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한]과 [무한]이 전제돼야 합니다.
유한은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고
그렇다고 무한만 있다면
어떤 특정한 상태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무한의 바탕 위에 유한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지요.
더 정확히 말하면
무한과 유한이 불가분의 한 덩어리가 되어 존재하게 됩니다.
여기서 요한 세계의 중심을 일컬어 ‘나’라고 부릅니다.
삼라만상 모든 것들은 유한의 주체인 나를 근간으로
저마다의 세계를 창조하게 되지요.
사람 역시 같습니다.
예외 없이 나를 더 뚜렷하게 만들기 위해 전력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속어로 ‘나 잘난 맛에 산다’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리고 나 위주로 사고하는 것을 일컬어 [에고]라고 하고요.
에고란 나를 유한에 묶어놓으려는 힘을 뜻합니다.
나를 한정시킬수록 나의 색채는 뚜렷해집니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나의 존재가 강렬해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재력이든 권력이든 아니면 어떤 재능을 통해서
나를 돋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유한성이 강해지는 것에 반비례에서
나의 무한성은 줄어듭니다.
가령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노숙자와 천하를 통일한 진시왕을
비교해 봅시다.
둘 가운데 유한성이 강한 인물은 당연히 진시왕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시왕은 자신이 죽어 소멸하는 것에 더 큰 압박감을 느낍니다.
천하의 주인인데 그것을 놓고 죽는다는 사실이 매우 억울할 테지요.
그러니 연금술이나 불로초에 혈안이 된 것은 당연합니다.
반면에 노숙자는 가진 것이 없으니
진시왕보다는 삶에 대한 집착이 훨씬 적을 것입니다.
이렇듯 유한이 커지는 것에 반비례해서 무한이 줄어듭니다.
이 원리에 의해 모든 수행이 비롯합니다.
수행자들은 유한이 커질수록
생로병사에 대한 집착과 번뇌 망상이 커지는 현상을 잘 압니다.
그래서 유한의 뿌리인 아상을 없애는 데에 공을 들이지요.
아상의 재료는 역시 분별입니다.
그래서 분별을 없애기 위한 온갖 수행법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가질수록 유한성이 커지기에
무소유도 강조합니다.
이렇게 아상을 모조리 없애면 남는 것이 [무아]입니다.
무아란
나의 좌표가 사라져 [무한]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나라는 유한이 자취를 감추고 무한으로 존재하는 상태이지요.
그런데 말이 무한이지 유한에 ‘나’가 없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어떻하든 다시금 유한을 만들어 내려고 애씁니다.
세존이 무아를 주장했으니 대놓고 부정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무아를 그대로 받아들이자니 너무 허망했습니다.
그래서 고심한 끝에 무한한 유한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불성, 본성, 참나 같은 명제들입니다.
‘텅 빈 마음 바탕’ ‘공한 자성’이란 말을 만들어서
‘무한한 나’가 탄생한 것이지요.
더 쉽게 말하자면 무한 자체가 ‘나’라는 얘기입니다.
무한에 성품을 붙여서 무한 전체를 나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무한의 범위를 정하지 않았기에
어찌 보면 무한의 무아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세존의 무아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무한을 ‘나’로 놓는 순간 무한은 깨집니다.
무한은 무한 그대로 놔야지
여기에 어떤 설정을 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면
무한의 성질은 퇴색하고 맙니다.
그래서 무한의 ‘나’인 참나나 불성은
도로 유한의 ‘나’가 됩니다.
왜 수행자들은 나를 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참나를 붙잡으려는 것일까요?
그건 그냥 유한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한의 존재로서 프로그램 되어 있기에
해탈이나 열반에 이르러서도 유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한의 프로그램을 포맷하기 위해
세존께서 무아를 기치로 들었고
또한 유한의 떡고물인 해탈과 열반을 멀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한이 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무한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한이 곧 실존이 되어야 합니다.
무한이 ‘제1원인’이라면
당연히 세존의 무상정등각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무한이 과연 실존일까요?
무아는 어느 무엇에 의해 생겨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무한 역시 3차원적 사고의 틀에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무한을 이해하면
우리의 차원을 벗어나는 발판이 되어줄 것입니다.
유한의 프로그램에서의 탈출은 무한에서 비롯하니까요.
이것이 세존의 무아론이 수행자들에게 주는 참된 가치입니다.
당신은 ‘유한의 나’를 가지고 싶으십니까?
그래서 참나와 불성에 그토록 집착하시나요?
참나와 불성의 상태를 아무리 체험해도
당신의 두뇌는
단지 호모사피엔스의 기본 용량에 딱 멈춰져 있을 뿐입니다.
우주와 생명의 프로그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포맷의 열쇠인 세존의 무아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혹시 불성과 참나라는
고도로 정교해진 ‘아상’에 매여 있지는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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