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있다'의 중요성: '내가 있다'는 느낌은 실제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회선이며, 이를 통해 실재하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01:33], [05:00].
- 생각의 한계: 생각은 세상을 유지하는 폐쇄회로일 뿐이며, 진리와 교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의식입니다 [05:13], [05:40].
- 수분각: '내가 있다'는 느낌으로 들어가는 실제의 문이며, 이를 통해 현상과 본질의 차이를 극명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02:19], [02:32].
- 의식의 관조: 의식만이 스스로를 관찰하고 알 수 있으며, '내가 있다'는 이러한 관조의 실행 방법입니다 [05:52], [06:04].
- 초견성: 의식하는 자신을 자각하는 지점이 성품을 자각하는 초견성의 지점입니다 [06:31].
- 지속적인 노력: '내가 있다'를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집요함이 중요합니다 [07:11], [07:35].
- 생각에서 벗어남: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기를 거부하고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명상입니다 [08:10], [08:25].
니사르가닷따 마하리지, ‘I am That’은
IAMTHAT 채널의 문패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관용구는
성경과 우파니샤드를 비롯해
대부분의 깨달음 전통에서 공통적인 표현이지만
실제로 수행의 방편으로
‘내가 있다’를 핵심에 놓고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에게서 돋보입니다.
IAMTHAT 채널의 <마하라지 어록>을 통해 보셨겠지만
그 핵심은
단순히 ‘내가 있다’가 아니라
‘내가 있다’는 그 앎 말고는
실제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는
단정적인 선언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문입니다.
가장 확실하면서도 현존하는 것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문을 넘어서면
거기에는 실재가 있습니다.
물론 마하라지는
그것을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묘사하거나
또는 여러 단계의 질서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주로 상대했던 사람들이
다양한 수준의 수행자들이자 방문자들이었고,
그의 문답은 이런 방문자들과의 질의응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것들은
우선 바깥에 있는 불필요한 망념과 견해를 놓고
실재하는 세계로 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각오가 서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어디로 갈 것인지를 명확히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있다’입니다.
어쩌면 굉장히 모호한 가리킴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있다’는 것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수 있는 다양한 생각이자 느낌이고 묘사입니다.
그리고 에고이스트의 ‘내가 있다’는 느낌과
헌신하려는 수행자의 ‘내가 있다’는 느낌은
아마도 전혀 다른 지향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하라지는 주저없이 ‘내가 있다’를
실재의 첫 발자국이자
환의 마지막 발자국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IAMTHAT 채널이 말하는 현상과 본질이 뒤집어지는 그 문
바로 초견성, 일견의 문입니다.
대승기신론의 수분각은 이렇듯 첫 관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있다는 느낌으로 들어가는 실재의 문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모든 것이 생각일 뿐
실재하는 것은
내 생각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상사각에서부터 이 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감각, 지각, 생각, 감정, 느낌
복합적인 인지 상태에 이르는 모든 인식이
상사각에서 하나의 초점인 나에게로 좁혀집니다.
이것을 대승기신론은
현상과 본질의 차이를 극명하게 인식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간단하게 말해
내 생각이 아니면 세상은 전혀 다른 무엇입니다.
이 지점에서 수행자는
그 무엇이 다가오든
그것이 내 인식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칸트가 맞부딪혔던 바로 그 벽입니다.
나는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인식합니다.
내가 인식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내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의식의 깊이가 점점 실재와 가까워지면서
드디어 내가 있다는 문을 열어야 하는 지점에 옵니다.
내가 있다는
다름 아닌 연기적 각성입니다.
바깥의 모든 환들을 뒤로 하고 오직 하나 확신할 수 있고
절대로 잃어버릴 수 없는 그것
바로 ‘내가 있다’가 연기적 현존입니다.
말의 뉘앙스만으로 보면
‘내가 있다’는 표현은
몸과의 동일시를 탈피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마하라지가 누누이 강조하는
그대는 몸이나 마음이 아니라는 것과
‘내가 있다’ 하는 느낌은
만약 같은 의식 수준에서라면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지침입니다.
하지만 그대가 몸이나 마음이 아니며
바깥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대 마음 안에 나타나는 환이라는 마하라지 설명을
불교의 유식학을 빌려 설명하면
쉽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몸, 마음, 세계는 모두
하나의 의식에서 발생하는 연기적 환유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방향을 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방향이 바로 ‘내가 있다’입니다.
실로 ‘내가 있다’는 이 자각 말고는
우리가 실재와 접촉할 수 있는 회선이 없습니다.
다른 모든 회로들은
모두 이 세계를 옹립하고, 이 세계를 운영하며
이 세계를 유지하는 폐쇄 회로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통칭해서 생각이라고 합니다.
생각, 개념, 관념으로 주조된 틀 안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열심히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폐쇄 회로에 갇힌 놀음에 불과합니다.
실재, 진여, 진리와 교신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수단은 의식입니다.
그것 외에는 하느님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의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인지 수단의 바탕입니다.
오직 의식만이 스스로를 관찰해
스스로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관조의 실행방법이 ‘내가 있다’입니다.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그 의식의 문이
바로 생각을 벗어나는 관조의 문, 수분각의 문입니다.
마하라지가 말합니다.
“그대가 자기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때
그것을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대는 늘 마음을 자각하고 있지
의식하고 있는 그대 자신을 자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바로 의식하는 자신을 자각하는 지점이
성품을 자각하는 초견성의 지점입니다.
바깥의 모든 물리적, 심리적 사건은
그저 환일 뿐입니다.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그대가 육신적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하십시오.
자신이 궁극적인 관찰자라는 것은
직접적인 통찰에 의해서 알지,
관찰에 기초한 논리적 과정에 의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한 번 ‘내가 있다’를 듣는 것으로는 어림이 없습니다.
‘내가 있다’를 외우는 것 정도로는 정말 어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반대편으로
옹골차게 쌓아 올리고 다져서 굳힌 ‘생각의 틀’이
깨달음을 구하는 동안에도 계속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는 너무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 그대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집요함입니다.
마하라지가 ‘내가 있다’를 말하는 지점은
물론 같은 지점이지만
그 깊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저는 순수한 의식 그 자체,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부단한 자각입니다.
저는 그대의 상태보다 더 실재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저의 정신적 과정은 끝나 있습니다.”
마하라지는 궁극의 지점에서 수행자들을 부릅니다.
“실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한 가지 명상법이 있으니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기를 준엄히 거부하는 것입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명상입니다.”
수행자의 수준을 가리지 않고 출발선만 알려주는 방법이
마하라지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내가 있다’를 통해 수분각에 이르는 깨달음을
마하라지는 멋지게 표현합니다.
“그대의 생각들을 지켜보고
생각들을 지켜보는 그대 자신을 지켜보십시오.
모든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상태가 갑작스럽게 일어날 것이고
그 지복에 의해 그대는
그것을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껏 자신이라 여겨오던 것들이
붕괴되는 걸 지켜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디야 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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