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는
두 번이나 마음과 관련된 구절이 나옵니다.
마음이 가난하면 복이 있고
마음이 깨끗해도 복이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그 사람의 것이고
하나님을 봅니다.
이 두 구절을 잘 살펴보면
선 공부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은 선의 원리이기도 하죠.
이것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선의 형식을 찾는
많은 석학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마음이 가난했던 사람이라거나
마음이 가난해지면 복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완전 현재형입니다.
지금여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에 있다고, 하느님을 본다고 합니다.
그리스어로 서술된 신약성경의 산상수훈은
술어 부분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데서 비롯되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면 이럴 것이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선언에 가깝습니다.
“삼계에는 아무 법도 없는데, 어디서 마음을 찾을꼬?”
“너와 내가 비었는데, 말하는 자는 무엇이며 듣는 자는 무엇인가?”
산상수훈을 글로 써서 전한 그리스어에서
해당 구절의 가난은 프토코스인데
그 뜻을 보면 그건 막연한 빈곤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비참한, 극단적인 빈곤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극단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상태를 의미할까요?
분별, 계산, 판단,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우리의 경험에서는 예상 못한 재난을 당한 상황이 아니면
그러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일생 동안 이런 경험을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말뜻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벼랑 끝에 몰릴 때까지
우리는 자기 마음의 한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 공부가 이런 마음을
꺼뜨리는 상황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도
그 깊이나 세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경험이 없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어쩔 수는 없습니다.
다만 겸허하면 됩니다.
선의 초조인 달마가
수제자인 혜가를 만나는 장면에서
저는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왜 예수가 마음의 가난과 깨끗함에
천국과 하나님을 대입했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왜 밤새도록 떨며 서 있는가?”
“저에게 깨달음의 말을 들려주십시오.”
“깨달음이란 깊고 깊거늘
어찌 그 조그마한 지혜로서 엿보려 하는가?
목숨을 바칠 각오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네.”
“저희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 그대의 마음을 편하도록 해줄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그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구도자의 길에서 목숨을 바칠 각오라는 것은
일상적인 삶에서는 분명 재난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리는 것이죠.
기대가 사라지고 희망이 부정됩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고통의 잠재적인 근원인
미래를 놓고 진실을 봅니다.
선은 사실상 모든 상황에서 이런 재난을 연출합니다.
자기는 부정되며
공덕은 헛되고
행자는 밥버러지로 여겨지며
제자는 내쫓깁니다.
거기에 천국의 복덕이 드러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치로도 알 수 없고
뜻으로도 알 수 없으며
아무 재미도 느껴지지 않아
마음이 뜨거워지고 답답해질 때
바로 이 자리가 목숨을 놓아버릴 곳이며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기본이 된다.”
조주 스님의 말처럼 그곳은
수행자의 마음이 가난해지는 자리이고
구도자의 마음이 깨끗해지는 자리입니다.
천재지변이 인간 사회와 타협하지 않는 것처럼
깨달음도 사람의 영혼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한 조각의 염원도 마음이니까요.
일휘상도참춘풍, 서리 칼을 휘둘러 봄바람을 베어내니
설만공정락엽홍, 눈 쌓인 빈 뜰에 붉은 잎 떨어지네
저리시비재변료, 여기의 옳고 그름을 가까스로 알아내자
반륜한월침서봉, 차가운 반달이 서쪽 봉우리에 걸렸다.
마음이 가난한 이가 천국에 드는 것은 자연스럽고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보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압니다.
맑은 물을 얻으려면
찌꺼기는 모두 걸러야 합니다.
한 스님이 물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허공의 마음으로 허공의 이치에 합한다’ 했는데, 무엇이 허공의 이치입니까?”
“확 트여서 겉도 끝도 없다.”
“무엇이 허공의 마음입니까?”
“사물에 걸리지 않는다.”
“어찌해야 들어맞겠습니까?”
“그대가 그렇게 말하면 들어맞지 않는다.”
허공의 마음은 마음이 가난한 자의 마음입니다.
이 문법을 이해하면 많은 선문답이 다가올 겁니다.
그때는 주기도문 또한 훌륭한 선의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완전함이 먼저이며
그 나라가 여기 임하고, 그 뜻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가난한 마음은 숭산 스님이 말한
‘오직 모를 뿐’인 마음입니다.
오직 모르는 마음이 곧 다 아는 마음입니다.
예수는 그렇게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계율을 다 지켰다는 젊은이에게
예수는 재산을 다 팔아 나눠주고 제자가 되라고 합니다.
청년은 근심에 쌓여 떠나갑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누군가 남전 선사에게 비슷하게 물었습니다.
“화상께서는 무슨 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칩니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니라.”
“무슨 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까?”
오늘 주제가 신약에서 나온 것이니
선문답의 답도 성경에서 찾아 올립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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