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가 4조를 보기 전엔 어떠했습니까?”
“옷 입고 밥을 먹었다.”
“본 뒤에는 어떠했습니까?”
“발우를 벽에 걸어둔다.”
우두 법용 스님은 선종의 4대조인 도신의 제자입니다.
전등록에는 스승이 제자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깊은 산에 혼자 있던 우두를 도신이 찾아갔는데
주변에 산짐승들이 거처하는 곳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시오?”
“마음을 관찰합니다.”
“관찰하는 것은 누구이며 마음이란 어떤 물건이오?”
질문을 받은 우두가 벌떡 일어나 절을 했습니다.
도신이 자신을 소개하고
우두는 평소 만나고 싶었던 감회를 말합니다.
도신이 잠시 앉을 곳이 없냐고 하자
우두가 작은 암자로 안내하는데
암자 둘레에 호랑이들이 우글거립니다.
도신이 두 손을 들고서는 겁내는 몸짓을 하자, 우두가 묻습니다.
“아직도 그런 것이 남았습니까?”
“지금 무엇을 보았는가?”
우두는 답을 하지 못합니다.
잠시 후 우두가 좌선하는 바위 위에 도신이 부처 ‘불’자를 써줍니다.
부처를 깔고 앉는다는 생각에
우두가 송구함을 감추지 못하자 도신이 묻습니다.
“아직도 그러한 것이 남았는가?”
우두 법용의 스승인 4조 도신 선사는 무심법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절히 마음을 쓰려 할 때는 적절히 무심을 쓰라.
자세한 말은 이름과 형상에 지치게 하니
바로 설하면 번거로움이 없다.
무심을 적절히 쓰면 항상 쓴 대로 적절히 없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무심을 설해도 유심과 전혀 다르지 않다.”
흔히 우리가 아는 염불이라는 말은
경전을 외워 독경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종에서 염불의 본래 뜻은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의 이름’이었습니다.
부처를 염한다고 해서 염불이었고
여기에 선을 붙여 염불선이라고 했습니다.
염불은 곧 불심을 고하는 것, 염하는 것이고
불심이 곧 무상이니
생각으로는 구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선종의 염불선의 뜻입니다.
그래서 불심, 무심, 자심, 즉심이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키며
무상, 무주, 무생으로 확대해도 같은 것입니다.
결국 염불, 무심은
무상의 연기법을 관하는 것이죠.
도신이 제자 우두에게 묻는
“관찰하는 것은 누구이며, 마음이란 어떤 물건이오?”라는 물음의 본뜻을 제가 바꿔보면
“그대가 관찰하고 있는 이 상황이, 뭔지는 아는가?”입니다.
마음을 보라고 하면 우리는
나의 심리 상태를 관찰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게 마음이라고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생각과 감정, 감각도
물론 마음에 속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좀 더 깊고 넓게 봐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마음을 보면
처음 느낄 수 있는 것은
내 의식의 감각으로 알려지는 사물과 명칭, 생각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계속 움직이고 바뀌고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해서 잡념과 욕망을 지우겠다는 의도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걸 지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지우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그냥 놔두는 거죠.
그런 건 계속 바뀝니다.
지나가도록 놔두는 편이
가라앉히기에는 더 낫습니다.
그렇게 거친 물결이 줄어들면
그때부터는 본래 그렇게 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를
즉각 즉각 알아차립니다.
그게 위파사나인지, 사마디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만
감각과 지각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건 압니다.
기억과 감정이 생각을 일으키고
또 그것은 실시간으로 감각과 섞여서
다른 느낌과 생각을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세상과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의 실상은
사실 그것밖에 없습니다.
멍청하냐 예리하냐 하는 인지 수준의 차이는 있어도
예외는 없습니다.
“어떤 것이 학인들이 마음을 쓸 곳입니까?”
“마음을 쓰면 틀린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땐 어떠합니까?”
“쓸모없는 놈이구나.”
마음을 쓰면 틀렸지만
그렇다고 아무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가 선을 공부하는 이유는
마음이 일어나는 곳에서
마음을 쓰지 않는 법을 배우려는 것입니다.
단순히 빈정 상하지 않는 내공이 아니라
원리와 이치를 알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혜를 갖추어야
대중의 어려운 물음에 잘 맞춰 대답합니까?”
“말 구절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연기법의 지식을 잘 갖추어서
책을 수권 쓸 정도가 되었더라도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연기적 현상을 관찰할 근기가 없다면
그것은 지혜가 되지 못합니다.
잡념을 일으킬 이름을 잔뜩 지어놓은 것입니다.
“무엇이 어려운 것입니까?”
“도끼로 쪼개도 들어가지 않는다.”
실제로 쪼갤 수 없어서 그냥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수백 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결국 쪼개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꼬였던 내 시선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도신은 말합니다.
“무심한 가운데 경계에 처하여 견문각지 하면
견문각지에 자유자재하게 된다.
이것이 원숙해지면
견문각지가 한없이 넓고 깊어져
지혜의 바다가 된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연기법의 진실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천지라는 것을
내 마음 말고서는 찾을 길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잡념을 없애서가 아니라
진실을 봐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나무는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고, 천지의 가을바람만 가득하지”
“보는 사람은 목이 마르고
묻는 그대는 살이 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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