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호여여사응吾常呼汝汝斯應
여혹신오오첩수汝或訊吾吾輒酬
막도차간무불법莫道此間無佛法
종래불격일사두從來不隔一絲頭
내 늘 널 부르면 너는 바로 대답하고
내가 내게 질문하면 내가 즉시 대답했지.
이 사이에 불법이 없다고 하지 말라.
이제껏 실 한끝도 들어갈 틈 없었나니.
‘시자가 게송을 구함으로 써서 주다’라는 제목의
고려시대 충지 스님의 선시입니다.
아마도 시중드는 시자가 불만이 많았나 봅니다.
잔심부름만 하고
공부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그런데 스님은 알려줍니다.
우리 사이에 서로 부르고, 대답하고, 밥 먹고, 물 마시는 그것이
모두 불법을 전수한 것인데
웬 불법 타령이냐?
교와 선이 하나로 엮이는 전통에서는
사실 선승을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종교 의식을 집전하는 스님이나, 강론을 하는 스님이나
그분이 그분이듯
정통 선불교에서는
선문답을 주고받는 일은
경전을 읽고 강론을 하는 일과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과 깨달음에서 소개하기 어려운
선승들의 아주 긴 문답들은
교학의 특징을 가지는 어록도 많습니다.
교학의 어록, 선공부의 문답이나 선시가
선불교에서는 자연스레 조화를 이룹니다.
말 그대로 선불교는
이론 체계와 실제 적용의 미학을 추구합니다.
3, 4조나 7, 5조의 운율을 맞추어
한글로 시를 짓기도 어려운 판에
5개나 7개의 한자로 시를 쓰는 시절의 미학을
이해하기는 어렵죠.
시는 자유로운 듯 보여도
글자 안에 생각을 가두는 치열한 수행이기도 합니다.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먼지는 일지 않고
월륜천소수무흔月輪穿沼水無痕
둥근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도 없구나.
선공부를 하면서 전통을 찾아다니면
처음에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선문답들은 모두 상형문자를 보는 듯하고
방과 할의 몽둥이와 고함이 난무하는데
갑자기 극도로 절제된 시가 등장합니다.
도대체 이 선승들은 어떤 분들인가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칭 시인이었습니다.
그 후로 거의 20년 넘게 시를 쓰는 일을 계속했고
비록 등단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인 시집을 낼 정도는 됐죠.
지금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시 한 편을 쓰는 일은
남들이 몰라주는 저만의 고독한 사색이자 고행이었습니다.
그런 경험 덕분에 선시를 보는 저의 눈은
단순히 멋스럽게 언어를 유희하는 데는 머물 수가 없습니다.
시어는 추상화된 언어이지만
언어를 넘어서지 않으면
그건 그냥 맛깔나는 묘사일 뿐
좋은 시라고 할 수 없죠.
마치 선문답과 비슷합니다.
언어의 틈 사이로 뭔가 보여야 합니다.
현애초벽무서박懸崖峭壁無棲泊
무서박 깎아지는 벼랑 절벽에는 기댈 곳이 없어도
사명망형진불의捨命忘形進不疑
목숨을 버려 형상을 잊고 의심 없이 나아간다.
갱향검봉번일전更向劍鋒飜一轉
다시금 번뜩이는 칼날을 향해야만
시지공겁이전시始知空劫已前時
생멸의 이전을 비로소 알게 되리라.
사명당 스님의 시처럼
선의 지향점을 언어도단, 분립문자라고 하듯
선은 언어의 형상 지향성을 단칼에 날리면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명쾌한 문답이나 몽둥이 춤이
선시와 서로 통할 수 있고
오히려 막역한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선시는 선적인 관찰과 직관적인 언어를
표의문자인 한자의 운율 아닌 운율의 틀에 녹여 넣은 가르침입니다.
문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문자에 의지해 전달해야 하는 모순된 운명이
선공부의 패러독스라면
선시는 가장 적극적으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선공부의 형식입니다.
생평기광남녀군生平欺狂男女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미천죄업과수미彌天罪業過須彌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활함아비한만단活焰阿鼻恨萬端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일륜토홍괘벽산一輪吐紅掛碧山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 스님의 열반송은
제가 아는 선시의 극치에 이릅니다.
일생동안 한마디의 법문도 한 적이 없다는 석가의 선언을
이렇게 미학적으로 완성시킨 듯한
칠언 절구 앞에서 저는 말을 잊습니다.
이런 시 앞에서 무슨 선문답이 또 필요하겠습니까?
천계만사량千計萬思量
천 가지 계책과 만 가지 생각은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불타는 화로의 한 점 눈송이로다.
니우수상행泥牛水上行
진흙 소가 물 위를 걸으니
대지허공열大地虛空烈
대지와 허공이 찢어지는도다.
서산대사의 홍로일점설 구절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붉은 화로에 떨어지는 눈꽃 한 점의 이미지가
생각을 끊고 마음을 여의기에 충분합니다.
시의 구절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해
글자 하나하나에 수백 편의 선문답이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선은 시를 쓰는 듯한 심정으로 대해야 한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알기 힘든 것이 선의 지혜입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가르침이 언어를 넘어서야 할 때
우리는 그 언어가 가진 힘을 끝까지 활용해야 합니다.
회피나 우회로는 어렵습니다.
회양 선사는 마조 스님이 좌선하는 자리에 찾아와
벽돌을 갈기 시작합니다.
마조가 묻자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고 답합니다.
벽돌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되느냐는 마조의 물음에
“그대가 좌선을 해서 부처가 되려는 것과 뭐가 다른가?” 라고 해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선시로 알려줍니다.
심지함제종心地含諸種
마음 밭에 모든 씨앗 숨겨져 있으니
우택실개맹遇澤悉皆萌
단비를 만나 다 싹이 트도다.
삼매화무상三昧華無相
삼매의 꽃은 원래 형상 없으니
하괴부하성何壞復何成
무엇이 지고 또 무엇이 피어나랴
초심자 중에서는 선문답이 너무 답답하고 기교해서
마치 고문처럼 느껴지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이집트 상형 문자를 보는 듯하다고 했겠습니까?
그런 분들은 틈틈이 선시를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치열한 것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종본이래소소영영從本以來昭昭靈靈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
일찍이 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명부득상부득名不得狀不得
이름 지을 수도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서산대사 휴정의 글을 보고 한마디 해보는 것이
오늘 선과 깨달음의 마지막 숙제입니다.
기왕이면 정결한 한글로 된 시로 답해보면 좋겠네요.
이것은 좀 천천히 음미하면서 해도 상관없습니다.
선문답도 가끔은 느림의 미약이 필요합니다.
저도 한번 따라 해보겠습니다.
일물무상명一物無相名
이름과 모양 없는 한 물건이
독자낭송시獨自朗誦詩
스스로 시를 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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