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돌고 돌아 무상, 고, 무아다.
이것이 불교 2,500 역사를 관통하는 법의 도장이다.
이것은 붓다가 발견한 진리 연기법에서 나오는 논리적 귀결이다.
조건생 조건멸과 대칭성의 원리가 연기법의 핵심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번뇌를 해결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변화를 이해하고 기존의 것을 고집하지 않으며
자신의 영역을 허물어서 새것으로 만들 줄 아는 것이
현대적 의미의 무상, 고, 무아의 힘이다.
복잡한 것은 진리와 멀 가능성이 크다.
마음공부에도 오컴의 면도날 원칙은 작동한다.//
오늘은 번뇌를 부수는 최종 병기 삼법인
무상, 고, 무아죠.
무상, 고, 무아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너무나 유명하고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도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삼법인에 대해서는
다들 한 번 이상 들어봤을 겁니다.
근데 어쨌든 불교에서는
소승이 있고 대승이 있고, 하여튼 이름이 여러 개 있는데
그 모든 시대와 종파를 통틀어서 무상, 고, 무아에 대해서는
움직일 수 없는 법의 도장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죠.
어쨌든 무상, 고, 무아가
직관적으로 혹은 심오하게 이해되고 체득되는 사람에게
마음의 자유가 주어진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초기 불교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상황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무조건 빨리 기억해 내라, 떠올려라, 적용 시켜라
이렇게 되는 거죠.
뭐냐 하면 그 상황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상황의 본질은 무상한 거고
그것을 붙잡으면 괴로운 거고
그리고 그 실체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빨리 기억해 내라.
모든 상황에 대해서 그러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우리는 사념처관이다
이렇게 관법으로 말하기도 하고
그 모든 것에 무상, 고, 무아를 적용시켜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것을 팔정도에서는 정념이라고 하고
인도에서는 사띠라고 했고
영어로는 마인드 플리스
또 한국어로는 무슨 ‘마음 챙김’ 이런 표현이 있죠.
그게 전부 뭐냐면
모든 상황에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라,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럼 왜 그렇게 해야 되냐?
그랬을 때 번뇌가 근본적으로 부수어진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법인이 법의 도장이잖아요.
이거 바꿀 수 없다, 불교의 어떤 결론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그 결론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 결론은 어디서 나왔는가를 물어보면은
유일하게 붓다가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연기법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죠.
연기법은 내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고
세상이 그렇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연기법에서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것이
논리적인 귀결로 나왔다.
이렇게 보면
그 연기법은 뭐냐라고 하면
그 연기법에 대해서는 설명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건생 조건멸이라고 하는 것이죠.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쪼개거나 분해하거나 해체할 수 있다.
즉 부품들이 결합된 조립품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래서 부품들이 조립되면은
생, 생긴 것이고, 존재하는 것이고
부품들이 해체가 되면 멸한 것이다,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법은
조건부로 만들어지고
그 조건이 흩어지면 없어진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나 현상, 눈앞에 이 인식되고 체험되는 것들은 뭐다?
조건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이것은 원래 이것이었다’
‘영원히 이것일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렇게 한 것이고요.
-두 번째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라고 하는 대칭성에 관한 것이죠.
이것이 유명한 this that 법칙인데
이것저것 법칙이라고 표현이 좀 저렴한데
이런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게 되는 것
어떤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에 대한 인과를
세련되게 설명한 인과법이기도 하고
그다음에 우주적으로 보면은
이것과 저것은 반드시 서로 같이 생겨났다가 같이 사라진다라고 하는
대칭 구조를 이야기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죠.
그러니까 사람은 하늘에서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미움이라는 감정과 함께 간다
뭐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낮과 밤
대립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은
사실은 대립되지만
서로에게 그 개념을 의지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행복도 불행이, 불행도 행복이
서로가 그 개념이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사라진다, 이렇게 되는 거죠.
다르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느낌
즉 불행에 대한 느낌도
같이 그만큼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여기서 불교적인 솔루션은 이런 겁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버려라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벗어난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겁니다.
어찌 됐건 삼법인은 연기법에서 나왔고
연기법은 인과법과 대칭성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 논리적 규율로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법의 도장이 찍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거죠.
그렇게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
개인적인 것도 있고, 사회적인 것도 있죠.
개인적인 단위에서 겪는 일들은
결국 나이 들어가면서 보니까 딱 세 가지더라고요.
건강 문제, 돈 문제, 인간관계 문제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일들이 나한테 벌어지면
중년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이게 예삿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죽음과 가까이 있다고 하는 것을
중년 이후, 노년기 접어들어야 실감을 하지
젊은 사람들이야 뭐 산다고 바쁘니까.
하여튼 우리가 살면서 겪는 개인적인 모든 일들은
건강, 돈, 인간관계 이런 쪽의 일이고
또 사회적인 여러 가지 사건 사고
역사적인 큰 이벤트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있죠.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아까 불교적 가르침은 뭐냐 하면은
무상하다는 것
그걸 붙잡고 있으면 괴롭다는 것
그리고 그 붙잡을 자, 괴로움을 느낄 자라고 하는
그 실체가 없다는 것
이것을 즉시, 그 상황에 부딪힌 즉시
기억해 내고 적용시켜라
그러면 당신의 번뇌가 부서질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무상, 고, 무아를 다시 한 번 훑어볼 수밖에 없는데
[무상]이라고 하는 것을 다르게 이야기하면
“그럴 만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근데 우리가 챗GPT 같은 거 보면은
그 알고리즘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알고리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요.
근데 결론이 그럴듯해.
이런 거죠.
그래서 우리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서
이런 것은 조건이 성숙해서 일어났고
또 이런 조건들이 흩어지면 물러갈 것이다라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허무하다거나 헛되 덧없다거나
아예 그냥 그냥 막 살자거나
그다음에 시간은 모든 것의 파괴자다라고 하는 염세주의
그다음에 영원한 것은 없다라고 하는 이런 허무주의
이런 건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무상하다는 것은
현대 용어로 이야기하면
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다
이런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현대기업 이론에서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변화를 앞서가고, 변화에 잘 대응하는
조직만이,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이렇게 보면은
이 무상하다는 것은
2500년 지난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것은 변화의 와중에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는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무상하다라고 하는 것이
번뇌를 부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이것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을 때
“이렇게는 못 살겠다”
이렇게 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곧 조건이 바꿈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순간을 이겨내지 못해서 저지르는 모든 어떤 어리석은 일들로부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가 있는 것이죠.
두 번째는 [고]라고 하는 것이죠.
사는 게 괴롭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 직관이 아니라 그냥 현실로 우리가 체험을 하고 있지만
어쨌든 고라고 하는 것을
심리적으로 볼 때는 통증하고는 좀 다른 것이죠.
심리적인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붙잡을 때 생기는 것이죠.
이건데 이래야 되는데 저렇게 되면
격차만큼, 그 거리만큼
내가 불편하고 심적으로 괴로운 것이죠.
그래서 그 고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심리학에서는 앵커링
어디에 네가 닻을 내리고 있느냐?
닻을 내려서 있으면 배는 못 떠나니까
붙잡으면 병이 된다라고 하는 것이
고의 정확한 심리적인 해석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때 그 순간을 못 놓는 것이죠.
“그때 좋았는데” “그때 내가 진짜 나였는데” 이런 거
또 미래에
내가 이걸 다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전제 조건이 딱 꺾이면
미래의 그림이 무너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괴롭고.
이런 것들은 다 뭐냐 하면은
붙잡기 때문인 것이거든요.
과거를 붙잡거나 미래를 붙잡거나
붙잡고 있으면 그건 병이 된다.
혈액이 잘 순환해야 되는데
돌아가지 않고 멈추는 것과 같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지 않느냐?”
“비워버려라 놓아버려라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놓아버릴 수가 없지 않냐?”
자꾸 플래시백
과거의 그 고통스러운 영상이 자꾸 떠올라서 나를 힘들게 하는데
그게 잘 안돼서 치료도 받고 상담도 받고 이렇게 하는데
“놓아버려라, 그것 때문에 괴롭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치유 허무주의죠.
이유는 알겠는데 답은 없다
이렇게 되는 거니까
그거는 무책임한 거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어찌됐건 차근차근하죠.
그래서 붙잡으면 병이 된다라고 하는 것을
고라고 하는 것으로 표현을 했다.
물론 생로병사 자체가 괴로움이다.
이건 또 불교적인 관점입니다.
근데 심리적으로 보면 붙잡는 데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고를, 번뇌를 부수는 것과 관련해서
징검다리를 한두 개 놓을 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거든요.
계속 불만스럽고 불안하고 분노가 치미는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아는 알아보는 게 좋고요.
두 번째는 내가 왜 이걸 붙잡고 있지?
what 다음에 why죠.
그럼 내가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리려고 하는 인생의 그림이 있을 수 있잖아요.
예를 들면
내가 돈에 특히 민감하다.
그럼 돈을 가지고 그리려는 인생의 그림이 있을 수 있겠죠.
그래서 그런 what and why
내가 뭘 붙잡고 있는지
왜 그걸 붙잡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잘 하면 좋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 자체가 문제 해결은 아니고
그런 관찰과 인식 자체가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근데 이게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계속 붙잡고 있으면 문제가 생기겠다”라는 인식에까지 도달하게 되면
우회로를 개척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방법은 생긴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 [무아]죠.
이 무아라고 하는 것이 삼법인 중에서도
무상과 고는 굉장히 직관적이고 체험적이거든요.
실제로 내가 그렇게 느끼잖아요.
근데 무아라고 하는 것 자체가
고도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이어서
이것을 우리가 직접 가져다 쓰기에는 정말로 어려움이 있고
그 어렵다는 얘기는 뭐냐 하면
무수한 오해의 여지가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법인 중에서도 핵심은
무아가 되겠죠.
그래서 이 무아라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붙잡을 자,
아까 붙잡으면 괴로움이 된다고 했는데 붙잡을 자
그리고 붙잡아서 괴로움을 겪을 자
보이는 게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도 제자들이
무아라고 하는 것을 잘 원만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나는 저 우주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 거야”라고
미친 마음을 내고 울부짖는다
이런 표현을 썼거든요.
아리안족 특히 자아에 대한 관념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붙잡을 자, 괴로움을 겪을 자가 원래 없다 라고 하는
인식에 도달하기까지에는
사실은 많은 사다리를 올라야 될 것 같습니다.
이게 뭐 아무리 그것이 직관적으로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에서 자아의 자존심에 금이 가고
자존감이 무너지고
그다음에 상처를 받고 하는 것들은 다 자아 관념이거든요.
그래서 붙잡을 자도 없고, 괴로움을 겪을 자도 없다라고 하는 무아론에 대해서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결국은
조건생 조건멸이라고 하는
모든 것은 원래 그대로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고
원래 있었던 것도 아니야
이건 그냥 조건들이 만나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야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근데 이 이야기가
내가 욕망하는 것
내가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아서 결핍된 느낌
그 결핍된 느낌이 주는 괴로움 쓰라림
이런 것들을
모든 것은 그렇게 조건부로 있는 것 같고
조건부로 생겼다가 조건부로 사라지는 거라서
있는 것 같은 거지
실제로 있는 게 아니야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렇구나”라고
그런 욕망과 욕망의 결핍과 그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사라지느냐?
전혀 아니겠죠.
그러면 더 불난 집에 부채질하냐?
뭐 이런 얘기를 하면서
욕을 듣거나 두들겨 맞겠죠.
하지만 마음공부라고 하는 게 결국은 진정 시켜서
관찰하고 그 관찰의 힘으로
현실에서 내가 겪는 심적인 마음의 괴로움을 해결해 보자는 거니까
그래도 핵심은 무아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무아는 왜 무아냐?
실체라고 할 수 없다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나라고 하는 자아 개념도 마찬가지고
사물도 똑같다는 거죠.
상황도 똑같다는 것이죠.
우주도 똑같고.
그러니까 낮이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밤에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낮은 햇빛이 비추면 낮이고
이렇게 지구가 돌아서
그리고 그다음에 한 번 더 돌아서
햇빛이 안 비치는 쪽의, 태양의 반대편에 있으면
밤이잖아요.
그 낮이나 밤은 실체가 아니다
이거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겠죠.
그런 식으로 조금 조금씩 나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개념은 있는데 실체는 없다’
이렇게 될 수도 있고
‘현상은 있는데 본질은 없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 명목
우리가 이름을 붙이는 것은
편하자고, 편하기 때문에 이렇게 붙인 거고
유용하기 때문이지
그것에 진정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여래라는 말이 있잖아요.
여래는 같을 여, 올 래
올 래 아닙니까?
그러니까 온듯하다
즉 있는 것 같다라는 뜻입니다.
듯하다라는, 마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게 여래거든요.
그러니까 뭡니까?
조건들의 결합으로 잠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현상은 단단하지만
그 현상을 이루는 이 밑에는
그런 조건들의 결합이 있는 거니까
그 본질은 텅 비어 있다라고 봐야 되지 않냐 라고 하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래서 원래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럼 나는 뭐냐?
또 내가 느끼는 욕망과 결핍감과 고통과 기쁨과 성취감은 뭐냐? 라고 했을 때
그 심리적인 욕망과 그로 인한 결핍감의 대부분은
학습된 거다.
즉 너는 만들어진 거다.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여러 가지 조건들이
DNA와 육아 환경과 어느 나라에 태어났냐 하는 그런 그랜드한 환경
이런 것들의 결합으로
당신의 욕망조차도 학습된 거다, 만들어진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뭐 그런 것 같은데 좀 만족스럽지 않죠.
왜냐하면 내가 너무 소중하잖아요.
나는 이미 너무 소중한 범접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나의 인생의 목표는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고
이게 이미 콘크리트처럼 튼튼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지적으로는 그럴 수 있겠다 싶어도
“네 인생도 그래” 이렇게 이야기하면은
“뭐라 카노?” 이렇게 될 수 있겠죠.
어찌 됐건 현대적인 무아의 현대적인 해석은
나라고 하는 개념
내가 심지어 욕망하는 것까지도
나는 만들어진, 메이드 된, 형성된 결과물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무상하다고 보는 것
괴로움이라고 보는 것
붙잡음의 괴로움이라고 보는 것
그다음에 무아라고 보는 것
이런 것들이
어떤 상황에서
상황이야 좋은 상황도 있고 안 좋은 상황도 있을 거 아닙니까?
근데 사실은 안 좋은 상황만큼이나 좋은 상황에서도
무상, 고, 무아를 떠올릴 수 있어야 된다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왜냐하면 모든 상황이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좋다는 건
이미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잖아요.
나쁜 거 아닌, 요런 요런 게 좋은 거야라고 하는
내 느낌 내 가치가
이미 들어가 있는 말이거든요.
그럼 그거는 아까 대칭성의 원리에 의해서
언제든지 안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서 몇 가지 조건들이 상실되면
언제든지 안 좋은 것이 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좋은 일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이 생기든
나쁜 일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생기든
그건 네 생각일 뿐이고, 네 느낌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냥 조건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라고 하는 것을
즉시즉시 그때그때 알아차려라.
이것이 사띠의 기본적인
또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영원하다는 거
항상 그렇다는 거죠.
영원하다는 거.
그다음에 내가 즐거움을 얻겠다.
욕망을 충족시키겠다라고 하는 거.
그다음에 나를 보호하고
나를 가장 우선시하고
자아의 어떤 확장을 위해서
온갖 에너지를 다 쓰는
상락아 라고 하는 개념은
하나의 오늘날로 치면은 색안경과 같다.
그래서 색안경을 이렇게 끼고 보면
세상이 바로 보이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나의 욕망이라고 하는 색안경으로 보이니까
색깔이 틀린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래서 그 색안경을 벗고 보면
즉 상락아라고 하는 색안경을 벗고 보면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보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우리를 괴롭게.
그러니까 어디 부딪히면 아픈 통증은 있어도
그 심리적인 번뇌는 안 된다.
이것이 붓다가 조근조근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번뇌를 부수는 최종 병기 삼법인
잘 쓰면 색안경을 벗고 보면
번뇌를 부수는 최종 병기가 될 수 있는 삼법인
무상, 고, 무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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