 거니까 내가 한번 따져보겠다. 하고 그걸 가지고 또 명상을 하셔서 소리가 들려도 좋으니까 명상을 또 하셔요. 그러면 신기하게 [몰라 괜찮아] 하고 참나한테 다 맡기고 계시면 불순물이 떨어져나가요. 순수한 것만 나와요. 참나의 뜻에 순수한 거 아니고 에고가 붙여놓은 거는 에고가 목소리를 힘을 잃고 목소리를 잃으면서 떨어져 나가요.
그럼 참나의 순수한 게 다시 잘 캐치가 되겠죠. 이런 식으로 늘 내 생각감정오감이 묻어 버린 거는 또 한 번 더 닦아서 쓰고 더 닦아서 쓰고 이러면 그대로 도인이신데, 들리는 데로 따라가기 시작하면은 이게 욕망의 소린인지 뭔 소리인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자기 욕망의 소리가 꼭 그렇게 소리를 내서 들리는데도 몰라요. 그래서 그런 말을 또 제가 자명찜찜 따져보시라고 하면 질투한다고 이래요. 넌 안 들리나보지? 뭐 이렇게 나옵니다. 대화하기 싫은데요. 전 늘 말씀드립니다. 그런 분들도 지금 공부를 꽤하다가 그렇게 됐는데 안타깝잖아요. 한 번 더 나아가기만 하면 깨끗해 질 텐데 그게 안타까웠어요.
공부를 한참 하고 열을 내고 있는데, 뭔가 내가 살짝 거기에 막이 하나 씌워지면서 길을 잃어버리는 이런 일이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제 얘기 듣고 해보세요. 절대 후회하시는 일 없으니까. 그 꼬옥 참나가 대화를 안 하더라도 내 마음의 뭔가 자명하게 턱~ 떠오르는 대로 했는데 오히려 낭패를 봤다 혹시 이런 일이 있으시면 뭐 그런 일 떠오를 때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거죠. 그게 에고가 꽈악~ 차가지고. 에고의 일념상태인지. 에고가 힘을 싹 빼고 있는데 자명하게 느꼈던 건지 요거는 철저히 구별해야 됩니다. 에고가 하나로 모이면요, 자명하게 느껴져요. 그러니까 광신도들이 자기가 하는 품은 신념이 얼마나 자명하게 느껴지겠습니까?
추호의 의심도 안 해요. 제가 예전에 그런 분들 만났는데 진짜 놀랬던 게 진짜 의심을 안 해요. 그러니까 단단하게 저 속에서부터 이 신념이 쌓여가지고 경고한 거 같은데 무너질 땐 또 쉽게 무너지지만요, 그 무섭게 굴 때는 정말 이게 의심을 안 하기 때문에 무섭습니다. 그거를 본인이 혼자 치료하기 상당히 힘들 거 같아요. 너무 단단해진 거는. 그래도 그거밖엔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그 단단해지시기 전에 꼬옥 풀어주세요. “이거 진짜 자명해?”라고 물어봐서 꼬옥 풀어놓고, [몰라 괜찮아]하신 뒤에 “진짜 이거 자명한 거야?” 해서 한번 풀어놓으세요. 하루 종일요, 하실 거 진짜 많아요. 앉아서 평소에 정말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들을 몇 개 꺼내보세요.
진짜 그런지 한 번씩 의심해 보세요. 그러다 한번 찾아내면요, 도둑놈이 자식인 것처럼 들어와 있는 게 있어요. 친한 가족인양 하고. 가면이 벗겨질 때가 있어요. 진짜 믿을 사람인 줄 알았는데, [몰라 괜찮아.] 하고 딱 봤더니 “얘는 뭐지?” 하는 게 “내가 왜 내가 얘에 의존해서 나의 모든 인간관계를 했고, 내 삶을 이렇게 포기했을까?” 하는 회의가 들 정도의 어떤 신념들이 있을 수 있어요. 이 얘기를 남한테 하고 다녔다는 것도 업을 지은 거고, 이렇게 이 원칙에 의거해서 살았다는 것도 업을 지은 거고, 이런 일이 진짜 많습니다. 저도 계속 털어내고 있어요. 가만히 있다 보면요 문득 탁~ 떠올라요. 생각 안해도요, 명상만 하고 계셔도 참나는 우주의 모르는 게 없지 않겠습니까?
참나 자리에 자꾸 계시다보면요, 잘 떠올라요. 어~ 일반 명상하는 사람이 잘 안 떠오르는 건요, 또 다른 고정관념으로 그걸 막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난 참나를 만나서 끝났으니까 다른 건 필요 없다라고 선언을 했기 때문에 안 떠오르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괜찮아요. 저희 학당 식으로 이념을 갖고 계시면 열어놓고 자명한 생각은 언제든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계시면요, 참나 상태로만 있으셔도 자꾸 올라오실 거예요. 무의식이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올라와요. 이게 신비한 차이입니다. 같은 명상하고 있지만요, 나는 참나만 들어가면 생각 끊어지고 너무 좋던데 왜 넌 자꾸 생각이 나냐? 라고 하는데, 무의식에서요, 진리에 대한 생각마저 틀어막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생각도 마장이 마귀의 소행이다. 라고 무의식에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에서 걸러져가지고 생각이 잘 안 올라오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지혜계발이 전혀 안 돼요. 명상만 즐기시지. 그런데 우리같이 참나랑 만나면 지혜로운 생각과 영감이 떠올라야 된다고 생각하시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계시고 수행하시면요, 모른다만 하고 계셔도 계속 올라오게 되어있어요. 에고가 참나랑 만나면요, 참나로부터 뭔가 은총이 자꾸 주어지기 때문에 몰랐던 게 생각나고 잊어버렸던 게 기억나고 이런 식으로 자꾸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있어요. 자기가 잘못했던 것들이 찜찜하다는 걸 알게 되고, 더 자명한 길을 찾게 되고 이렇게 에고는 계속 변해요.
참나랑만 있어도 자명 쪽으로 향하게 되고, 찜찜한 걸 못견뎌하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인의예지가 그대로 일어나버리니까요. 육바라밀이 그대로 에고에 일어나버리기 때문에 태양가까이 가면요, 이 비유 한번만 더 말씀드릴게요. 자주 드렸던 건데 태양은 빛과 열과 에너지가 있거든요. 자체에. 그래서 지구가 태양 근처만 가면 환해집니다. 이게 지혜구요, 참나 근처만 가면 에고가요, 지혜롭게 되어있어요. 근처만 가도. 빛을 받으니까. 지구가 태양 근처만 가도 뜨거워집니다. 이거는 이제 사랑에 비유할 수 있죠. 사랑을 자비로워지게 되어있어요. 마음이 풀어지게 되어있어요. 꽁꽁 얼었던 게 근처만 가면 풀어지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이 무한한 에너지를 받게 되어있어요. 지구의 모든 살림을 태양에너지로 돌리고 있죠. 이 돌아가게 능력이 펼쳐지게 되어있어요. 에고가 갑자기 힘이 나서 파워풀해집니다. 그러니까 참나만 만나시면요, 환해지고 뜨거워지고, 힘이 넘치게 되는 이 변화가 당연히 일어나기 때문에 무의식 쪽으로 억압하지만 않는다면 일어나시게 되어있어요. 인도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이걸 억압해요. 왜냐하면요, 지혜로워지면 또 업을 짓게 되거든요. 자비로워지면 또 남한테 잘해주기만 해도 업을 짓게 되서 윤회 해탈을 못한다고 윤회에서 못 벗어난다는 생각이 있어요. 능력이 있어도 안 돼요. 능력을 가지고 자꾸 일을 저지르면 업을 자꾸 지으니까.
그래서 그게 나오는 걸 대게 억업하는 마음으로 명상을 하니까 잘 안 나와요. 안에서는 계속 지구를 뎁혀도 이 사람이 틀어막아버립니다. 그 짓을 하면 내가 또 다음 생에 또 태어나야 된다는 걱정이 있어요. 실제론 또 태어날 텐데도 그냥 기웁니다. 자기가 만들은 환상 때문에 막아야 된다고. 그럼 세세생생 그 짓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또 억울할 일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요, 그건 그의 소승의 길이고, 대승의 길은 자꾸 풀어놓으니까 그 뜨거움을 가지고 지구에다 베풀고, 그 선명함을 남들한테 얘기해주고, 그 파워풀한 힘으론 또 좋은 업을 지어놓고 가고 다음 때 또 와서 늘 그 짓을 또 하고 또 하고 하니까 지구도 좋아지고 자기도 좋아지고, 자기도 계발되고 지구도 다른 사람도 그 혜택을 맛보는 이게 보살이거든요.
이게 참나가 시키는 데로만 하면 될 일을 참나가 하라고 하는데 자꾸 뜨거워지고 저절로 선명해지고 하는 건 참나가 하는 거지, 우리가 한 게 아니잖아요? 그럼 누가 옳은지는 대번에 알아요. 누가 지금 에고를 쓰고 있는지. 참나가 데워 놓은 데로 살아가는 사람이 순리를 따르고 천명을 따르는 사람이지, 틀어막고 있는 사람이 문제인거잖아요. 그 사람들은 지금 오해에요. 인도명상가들은 지혜 자비를 쓰는 사람들을 업 짓는 사람이라 그러고 아직도 에고를 못 벗은 사람. 자기들은 에고를 초월한 사람, 나는 지혜자비 이런 게 나오는 데로 다 막아버리거든요. 그래서 참나 이외엔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 이렇게 해가지고 가치를 뒤바꿔놨어요.
이게 지금 전 세계 퍼져가지고 전세계명상가들이 대게 곤혹스러워 해요. 특히 서양인들은 활동적인데, 인도명상이랑 안 맞아요. 원래. 지금 서양인들이. 그러니까 이게 이걸 따르면서도 이게 뭔가 찜찜한 게 또 올라오는 거죠. 이러면 양심이 찜찜할만하죠. 그러니까 티베트 쪽으로 갔잖아요. 인도가 주류가 됐다고 그다음에 티베트로 관심을 돌려서 지금 인도에서 티베트로 옮겨갔다고 그 뭐죠? 학자님들이 얘기하시더라고 만나서 얘기해봤더니. 영성의 주류가 지금 미국에서 티베트로 갔다. 티벳은 대승적이거든요. 주장이. 그게 더 마음에 와 닿는 거예요. 소승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그건 아닌 거 같다는 걸 너무 느낀 거죠.
그리고 이해되시죠? 이런 흐름들. 우리도 명상할 때 끝까지 참나만 자꾸 만나고 계셔도 지금 앞으로 2시간 동안 또 하시겠지만 이 말만 드리고 또 실습 하시죠. 마음 다 비우시고 잘하려도 하지도 마시고요, 사단이 용쓴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참나랑 만나서 내 마음이 에고가 풀어지고 밝아지고 힘이 넘치면 그 힘을 세상에 표현하는 도구가 사단이고 육바라밀일 뿐이에요. 근원이 말라있는데 억지로 하려고 하면 거짓이 되고, 포장이 되요. 이 신빨 떨어졌는데 장사하려면 공부해야 잖아요. 사주공부. 에니어그램도 배우고. 이게 신의 힘으로 그냥 되던 게. 그렇죠. 내 생으로 하려니까 내가 머리 써서 해야 됩니다.
이런 것처럼 확연하게 달라요. 참나의 힘으로 그냥 나오는 사단과 해야 되서 하고 있는, 이게 너무 이거는 맛이 다릅니다. 그건 어둠속에서 사단을 하겠다고 헤매는 거랑 밝은 대낮에 하는 거랑 그 차이에요. 밝은 대낮에 길 찾기는 너무 쉬운데요, 어둠 속에서 길 찾으려면요, 온갖 추측과 아마 전해들은 얘기로 서로 어디쯤 가면 뭐 있데. 해서 가봤더니 낮에 환해지고 보면 엉뚱한 길에 있기가 쉽죠. 이게 불 끄고 밤에 뭐 하나 찾으시라면 못 찾아요. 불켜면 아무 일도 아니죠. 그러니까 불 켜고 하는 사단이 되어야지 불 끄고 어둠속에서 에고로 하는 사단은 안 돼요. 혹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가 더 쉽고, 나는 자명하다고 한 게 남한테 피해주기도 쉽고. 이게 너무 못 믿을 사단이 되요.
그래서 내 마음이 먼저 밝은지 보시고 그 밝은 마음에서 나오는 데로 하는 게 우리가 사단 육바라밀이니까. 노트 쓰시기 전에도 꼭 명상을 하셔야 되고, 그걸 또 분석한 사단을 실천하실 때도 반드시 그 마음으로 하셔야 됩니다. 혹시 그 마음, 어두운 마음으로 하시다가도 정신 차리시면 되요. 욕심으로 보시를 하다가도 “내가 왜 이러지? 몰라 괜찮아” 하시고 딱 줘버리면 끝나면 되죠. 혹시, 욕심으로 주신 뒤에라도요, 줘놓고 자꾸 줬다는 거 생각하시다가도 “몰라 다시 왜 내가 어둠속에 있지? 불 켜면 될 일을?” 언제라도 불을 켜버리세요. 불키고 나면 말짱해집니다. 불 키고 나면 욕심으로 하는 일도요, 내가 몰라해버리니까 더 이상 나한테 피해를 안주고 좋게 돌아가죠.
이게 과거에 한 일에까지 다 영향을 줘요. 지금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과거도 달라지기 때문에요, 과거가 나한테 미치는 결과가 달라져버리죠. 이런 식으로 늘 그 참나랑 만나실 때 참나랑 단순히 참나와의 만남이 귀한 게 아니라, 에고의 찬가에선가 제가 그렇게 얘기를 했었습니다. 고작 참나 만나자고, 고작 참나가 아니고요, 고작 하고 참나 만나자고, 고작 참나 만나자고 우리가 이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참나랑 함께 우주를 굴러다니려고 지금 이 공부를 하는 거기 때문에 내 삶 전반이 전체가 참나의 뜻 그대로가 되게 만들려고 공부한 거지, 산을 포기하고 참나만 만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취지를 잘 이해하시면, 지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참나를 만나는 거는 얼마든지 좋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시고 [몰라, 괜찮아] 하고 참나로만 한 두 시간 존재해보세요. 그럼 더 영감이 뜨거운 게 능력이 힘이 솟아 나와요. 그걸 가지고 또 가정에 가셔서 또 사회에 나가셔서 쓰시면 되거든요. 쉴 때는 확실히 쉬시고요, 이 두개가 본래 하나라는 걸 알고 쉬시면 괜찮습니다. 참나로 쉬면 안 되고 명상할 때도 “사단 놓치면 안 되지 않나?” 이러지 마시고. 그런 생각을 누가 하는 겁니까? 에고가 하잖아요. 쉬세요. 그럼. 참나가요, 여러분을 사단으로 끌고 다니실 거니까, 참나한테 다 맡기고 쉬시면 명상 중에 좋은 생각이 날거에요. 집에 가서 오늘 뭘 해야 되겠다. 아니면 그 사람한테 뭔 말을 해서 상황을 정리해야 겠다든가. 그때 해버리시면 끝나요. 이게 참나의 결에 따르는 사단은 아주 쉬운데 억지로 하는 사단이 아주 힘들어요.
어둠속에서 길 찾으니까 얼마나 어렵습니까? 공은 많이 쓰는데 효과는 별로 없는 그런 사단이 되는 거죠. 예. 꼭 참고하시고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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