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이란
사람들마다 본래 가지고 있는 순진무구한 성품으로
이것을 힌두교에서는 참나(아트만)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참나(아트만)를 보면
절대적 존재인 브라만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참으로 그럴듯한 이론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론을 과감히 부수고 등장한 것이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구조적으로 ‘참나’, ‘본성’, ‘불성’, ‘순수의식’, ‘바탕의식’, ‘전체의식’, ‘우주의식’, ‘알아차림’ … 같은 용어들이 등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를 세운 세존께서 이런 것들을 죄다 부정하면서
‘無我’를 기치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출범하면서 은근슬쩍 佛性이 끼어들게 됩니다.
그리고는 달마가 그 佛性을 가지고 중국에 건너와서 더 넓게 펼쳐 놓습니다.
달마는 ‘본성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늘 제자들에게
‘마음의 밖에 道가 없으니
자신의 본래 마음을 보는 것이 견성이고 깨달음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견성성불’이란 말이 알려지고
이것을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등장해
차례로 힘을 실어 줌으로써 크게 맹위를 떨치게 됩니다.
오늘날에 와서도 ‘견성성불’은
절대적 진리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현실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정작 불교를 창시한 세존은
‘견성성불’을 타파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의 길을 세웠습니다.
다시 말해 불성이나 본성, 참나 같은 ‘실상론(實相論)’에 반대하면서 불교를 출범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의 말이 사실인 걸까요?
‘견성성불’을 모체로 탄생한 중국의 선종은
바로 이 부분이 마음에 걸리게 됩니다.
세존의 佛法과 상반된 이론을 주장한다면
이단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세존 역시 ‘견성성불’을 주장했다는 구실을 어떡하든 찾아야 했습니다.
초기경전에서 세존이 방편으로 쓴
‘선법(禪法)과 유사한 몇몇 구절’만 발췌해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불경에는 없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을 꾸며내게 됩니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라는 위경(僞經)을 만들어
삼처전심(三處傳心)을 그럴듯하게 끼워 넣은 것이지요.
삼처전심(三處傳心)이란
세존이 마하가섭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허락했다는 분반좌(分半坐)
그리고 세존이 연꽃을 든 이유를 마하가섭만 알아채고 웃었다는 염화미소(拈花微笑)
마지막으로 세존의 관(棺)에 마하가섭이 다가서자
두 발을 움직여 내보였다는 곽시쌍부(槨示雙趺)를 각각 말합니다.
이는 결국 세존이 언어 외에도
어떤 상징적인 모습으로 인가해 法을 전해줬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교외별전(敎外別傳)이 되면
불경에는 없어도 佛法이 될 수 있는 논거가 생깁니다.
세존이 마하가섭에게 언어가 아닌 마음으로 法을 전했으니
불경에 없는 ‘견성성불’ 역시 세존의 정법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존은 평생토록
‘견성성불’, ‘이심전심’, ‘교외별전’, ‘언어도단’을 부수고
法에 대한 이해와 논리를 구하는 쪽으로 매진하였습니다.
그림으로 치자면 추상화를 멀리하고 정물화를 가까이 하셨던 셈이지요.
세존은 이해와 논리에서 벗어난 힌두교의 ‘마음타령’을 사이비로 봤습니다.
그런 세존이 미소를 씨익 흘려 마하가섭에게 法을 전하고
사후에 두 다리를 쓰윽 보여주면서
마하가섭을 인가했다는 것은 실로 참담한 발상입니다.
결과적으로 달마가 가지고 온 ‘佛性’에
중국인 특유의 허풍이 결합되어
‘견성성불’이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허풍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전해오면서
한국불교의 대간을 차지하게 된 것이고요.
물론 몇몇 선지식들은
佛性을 中道와 緣起, 그리고 空으로 풀어
세존의 無我와 연결하였습니다.
하지만 佛性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 자체가
이미 ‘空한 自性’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참나’와 다르지 않게 됩니다.
無我를 아무리 ‘空性’으로 풀어봤자
그건 힌두교의 전형적인 논리에 불과합니다.
사실상 ‘空한 성품’은 無我가 아니니까요.
이렇다 보니 세존의 中道를 내세워
無我와 佛性(참나)의 경계를 허물고
양시론(兩是論)을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집니다.
本性, 佛性, 空性, 참나… 같은 건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건 我相이 어떡하든 자신의 존재를 돋보이기 위해 꾸며낸 허상들입니다.
익히 알듯 我相을 없애야 時空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실제로 我相이 사라지면 만사가 허망해질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我相을 둘로 쪼개서
‘가짜 我相’을 날리면 ‘진짜 나’인 佛性이 남게 된다는
얄팍한 꾀를 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마음’이 절대적으로 부상하고
‘마음을 닦는다’는 유교(儒敎)식의 수양이 힘을 받게 됩니다.
가짜 我相을 순차대로 지워나가는 작업인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참나’, ‘本性’, ‘佛性’, ‘空性’… 같은 것들이 남으면
여기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주장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我相이 어떡하든 살아남기 위해
불생불멸의 슈퍼 파워를 지닌 ‘佛性(참나)’을 날조하게 된 것입니다.
세존이 ‘견성성불’과 ‘일체유심조’에 찌들은
오늘날의 수행자들의 모습을 본다면 과연 어떤 심정일까요?
안타까워 마음을 조이실까요?
기가 막혀 실소가 나오실까요?
아니면 그냥 무심으로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계실까요?
‘마음’을 강조하면 마치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키는 것처럼
我相은 ‘佛性(참나)’의 가면을 쓰게 됩니다.
반면에 無我가 되면
我相은 힘을 쓰지 못하면서
머릿속에 오로지 ‘왜?’만 남습니다.
‘나’가 사라지면서 남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의문’뿐입니다.
그래서 세존은 無我로써 我相을 죽이고
그 자리에 ‘진리에 대한 갈애’가 샘솟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불교의 구도심이고
여기서 진리적 자각이 일어나 깨달음의 동인이 됩니다.
세존이 그토록
힌두교의 ‘일체유심조’와 ‘견성성불’을 멀리하고 타파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마음’에서 깨달음의 열쇠를 찾고 계시나요?
‘견성성불’을 세존의 정법이라고 굳게 믿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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