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경의 중요성과 특징: 금강경은 선사들에게 중요한 경전으로, 뛰어난 가르침을 담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00:32].
- 선불교에서의 금강경: 금강경의 가르침은 선불교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며, 세존은 무상의 깨달음에 대해 이름만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01:13].
- 실상(實相)과 텅 빈(空)의 개념: 실상은 텅 비어 있어서 잡을 수 없으며, 텅 빔 또한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이 금강경 구절과 연결됩니다 [01:54].
- 마음과 부처: 마음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은 금강경에 나타나며, 마음을 어디에도 두지 않아야 부처를 알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02:53].
- 머무름 없는 마음: 머무름이 없는 근본에 입각해야 일체법이 성립하며, 머무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머무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04:22].
- 애착과 자유: 애착하지 않고,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앉지도 않아야 하며, 눌러앉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내지 않아야 합니다 [05:16].
- 마음의 어려움: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05:49].
- 부처에 대한 생각: 부처라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 부처는 중생을 위한 약과 같아서 병이 나으면 필요 없게 됩니다 [06:27].
- 머무르지 않는 것의 표현: 머무르지 않는 것은 바람에게 멈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지나감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07:05].
- 절망과 자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절망의 자리를 투명하게 바꾸면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07:38].
- 마음과 사됨과 올바름: 마음이 물건을 따르면 사되고, 물건이 마음을 따르면 올바르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07:58].
어떤 스님이 와서 뵙고 절을 하자, 혜충 국사가 물었다.
“무슨 업을 쌓았는가?”
“금강경을 강의하였습니다.”
“맨 처음에 두 글자가 무엇이던가?”
“여시, ‘이와 같이’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선사들이 강의를 할 때는
경전 20개를 인용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들은 대승경전에 밝았는데
그중에서 유독 금강경은 이런 모습으로 출현합니다.
그러니까 뭔가 빼어난 가르침이긴 한데
그걸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흰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글씨다” 라는 수준의 전형으로 출현하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혜능은
어느 날 나무를 팔러 갔다가
그 집 주인이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활짝 열려
집주인에게 들은 황매산의 5조 홍인을 찾아갑니다.
금강경의 교의는 선불교에서 더 확연하게 보입니다.
세존이 금강경에서 말합니다.
“나는 무상의 깨달음에 대해 조금도 얻은 바가 없나니
단지 이름만 무상의 깨달음이라고 부를 뿐이다.”
혜충이 하루는 자린 공봉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슨 뜻인가?”
“깨달음이란 뜻입니다.”
“부처님이 미혹한 적이 있는가?”
“미혹했던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아서 무엇하겠는가?”
공봉이 대답이 없더니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실상입니까?”
“텅 빔을 잡아 오너라.”
“텅 빔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텅 빔도 얻을 수 없다면서 실상은 물어서 무엇을 하려는가?”
이 선문답을 그대로 풀면 금강경의 구절이 됩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모든 형상이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진실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텅 빔을 잡을 수 있다면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세존은 우리를 미혹한 적이 없습니다.
어떤 행자가 혜해에게 물었다.
“마음이 곧 부처라 했는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어느 것이 부처가 아니라고 의심하는가 지적해 보라.”
행자가 대답이 없으니 대사가 말했다.
“통달하면 전체 경계가 이러하고,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어긋난다.”
의심해 묻는 그 마음과
그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며
진짜 마음을 찾는 것 또한 그 마음입니다.
그래서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놔두어야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금강경에 있습니다.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색성향미촉법
보는 것, 듣는 것, 오감으로 느끼고
개념, 관념으로 생각하는 것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지니
머무르고 집착하는 것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
통달하는 지혜에 가깝습니다.
“경전에서는 머무름이 없는 근본에 입각해서
일체법이 성립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머무름이 없는 근본입니까?”
“모습은 형체가 없는 데서 일어나고, 이름은 이름 붙기 전에 나왔다.”
법안 스님의 말대로
또는 육조 혜능이 발심을 하도록 만든 금강경의 구절처럼
머무르지 않으려고 노력해서가 아니라
머무를 수 없는 것임을 알면 됩니다.
펼쳐지는 세상이나
그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나나
시시각각 일어나고 사라지며
그것을 그것이라 이름하지 않으면
한 덩어리의 알 수 없는 마음일 뿐입니다.
“애착하지 않게 되고 나서는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앉아 옳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조복된 마음에 안주하는 것이며
뗏목이 아까워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애착하지도 않고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앉지도 않으면
이것이 중간 정도로 하는 것이고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앉지도 않고
눌러앉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내지 않는다면
이것이 마지막이다.”
백장은 착할 선자를 써서
초선, 중간선, 후선을 설명합니다.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경지에도
이렇듯 여러 단계가 있는 것을 보면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마음인데
또한 이 마음 말고는
부처를 알 길이 없도록 해 놓았으니
하느님이 참으로 악랄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죠.
“부처라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부처란 중생 편에서 쓰는 약이니, 병이 없으면 먹을 필요가 없다.
약과 병이 함께 없어지면 맑은 물과 같다.”
한 승인 현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모든 부처님이 자비를 일으키고 운행한다는 것입니까?”
“고양이와 개다.”
“어째서 도리어 그렇습니까?”
“그대는 무엇을 물었는가?”
부처를 물었으니, 부처를 보여줘야 할 터인데
머무르지 않는 것을 보여줄 방법은 없습니다.
바람에게 멈추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바람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면 그만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부처를 볼 수 없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부처를 볼 수 없습니다.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은
골똘히 생각해 의지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더 이상 시도해 볼 것이 없는 절망의 자리와 닮았습니다.
절망이라는 그 이름과 느낌만 투명하게 바꾸면
그것을 자유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법사가 묻자, 혜해가 답했다.
“어떤 것이 삿됨이고, 어떤 것이 올바름입니까?”
“마음이 물건을 따르면 삿됨이오.
물건이 마음을 따르면 올바름이다.”
“바둑이는 개인데
백 척 장대 위에서 머무르면
고양이처럼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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