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들이 추구하는 목적지가 어디일까요?
그건 바로 해탈입니다.
해탈이란
중생을 옥죄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무한히 자유롭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일체의 번뇌망상이 사라져 열반에 휩싸이게 되는 건 필연입니다.
그러면 아무런 걸림이 없는
사사무애(事事無碍)한 의식만 갖추면 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환각성분을 복용하거나 뇌에 전기적 자극을 가해 생겨나는 초월의식은
해탈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해탈은 어떤 조건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과因果에 의한 조건적 생성을 有爲法이라 하는데
불교의 해탈은 이런 것에 반해 無爲法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어떤 조건도 없이 저절로 그러해야 한다는 것으로
道家에서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불교의 해탈은 어떤 기분 상태여야 할까요?
그걸 알려면 일단 번뇌망상이 없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는 마음 상태여야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어떤 철학적 의문도 없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존재란 어디서 왔는가?’ 같은
제반의 본질적 의문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들은 모두 ‘실상實相이 있다’는 착각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럼 번뇌망상이나 탐진치가 없고
일체의 철학적 의문도 생기지 않는 마음 상태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며, 깨달음의 진면목이 맞을까요?
오늘날의 불교 학자들이나 수행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해탈의 심리 상태를 면밀히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탈하면 과연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말입니다.
탐진치와 철학적 의문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진귀한 물건을 봐도 탐하는 마음이 없고
누명이 씌워져 비난을 받아도 노여움이 없습니다.
생로병사에 대한 궁금함도 없고
‘나’와 ‘우주’를 비롯해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문조차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요?
사고실험을 해보면 우리 주변의 어느 특정 인물로 좁혀지게 됩니다.
바로 바보 멍청이입니다.
바보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바보도 탐진치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반드시 멍청이를 결합해야 합니다.
이렇게 바보멍청이가 되어야
번뇌망상이나 탐진치에 대한 반응이 현저히 줄고
더군다나 어떤 철학적 의문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됩니다.
실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에 부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자꾸 수행자들이 佛法을 왜곡하면서까지
바보 멍청이가 되려는 걸까요?
사실 어떤 위험이나 고통이 있을 때
맞서 싸워서 해결되지 않으면 도망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이 도피처로서 신앙을 선택하는 건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수행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로병사에서 오는 번뇌망상과 맞서 싸우기에는
그들이 가진 이성의 힘이 너무 미약합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도피처를 찾게 됩니다.
그렇다고 배운 것은 있어서 신앙으로 숨기엔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바로 힌두교의 해탈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마음을 비우고
머릿속을 멍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진리에 대해 알려는 욕구를 모두 없애면 됩니다.
그래서 제법무상과 일체개공을 주문처럼 외며 머릿속을 비웁니다.
삼라만상은 허구이고 환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만물은 조건 지어 합성되고
인연 따라 변화함으로써 실체가 없는 환영이니
이런 것들에 얽매여 고뇌하고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얘기를 반복적으로 세뇌하면
진리적 욕구가 사라지고 멍해지게 됩니다.
이때 ‘몰라’까지 섞어주면 효과가 배가됩니다.
화두의 끝에 이르러 ‘앎의 세계’를 과감히 벗어나는 겁니다.
이렇게 머릿속에 철학적 의문을 모조리 없애면
멍청이가 되고 연이어 바보가 됩니다.
그리고 바보 멍청이가 한 번 되고 나면
그때부터 선지식 소리를 들으며 만인의 존경도 우러러 받게 됩니다.
머릿속엔 터럭만큼의 진리도 모르면서
세상만사를 모두 달통한 것처럼 연기를 하며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들은 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체유심조’를 입에 달고 삽니다.
“마음을 모두 비우니 삼라만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도다.
마음 밖에서 道를 구할 것이 없나니, 이것이 곧 깨달음이다.”라고 말하지요.
이런 우스꽝스런 얘기가 대를 이을수록
점점 권위가 붙게 되면서 불변의 진리처럼 굳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을 비우려고 하는 걸까요?
마음이 비워지는 것에 비례해서 생각 역시 줄어들게 됩니다.
그만큼 번뇌망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생각이 왕성히 움직여 의문을 내면 낼수록 답답하고 괴로워집니다.
존재의 본질에 대해 깊이 파고들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뚜렷해지며
마치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 유발합니다.
피조물의 한계만 더욱 부각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고통에서 탈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몰라’에 숨게 됩니다.
그러려면 마음을 비워 생각을 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이 대폭으로 줄어 탐진치가 가라앉으면 평안이 찾아옵니다.
이때의 심리 상태를 해탈이라 부르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랑처럼 떠벌리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보 멍청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불립문자’와 ‘언어도단’, ‘이심전심’, ‘견성성불’, ‘일체유심조’ 같은
방패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바보 멍청이를 만드는 놀라운 기술
그건 바로 대다수의 수행자들이 거론하는 해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존이 거론한 진짜 해탈은 어떤 것일까요?
그건 매우 단순합니다.
진리를 깨우쳐 全知에 이른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존재의 본질을 깨우쳐 ‘나’의 틀에서 자유로워진 의식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의 존재의 본질이란 바로 ‘제1원인’을 말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해탈하는 법은 없습니다.
세존이 방편으로 쓴 연기나 中道, 無我로는
‘제1원인’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대승불교의 ‘空’으로도 논리적으로 접근이 안 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佛法에 의지하되
그 궁극엔 佛法을 버리라’고 설한 것입니다.
연기, 中道, 無我, 空을 방편으로 삼아
그 너머에 있는 實存을 이성적으로 깨우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불교 진리의 진면목입니다.
진리의 영역엔 변명이나 구실, 화려한 수식어 따위는 필요치 않습니다.
진리는 오로지 아느냐 모르느냐 딱 두 개만 존재하니까요.
당신은 아직도 수행자들이 말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를 해탈이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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