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도장을 찍어라”라고 하는데
마음에 찍히는 도장이 뭡니까?
사람 사는 세상에는
종이, 나무, 쇳덩이, 심지어 고깃덩어리 위에도 도장을 찍습니다.
아시죠?
예전에는 정말 도장 찍는 것이 증빙이었죠.
요즘은 생체인식 기술이 발달해서
도장을 찍는 일이 줄었지만
여전히 인감을 가지고 증명해야 할 일이 생깁니다.
서명을 하든 직인을 찍든
뭔가 정체를 확실히 나타내야 하는 일에는
표시하는 방법을 써야 할 일이 생기기 마련이죠.
마음에 도장을 찍는 일은 우스갯소리로
“넌 내 거야” 하는
남녀 간의 애정 행각에 가서야
겨우 그 의미를 압니다.
마음도장이라는 의미가
겨우 이해되는 거죠.
그래서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그냥 스탬프가 아니라
지울 수 없는 인증을 한다는 겁니다.
지울 수 없다는 것.
국가 사이의 조약을 하면서
대통령과 수상이 서명을 하면 지울 수 없도록 코팅을 하죠.
이보다 더한 건 타투가 되겠죠.
“난 죽어도 착하게 살겠다.”
그런 뜻으로
‘착하게 살자’라고 몸에 퍼런 멍자국을 새겨 넣은 거겠죠.
장강징철인섬화, 저 강물 위에 배어드는 달빛이요.
만월청광미시가, 눈 가득 그 푸른 빛마저 거부하네.
차문어주하처거, 고기잡이 저 배여, 어느 메로 가는가
야심의구숙노화, 밤이 되면 어제처럼 갈숲 속에 잠드네.
이 세상에는 자국을 남기는 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주괴공이라 모든 것이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서명 같은 건 없습니다.
강에 달이 둥둥 떠 있고
그게 하느님의 서명입니다.
대사가 누웠는데 비수화장이 와서 말했다.
“무엇을 하시오?”
“이불을 덮었소”
“누웠소, 앉았소?”
“눕고 앉는 데 있지 않소?”
“그렇다면 어찌 덮었다 하셨소?”
“어지럽게 말하지 마시오.”
덮고, 눕고, 앉고가 모두 흔적이라 어지러울 뿐입니다.
“무엇하냐?” 묻는 질문 자체가
무슨 착각을 하는 중이냐고 묻는 것이죠.
흔적을 남기는 모든 것은
형상이라는 착각입니다.
착각이라고 하기 전에는
연못에 뜬 달을 건져내려고 합니다.
산승탐월색, 스님이 저 달빛에 욕심이 생겨
병급일병중,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도사방음각, 절에 돌아와 비로소 깨달았네.
병경월력공, 병이 기울자 달도 따라 공인 것을.
자기가 강 위에서 낚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달그림자를 쫓아가야 하겠지만
강 위에 뜬 달빛이 한 꺼풀에 보이는 사람은
그럴 일이 없습니다.
물 위의 달 그림자를
하늘의 도장, 서명으로 압니다.
천강에 뜬 월인의 주인을 알기에
그것이 인감인 줄도 압니다.
선승들이 연기법을 일러주는 방식이 이렇습니다.
천 개의 강에 뜬 달빛 같은 것
맑은 산중의 구름 같은 것
눈병으로 보이는 가짜 꽃 같은 것
그리고 그것을 아는 그대의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
이 무엇인가? 이 뭐꼬?
제행무상, 생주이멸의 인도식 문법과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종교적 관점으로는 거룩함을 벗어났죠.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이용해
개념 관념으로 벌어진 거리를 줄일 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대사가 관속들과 누각에 올랐는데
멀리서 중 몇 명이 오고 있었다.
어떤 관리가 말하길
“저들은 모두가 행각하는 스님네지요?”
“아니다.”
“어떻게 아닌 줄 아십니까?”
“가까이 오거든 물어보자.”
중들이 누각 바로 앞을 지날 때 대사가 갑자기
“스님네여” 하고 부르니 중들이 모두 돌아보았다.
대사가 말했다.
“내 말이 맞지 않냐?”
거룩함과 더러움을
한 손에 가지고 노는 것이 선입니다.
이것들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차원의 비밀입니다.
면으로만 다니는 2차원 존재에게는
3차원의 높이가 없습니다.
절대 가기 전에는 모르는 그것을
한눈에 본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대사가 불렀을 때, 자신을 스님이라고 여기는 순간
나는 스님의 지위를 얻었으며
그 지위를 얻은 나는
생주이멸의 꿈속 원리에 자신을 엮어버립니다.
행각은 곧바로 짐이 되며
벗어날 방도를 지웁니다.
3차원은 잊혀지고
2차원은 굳건해집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왜 없습니까?”
“그러면 있다.”
집을 떠난 탕자가 돌아오자
아버지는 반갑게 맞아들입니다.
늦었다고 꾸지람을 하거나
지난 세월을 한탄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셈법이 없습니다.
스스로 나갔고 스스로 돌아왔습니다.
죄책도 스스로 하는 것이라
남는 것은 스스로 뿐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아들이 자기 발로 돌아왔지만
법화경에서는 탕자가 집 근처로 우연히 지나가다가
아버지에게 발견됩니다.
탕자는 떠난 지가 너무 오래되어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나가고 돌아오고가 없고, 스스로만 있는데,
그것마저 까먹으면
차원을 넘는 방법을 써서 알려줄 수밖에 없습니다.
밖에 나가면 없고, 안에 들어오면 있습니다.
또한 밖에 나가야 있고, 안에 들어오면 없습니다.
“왜 나는 괴롭습니까?”
“기쁜 것이다.”
“기쁨이 뭡니까?”
“슬픔이다.”
우리 차원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아도
말이 안 되는 것을 부둥켜 안으면
차원을 넘어갈 힘이 생깁니다.
아비를 못 알아보는 아들을
하인으로 써서라도 머무르게 해야 합니다.
무슨 애증의 변증법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중이 거북이를 보며 말하길
“온갖 중생은 가죽이 뼈를 쌌는데,
저 거북이는 뼈가 가죽을 쌌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대사가 짚신을 들어다가 거북이 곁에 놓으니
중이 말이 없었다.
오늘은 성자들의 답을 들어보겠습니다.
예수가 대답합니다.
“하늘나라가 저 짚신에 있냐? 거북이 뼈에 있냐?
아니면 너에게 있느냐?”
석존도 대답합니다.
“짚신이 이리 있는 것과 거북이가 저리 있는 것은
오직 너 때문이다.”
선사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짚신은 해가 없지만
너의 뼈가죽은 필시 거북을 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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