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각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건 한마디로 ‘불안감’입니다.
불안한 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쪽으로
모든 생물의 에너지는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체는 열역학 제2 법칙에 반해 점점 복잡한 질서를 구축하게 됩니다.
불안감을 줄이려면
약육강식의 생태계에서 어떡하든 우위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도 재물과 권력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런 것만 가지고는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대를 이을 종족에 투자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생로병사의 수레바퀴는
모든 노력을 허망하게 끝내고 맙니다.
그래서 사후 보험을 판매하는 것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종교적 신앙을 한다고 불안감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들어놓은 보험이 사기일 확률이 늘 존재한 일까요.
정작 죽고 나니 굳게 믿던 신이 일개 잡신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불안감을 씻기 위해 신앙의 강도를 높여 맹신하게 됩니다.
거의 미치다시피 해야 불안감이 뜰 해소 되는데
그렇더라도 인간의 이성은 무의식적으로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맹신을 해도 마음 한편에선 늘 불안감이 도사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불안감을 근본적으로 떨쳐낼 수 있을까요?
불안감의 원인은 시공의 한계에 있습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수밖엔 없습니다.
수행자들이 종교적 신앙을 멀리하고 시공을 화두로 잡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양대 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시공은 하나이고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실체가 없는 한낱 정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시공의 축에 꽉 끼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입장에선
시간과 공간은 엄연한 현실이고 넘을 수 없는 철옹성을 분명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어떡하든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이 둘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길이 있다면 좋지만
3차원에 사는 입장에서는
나뉘어져 있는 그 둘을 하나씩 공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차례대로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해결해 볼까요?
먼저 공간의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현재의 ‘나’가 불안한 이유는
공간적으로 보면 먼지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나’의 덩치를 한없이 키워보면 어떨까요?
‘着’을 끊어 외계와의 공명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의식을 확장하면 우주의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개체가 아닌 전체의식이 된 것이지요.
‘나’가 우주가 되었고 더 이상 확장될 여지가 없으면 이를 해탈이라 부릅니다.
해탈된 상태는
개체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니 열반도 덩달아 생겨납니다.
공간에서 일개 먼지에 불과했던 ‘나’가
연결을 통해 전체의식이 되고
이로써 해탈과 열반을 이룬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탐진치도 거의 일어나지 않고
청정한 의식이 유지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불안감이 완전히 해결되었을까요?
전체의식을 유지하면 불안감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그냥 무생물처럼 눈만 깜빡깜빡하고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상태인 것이지요.
어떤 정보를 가지고 세상일에 개입하려 하면
전체의식은 금세 사라지고 현재의식이 움직입니다.
이와 동시에 개체의 불안감은 또다시 지펴집니다.
결국 공간적 수행으로 얻은 전체의식은 일종의 피난처에 불과하게 됩니다.
도피처에서 돌멩이 같은 의식으로 계속 머문다면 불안감은 해결되지만
반면에 존재할 의미를 잃고 맙니다.
미술 시간에 그림은 그리지 않고 도화지만 붙들고 있는 꼴인 셈이지요.
그런데 인류의 모든 수행은 이와 같은 공간적 수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시간적 수행을 들고 나온 독특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싯다르타입니다.
그는 익히 아시다시피 죽어가는 노인을 보면서 시간의 장벽을 느끼고 불안감을 얻습니다. 그리고 시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수행에 나섭니다.
하지만 당시의 수행은 공간적 수행밖에 없었습니다.
싯다르타는 공간적 수행을 완성하면
시간의 문제도 덩달아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브라만교의 공간적 수행에 전념하여 그 끝에 도달합니다.
전체의식에서 오는 해탈과 열반에 휩싸여 있을 때는
시간의 장벽 또한 사라졌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문제를 풀고 자시고 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바윗돌 같은 상태로 계속 있을 때만 유효했습니다.
한 생각이라도 일으키면
자신의 위치가 時空의 좌표에 찍히면서
곧바로 시간의 문제에 걸리고 맙니다.
연이어 불안감은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따라서 싯다르타는 무생물처럼 굳어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정녕 깨달음이란 말인가?’
공간적 수행에 실망한 싯다르타는
스승의 곁을 떠나 홀로 시간적 수행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찾은 시간적 수행법이 바로 연기론緣起論입니다.
삼라만상은
고정된 실체가 없이
인연지어 변화해 나간다는 얘기가 이래서 나오게 됩니다.
공간에 펼쳐진 만물을 시간의 흐름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나’가 ‘無我’인 것이고요.
아무튼 연기론은
불교의 깨달음이 아니라
불교가 나아갈 ‘시간적 수행의 지침’을 바로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佛法은 한마디로 ‘시간적 수행’으로 함축됩니다.
그럼 시간의 문제를 풀면 어떻게 될까요?
시간과 한판 붙기 위해서는 그
것이 시작된 첫 단추를 찾아야 합니다.
수십만 마리의 벌을 통제하기 위해
여왕벌 한 마리를 손에 쥐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시간의 여왕벌이 바로 ‘제1원인’입니다.
만물의 근원이니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세존은 결국 ‘제1원인’을 찾았고
그 순간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동시에 풀리며
무상정등각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을 전할 방법이 없었고
그는 연기론을 통해 ‘시간적 수행’의 길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합니다.
이후 용수보살이 나와서
세존이 만든 ‘시간의 길’을 좀 더 분명하게 윤곽을 다듬었지만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이 길을 외면하게 됩니다.
아니 외면했다기보다는
힌두교의 ‘공간적 수행’을 도입해서
불법을 부정하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것이 수행자들이 불법의 정수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견성성불’의 이론입니다.
힌두교의 ‘공간적 수행’인 ‘아트만을 보면
브라만이 된다’는 이론을 ‘견성성불’로 표현만 바꿔
불법을 왜곡한 것이지요.
당신은 정녕 붓다의 길을 따라가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싯다르타가 수행을 발원하게 된 ‘생로병사’에서 ‘시간의 문제’를 인식하고
싯다르타가 세운 ‘연기론’에서 ‘시간의 길’을 숙지하고
싯다르타가 성취한 ‘無我’에서 ‘제1원인’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을 향한 붓다의 길입니다.
당신은 정녕 붓다의 뜻에 따라 ‘시간의 길’을 걷는 불제자가 맞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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