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인도인들의 사상을 지배하던 경전으로
우파니샤드가 있습니다.
우파니샤드는 인간의 본질인 아트만(참나)을
절대적 존재인 브라만에 연결하여
인간 완성의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이것이 범아일여 사상인데
이는 마치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도
맥락을 같이 합니다.
인간이 초라하고 나약해 보여도
그 본성만은 절대적 존재와 하나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인도의 고대 경전인 베다에는
절대적 존재인 브라만에 대해
의심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브라만이 과연 제1원인이 맞는지에 대한
고심의 흔적입니다.
/태초에는 무도 없고 유도 없었다.
무엇이 이 허공을 뒤덮었을까?
그는 알리라.
이 모든 것을 창조한 그 유일신은 알리라.
그런데 어쩌면 그 유일신도 모르리라./
베다는 스스로 존재하는 만물의 근원인 브라만을 언급하면서도
그 브라만이 실제로
제1원인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은 놓지 않았습니다.
사실 브라만을 제의 원인으로 가정하면
그 브라만이 어디서 생겨났는지에 대한 문제가 따라붙게 됩니다.
어쨌든 제1원인에 대한 [베다]의 의심은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이
인도 전역을 지배하게 됩니다.
브라만(梵)을 제1원인으로 놓고
인간이 가아를 버리고 아트만을 찾으면
브라만과 같아지면서 제1원인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니 아트만을 찾기 위한 수행이
널리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이르면서
다시금 제1원인에 대해
의심을 품는 수행자들이 하나둘씩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시다르타가 출가할 무렵에는
정통 불안한 수행자들과
제1원인의 형이상학적 질문을 탐구하는 수행자들이
공존하는 풍토가 자리 잡았습니다.
싯다르타는 출가 당시 고행을 하지 않고
형이상학적 의무만 따지는 수행자들을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범아일여를 기치로 내건 브라만교에
여러 가지 수행을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익히 아시다시피 싯다르타는 수행에 처절히 실패합니다.
브라만교에서 내세운 해탈이나 10번의 경지에 도달해 봤지만
온전한 앎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는 앎과 모름이 깨달음의 척도라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래서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자신이 멸시했던 제1원인의 화두를 잡고
마침내 그것을 풀어 무상정등각을 얻게 됩니다.
싯다르타가 대각을 이루었다고 하자
주변 수행자들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브라만교 수행자들은
고행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싯다르타가
무슨 깨달음을 얻었겠느냐며 손가락질하였습니다.
하지만 제1원인의 화두를 공부하던 수행자들은 달랐습니다.
초기 경전에 보면
깨달음의 소식에 한껏 고무된 수행자들이
싯다르타를 만나 그의 깨달음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싯다르타여!
당신이 정말로 제1원인을 깨달았는가?
만일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에 대답을 해보시오.
첫 번째 공간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시간은 끝이 있는가? 없는가?
두 번째, 영혼은 육체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세 번째, 깨달은 자는 죽은 후에도 있는가? 깨달은 자는 죽은 후에는 없는가?
깨달은 자는 죽은 후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가?
깨달은 자는 죽은 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싯다르타는 이상과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침묵했습니다.
그러자 수행자들은 싯다르타를 비웃으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침묵하는 싯다르타를 보면서
종교 사기꾼으로 단정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범아일여를 추구하는 수행자들과
제1원인을 탐구하는 수행자들 사이에서
싯다르타는 변절자와 사기꾼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싯다르타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침묵했던 것일까요?
물론 그는 제자 아난에게
양극단을 피하려고 답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답이 아니기 때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건 사실 말이 안 됩니다.
A와 B 양쪽 모두 답이 아니라면
그렇게 사실대로 말하고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되니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싯다르타가 형이상학적 질문에 입을 닫자
가끔씩 그를 놀리려고 찾아오는 수행자들이 있었습니다.
뭣도 모르는 놈이 붓다 행세를 한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싯다르타는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그런 질문 공세를 피해갔습니다.
자 그렇다면
싯다르타는 제1원인의 문제를 푼 것이 맞을까요?
문헌으로 보면
싯다르타는 제1원인의 문제를 풀지 못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럼 그는 브라만교의 정통 수련에서도 낙제를 받았고
제1원인의 화두를 푸는 시험에서도 탈락한 것이 됩니다.
그는 과연 시대의 사기꾼이었던 걸까요?
그런데 세존이
제1원인의 화두를 풀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오게 됩니다.
그는 제1원인을 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기틀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그것은 사성제라는 도화지 위에
연기와 무아와 중도의 대들보를 세운 가르침의 체계입니다.
제1원인의 문제를 풀기 위한 반석을
단단하게 구축한 것이지요.
불교의 근본사상은
이처럼 제1원인을 푸는 방향으로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차원의 프로그램에 휘말리지 않도록
연기의 원리를 펼쳤고
그러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중도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프로그램도 영향을 줄 수 없도록
무아로써 포맷을 시도했습니다.
가히 제1원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는
이런 구조를 짤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싯다르타가 형이상학적 질문에 침묵했다고 해서
그의 깨달음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불교 자체가 싯다르타가 무상정등각을 성취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셈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당시 싯다르타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침묵했던 걸까요?
말귀를 못 알아들을 땐 입을 닫는 것이 상책이겠지요.
당시 수행자들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말문을 닫고, 침묵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냥 알려주기 싫었던 거겠지요.
아무튼 세존이 제1원인의 문제를 풀어
무상정등각을 성취했다는 증거는 분명합니다.
불교가 여실히 남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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