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무한세계로의 탈출... 그리고 깨달음!

Buddhastudy 2024. 3. 27. 20:00

 

 

수행이란 영적 진화 과정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차원 내에서

무한히 영적 진화를 해봤자 제자리에 불과합니다.

이는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면서

그 수를 세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모름지기

자신이 갇힌 차원에서 탈출하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차원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듯 차원을 벗어나려는

주체와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돼야 합니다.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존재가 뭐꼬?’의 화두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을 철학의 영역에서 다루면 존재론이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과거의 수행자와 철학자들은

존재의 실상을 밝히는 데 모두 실패하고 맙니다.

그들의 실패는 한 가지 교훈을 남기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유한의 세계에서는

진리를 결코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때부터 철학은 무한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어쩌면 실존은 무한의 세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렇다면 무한이란 무엇일까요?

무한끝이 없이 영원히 반복되는 현상으로 정의됩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무한이 있을까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당연시하는 유한은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가령 우리의 몸뚱이를 쪼개보면

소립자들이 나오고

그 소립자를 계속해서 쪼개면 무한이 됩니다.

우리의 신체가 유한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무한인 셈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무한이므로 가능합니다.

가령 A에서 B로 이동하려면

AB 사이의 공간을 무한대로 쪼개서

결국 AB의 거리가 0에 가까워지게 해야 합니다.

 

물론 0이 될 수는 없지만

0의 무한대로 가깝기에

우리의 눈엔 A에서 B로 도달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한집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무한의 법칙에 따라 그것들이 움직이며 변화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무한이란 실제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요한을 해석하기 위해 도입한 가상의 수단인 것일까요?

 

수학자들은 무한을 사측 연산에 대입하고

이때 나온 답에 머리를 갸우뚱하곤 합니다.

 

가령 무한+무한이나 무한-무한의 답이 뭘까요?

사칙연산으로 보면

첫 번째는 무한이고

두 번째는 0이 됩니다.

하지만 무한의 세계에서는

유한의 세계에서 쓰는 사칙연산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보는 각도에 따라 답은 수시로 달라집니다.

 

무한이 0이 되기도 하고 또는 1이 되기도 합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

1+1-1+1-1+1-1+1-1+1을 무한대로 하면

무한은 어떤 때는 0이 되고 어떤 때는 1이 됩니다.

이것을 달리 보면

1도 아니고 0도 아니게 되거나

1이면서 동시에 0이 되기도 합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무한은 모든 것이 되면서도

모든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 자체도 성립하지 않게 되지요.

 

그러니 무한의 입장에서 보면

양자역학의 상태중첩이란

무한의 극히 일부 현상에 불과하게 됩니다.

 

관찰할 때 상태가 결정되는 현상 역시

관찰 자체가 유한의 세계로 연결되기 때문인 것이지요.

 

물론 양자의 세계가 무한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양자의 세계는 무한에 좀 더 가까워진 것이고

그래서 상태 중첩과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뿐입니다.

 

생과 사가 공존하는 상태 중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도

유한의 입장으로 한정했을 때 얘기인 것이죠.

 

아무튼 수학자들은 무한에서 차원의 탈출을 엿봤습니다.

무한의 한 단면을 3차원으로 보았고

무한의 의식을 지니게 되면

그것을 영적 도약으로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한의 존재가 실존일까요?

무한이 실존이 되려면

스스로 존재하는 원리를 규명해야 합니다.

 

과거의 신학자들은 무한세계를 신으로 보았고

그래서 무한에 대한 연구를

신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무한의 가치는 신비로우면서도 무궁합니다.

하지만 무한이 제일 원인이 되려면

반드시 자존의 근거를 찾아야 합니다.

 

무한이 과연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만일 무한에서도 1 원인을 찾지 못한다면

무한을 포용하는 더 큰 차원이 또다시 있어야 합니다.

 

도대체 무한과 유한의 실체는 무얼까요?

그 가운데 한점인 는 누구일까요?

 

인류사상 이 답을 처음으로 부른 사람이 싯다르타입니다.

그리고 이 답을 찾는 가르침이 불교이고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극도로 무한을 싫어합니다.

무한이 되면

라고 할 것이 없게 되어 무아가 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무한을 다루는 불교를 또다시 유한으로 좁혀

참나나 불성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유한이 되어야만 구원도 있고 열반도 있으니까요.

 

물론 참나와 불성의 포장지는 무한을 표방하지만

그 내용물이 유한에 갇혀 있는 것은 명백합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유한에 갇혀 있고 싶으신가요?

그 유한을 탈출하는 법을 세존이 기치로 들었고,

그 가르침이 아직도 남아있음에도

여전히 참나불성의 유한에 매달리고 싶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