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왜 깨달았다는 사람치고 정상적인 사람이 없을까? 그 이유는?

Buddhastudy 2024. 12. 4. 19:50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까요?

사람마다 각자 사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공통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이로운 방향을 선택해서 나아간다는 점입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요.

물론 어떤 사람은 평생 희생과 봉사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내면의 평화를 위한 이로운 쪽의 선택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나 잘되는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수행자들로 시각을 좁혀봅시다.

수행자들은 욕심이 누구보다 큽니다.

나가 잘 되기 위한 최고의 플랜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 플랜은 단 하나

깨달음입니다.

깨달아야만 시공의 문제를 해결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일생을 바쳐가며 수행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란 것이 쉽게 올 리가 없겠지요.

 

그러다 보니 조바심이 나고

특히 다른 수행자들이 깨달았다는 소문이라도 듣게 되면

더욱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양심을 속이고 깨닫지도 않았는데

깨달았다고 자처하기도 좀 그렇습니다.

 

물론 깨달은 척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불경만 달달 외우면 되거든요.

불경에 없는 곤란한 질문들은

불립 문자, 언어도단, 체험수행 등을 언급하며

회피하면 그만입니다.

달관한 표정과 그럴듯한 언변을 흉내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고요.

 

하지만 인생을 다 바쳐 수행에 도전했는데

거짓으로 치장하는 것은

마음이 썩 내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버립니다.

 

이때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원초적 본능이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아상의 뿌리인 에고가 교묘하게 움직이는 것이지요.

 

에고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자처할 수 있는 빌미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 빌미는

, 무념무상, 삼매, 선정, 알아차림, 참나, 본성, 견성, 불성, 해탈, 열반, 돈오 같은 것들입니다.

 

수행 중에 무아지경이 되거나

돌연 마음이 밝아지거나

어떤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면

이때다 싶어 그것을 깨달음으로 포장하는 것이지요.

 

깨닫고는 싶은데

양심상 멈칫거리고 있던 와중에

그런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면

옳거니하면서 오도송을 읊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엔 이 정도 체험을 가지고 깨달았다고 해도 될까?” 하는 의심도 들지만

이내 깨닫고 싶은 마음에 의해 싹 감춰집니다.

그리고는 그 체험에 대한 믿음을 계속해서 주입합니다.

이건 확실한 깨달음이다.”

이렇게 반복해서 자신을 세뇌하면서 깨달은 자로 둔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깨달은 사람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인간 영혼의 레벨은

차원에 대한 저항값으로 판별합니다.

저항값이 높을수록 짐승에 가깝게 됩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음에 탈을 쓰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저항값이 어떻게 될까요?

 

차원에 대한 저항값은 궁극에 이르고

따라서 짐승을 넘어 몬스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견성했다는 사람, 참나를 찾았다는 사람, 뭔가를 깨달았다는 사람들은

가히 제정신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깨달았다는 사람들 가운데

진짜로 깨달은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깨달으면 지극히 평범해집니다.

일반 사람들보다도 더 평범해서

그 깨달음이 웬만하면 밖으로 나오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흔적조차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깨달았다는 생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좀 더 풀어 말하면

깨달음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에

깨달음이란 명제가 모조리 증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깨달음의 명패를 가슴에 달고 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정상적이지 못한 몬스터인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언제 어느 날 어느 선방에서 깨달았다.

여행 중에 문득 마음이 밝아져 깨달았다

불현듯 모르는 것이 없어지면서 깨달았다.

어느 날 산책하다가 나가 사라져 무만 남았다.

이것이 진정한 해탈이며 깨달음이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깨달음이 열렸다.

참나를 알아차리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등등

수많은 깨달음에 체험에 대한 사연들이 따라붙습니다.

 

이는 정상적인 사람에서

깨달음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괴상한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인류가 좀 더 성숙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모조리 희극의 소재로 사용될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눈이 감긴 시각장애인이

눈 뜬 것처럼 흉내내는 것보다

웃긴 일도 없을 테니까요.

 

출가 스님들은

이런 기괴한 현상에 대해 잘 아는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절밥 20년이면 괴물이 된다.”

 

당신은 정녕 깨닫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진리가 알고 싶으신가요?

당신은 나가 잘 되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진리에 대한 갈증을 풀고 싶으신가요?

 

나가 잘 되고 싶으면

그 비결은 몬스터입니다.

 

왜 세존이

무아에서 수행의 첫발을 떼게 했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