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알고
원치 않는 악의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악의 원인을 억제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행위가
자신과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서광 스님
범부각은 깨달음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발심의 단계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범부각을 불각
깨달음이 아닌 상태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깨달을 각’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깨달음 공부에 입문하기 위해서 최소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것이 범부각의 내용일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범부각 이전, 이하가 어떤 상태인지는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겁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미 깨달아 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본 적도 없는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찾기라도 할텐데
있다는 것도 모른다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체중생을 깨달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생각 생각마다 상속하여
아직까지 망념을 떠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한다.”
앞서 본 것처럼 대승기신론은
깨달음을 크게 본각, 불각, 시각으로 설명합니다.
“원래 우리 모두는 맑디 맑은 진리의 자리에 있고(본각)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기에 무지한 상태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불각)
이를 깨쳐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시각)”
분명 내가 먹고, 일하고, 쉬고, 자고 하는 일상이
부처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는 가르침이
기신론의 본각인데
그럼에도 이런 세계에 대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면
본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시각에 들지 못해서 불각인 상태입니다.
범부각은 무시무명이라는 상태를
본인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회개와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있겠습니다.
기신론의 범부각 설명을 조금 더 볼까요?
“생각이 惡(악)을 일으킨 것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나중 생각을 멈추어 악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
이 말을 더 풀어보죠.
생각이 계속 이어져 그 생각 바깥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생각이 뭔가 결과를 일으킨 것을 보고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내가 했고
그 결과에 대해 내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이란 것은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에 해당하는 것인데
불각 상태에서는
자신의 불행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죠.
한 사람의 삶이
불각에서 시각으로 옮겨가는 시작이 바로 범부각입니다.
별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문명 세계에서 누구나 한 번 정도는
진리, 진실, 법칙 같은 형이상학적 가르침이나 교훈에
접해볼 수 있습니다.
종교나 철학, 사상과 학문을 통해 가르침을 청하고 받아볼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입문의 기회가 주어지는 셈입니다.
입문의 기회가 주어지면 누구나 입문자가 아닐까요?
종교와 철학을
근대국가의 국민교육 표준으로 지정해 의무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의무교육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문명화된 현대사회 속에서
그와 유사한 전통적 지혜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절에 나가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우리는 유사종교를 쉼 없이 접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은
모두 근대 인본주의의 틀을 가진 유사종교입니다.
그 내용은 일정한 가르침
즉 [영원의 철학]의 표피에 해당하는 것을 포함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연과학은 우주의 기원을, 사회과학은
인류의식의 기원을 보여주려 합니다.
하지만 문명화된 가르침은
곧바로 도덕과 윤리, 제도와 적응을 위한 사회화 수단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지식들이 깨달음이라는 방향을 가리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그런 지식들의 가르침과 그 안에 숨어있는 진리의 가르침에 대해
구분할 수 없습니다.
말과 글로는 같은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은
접근방법이 다릅니다.
그곳에 직접 가기 전에는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범부각은 직접 깨달음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상태이며
마음먹은 이유가 분명한 상태입니다.
그 상태는 바로 ‘나’와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깨달음입니다.
너무 당연해서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명백한 사실이지만
방향이 바뀌면서 이제 그것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공부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 마음은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당입니다.
이 생각은 끊이지 않으며
보통 사람은 하루 5만 개의 생각 속에서
그 생각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생각에 따라 울고 웃고
생각을 하기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생각이 없는 상태는 꿈도 꾸지 못한 채
마당 위에 아지랑이 피듯, 먼지가 일 듯, 계속 일어나는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조차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득 이 생각이라는 것이 하나의 실물
어려운 말로 객체로 인식되는 상태가 바로
범부각입니다.
사실 법부각이라는 내용을 깨달음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이 한 사람의 실존과 엮여서
고통이나 난관을 벗어나는 과정과 결합되어 발생할 경우
그 사람에게는 이 이전과는 분명한 차이를 느끼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변화일 수 있기에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많은 깨달음 여정의 사례에서
범부각 수준의 전향은 실존적인 변모를 수반합니다.
겉보기에 평범할지는 몰라도
이제 이 사람은
-왜 이런 생각이 일어나는지
-왜 이런 생각을 없애지 못하는지 궁금해하며
그 방향으로 자신의 앎을 진전시키고자 할 것입니다.
범부각이 알게 된 것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
-나에게 생각이 일어난다.
-나에게 생각의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
생각이라는 것이 있고
내가 그 생각에 책임이 있다고
범부각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깨침을 이루기 위해서도
사람은 참으로 많은 체험을 통해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대부분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이유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연기하거나 그 반대편의 쾌락을 추구해
고통의 크기를 줄여보려 하는 데 그치고 맙니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지도에서 봤듯이
인류의 70%가 아직 의식 수준 200 이하입니다.
200 이하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들이
번뇌와 고통을 일으키는 부정적 힘의 세계입니다.
최소한 200을 벗어나야
그나마 범부각의 희망을 가져 볼 수 있는 용기와 긍정의 상태가 됩니다.
물론 의식 수준 200 이상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식으로 치면
어마어마한 세월의 인연이 있어야
그 방향을 틀 수 있다고 합니다.
범부각이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
불행이란
원하지 않는 생각일 뿐입니다.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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