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답에는 보고 듣는 것을 예로 든 사례가 꽤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의 시각과 청각이 전체 감각의 80% 이상을 주도한다는
현대 심리학의 분석결과가 그걸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감각기관은
우리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직지의 영역이라서
그것을 활용한 가르침이 적지 않습니다.
사람이 감각으로 아는 것을 유식에서는 현량이라고 합니다.
생각으로 한바퀴 돌아나와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날 것 그대로 아는 것이죠.
상사각 이상의 공부에서는
이것을 곧바로 느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공부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선문답이 좋은 재료가 됩니다.
“왼쪽 눈으로 보는가? 오른쪽 눈으로 보는가?”
“눈을 감으로 눈을 뜨나 오직 볼 뿐!”
“스님, 말을 떠나서 한 말씀해 주십시오.” “콜록콜록!
“입 없는 노인네가 왜 이리 잔소리가 많으십니까?”
(박수를 친 후) “이 소리를 가져와보거라!”
이런 선문답의 소재들은
모두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
당장 우리가 알 수 있고,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의 오감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감각을 넘어선 지각부터는 생각의 영역입니다.
그것은 선입견과 조건화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심층의식 속에서 조건화되어 있다가
질문이라는 계기를 타고 나타난 그 생각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들만 알 수 있게 합니다.
선문답의 원리는 바로 그 생각을
일순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익숙한 질문과 답을 써서는 안 되겠죠.
그래서 선문답이 엉뚱하게 느껴지고
말도 되지 않는 부조리극처럼 보이는 겁니다.
이 원리를 알지 못하면
십 년 전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선문답은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의 암호 전문 난수표이고
정도가 아닌 외도이며
정견과 정념에는 아주 해로운
공부를 망치는 방법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육조 혜능까지는 조선 일체의 흐름이 잘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선문답은 심심할 때 한 번 풀이해 보는 농담이 아니라
문자로 된 정견을 열심히 공부하되
문자에도 떨어지지 말 것을 강조하는 불립문자, 이심전심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후의 잘못된 흐름이 일어나 교선일치가 무너집니다.
문자로 된 교리는 필요 없고 선만이 중요하다.
또는 ‘이것만이 부처님의 진짜 법으로 교외의 별전이고 비밀스러운 전수이다’
같은 엉뚱한 취지로 왜곡 과장했다는 것입니다.
송나라 때에는
시로 주고받는 문자선의 유행이 생기면서
드디어 선문답은 진리와는 멀어진 멋스러운 말장난으로 인식되게 되었고
지금 우리가 흔히 쓰는
‘선문답 같은 소리 하고 있네’의 의미가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해 본 바에 따르면
선은 분별을 넘어 성품을 직접 보도록 하는 언어도단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있는 깨달음 지도에 나와 있는
의식, 성품, 연기, 유식 같은
정견들에 대한 공부가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래야 주관과 객관의 능소가 없는 그 자리를 가리키는
선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왜 저렇게 사람의 감각을 직접적으로 알게 하는 선문답이 많은지
수긍할 수 있게 됩니다.
저에게 문득 다가온 오늘의 선문답은 이렇습니다.
“네가 본 그 소리를 가져와 보아라.”
저희 답을 드리겠습니다.
아쇼라는 일본 시인의 하이쿠를 들려드립니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풍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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