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선과 깨달음, 북을 칠 줄 안다

Buddhastudy 2025. 1. 21. 19:21

 

 

화산이 법문을 했다.

익히고 배우는 것을 듣는다하고

배움을 끊은 것을 가까이 갔다 하고

이 두 가지를 다 지나면 진짜로 지나왔다고 한다.”

그러자 한 스님이 물었다.

진짜로 지나왔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북을 칠 줄 안다.”

무엇이 참된 이치입니까?”

북을 칠 줄 안다.”

마음이 부처라는 것은 묻지 않겠습니다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북을 질 줄 안다.”

앎이 높은 이가 올 때는 어떻게 맞이하시겠습니까?”

북을 칠 줄 안다.”

 

무슨 말을 해도 북을 칠 줄 안다라고 하니

질문하고 듣는 스님이 즐겁지는 않았겠습니다.

뭐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똑같은 거라도 뺨 맞는 건 더 괴롭습니다.

 

운문 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요즘 어디 있다 왔느냐?”

서선사에서 왔습니다.”

서선사에서 요즘 무슨 얘기들을 하더냐?”

스님이 양손을 벌리자, 운문 스님이 한 차례 뺨을 후려쳤다.

스님은 말했다.

제게도 할 말이 남아 있습니다.”

운문 스님이 문득 두 손을 펴보였다.

스님이 말이 없자 운문 스님이 다시금 후려쳤다.

 

아마도 거기서 그렇게 따귀를 면하려고 계속 있다가는

뺨이 서천 노을처럼 붉어지는 일을 면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게 바로 북을 치는 겁니다.

 

사실 다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

달리 들릴 뿐입니다.

이것! 수미산! 차나 한잔 마시게

! ! 몽둥이가 같고

주장자와 북채는 일과 한숨 소리가 같습니다.

 

사실 북치는 소리를 듣는 곳까지 왔으면

상당한 수준, 진보에 도달한 것입니다.

선불교는 처음부터 공안을 접수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어느 정도까지는 다 배워야 이런 직지 법문을 했습니다.

 

읽고 들어야 할 것, 이해해야 할 것, 숙지해야 할 것

적용해야 할 것, 점검해야 할 것이

어느 정도 순환 사이클에 들어가 스스로 궁금한 것을 묻게 되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들어갑니다.

 

이런 과정이 어느 정도 충족되어 가르침을 받을 수준이 되어야

질문도 오고, 답변도 갑니다.

격론에 대한 것에서 비롯해

격론을 실제로 눈에 비추는 법문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겉으로는 이런 과정을 다 거쳐왔다고 해도

속이 차지 않으면 판판이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선사들은 비슷하기는 하지만 옳지 않은 것을 찾아내는 도사들이고

그것에 전문화되어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요컨대 그의 병맥을 알고

막힌 곳을 가려내며

치우친 곳을 캐물어 일깨워주고

집착과 막힘을 버리게 해야 한다.

그런 뒤에 본분 종지를 보여줘 의혹이 없게 해야 한다.

 

어떤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가르쳐 주기를 청하자

운문이 말했다.

절 좀 해봐라.”

스님이 절을 올리고 일어나자, 운문이 주장자로 밀쳐버렸다.

스님이 뒷걸음 치자 운문이 말했다.

너는 눈이 멀지는 않았구나.”

다시 그를 불러 앞으로 가까이 오라 하여 스님이 다가오자

운문이 말하였다.

귀머거리는 아니구나.”

그리고는 물었다.

알았느냐?”

모르겠습니다.”

너는 벙어리는 아니구나.”

스님이 그로 인해 알아차리는 바가 있었다.

 

연기법의 진실

성품은 우리를 떠난 적이 없고

늘 바로 지금 여기에 있어서

언제든 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라 보라 보라고 하고

예수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합니다.

 

그냥 그런 겁니다.

불성을 보고 성령에 속하는 것은

무슨 초능력이 아닙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들었고

얼마나 오랫동안 했는지 알면

아마 두 손 두 발 다 들고 그냥 하산할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야기를 해 준 분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방법이 점점 첨하고 예해지는 겁니다.

첨예의 경지에 가면서 그게 조사들의 스타일이 됩니다.

방과 할, 차 한 잔에 주구장창 북소리

그리고 세 번 반복에 구분동작 두 번

이런 식으로 정리되는 것이죠.

습관이나 매너리즘이 아닙니다.

 

특히 선불교는 이미 대승의 경론들이

모두 중국화된 이후에 발생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공부해야 할 것들은 아예 시험 대상이 아닌 상황입니다.

 

우리가 보는 사례들이 비록

서투른 수작 같아 보여도

선문집에 실려 전수될 정도로

고수들의 한 판, 최소한 자격시험은 넘은 수준의 제자인 겁니다.

 

운암 스님이 도오 스님에게 물었다.

대비보살은 수많은 손발을 사용하여 무엇을 합니까?”

사람이 한밤중에 등 뒤로 베개를 더듬는 것과 같다.”

알았습니다.”

뭐냐?”

온몸이 손이요 눈입니다.”

큰소리는 쳤다만 열이면 여덟을 말했을 뿐이다.”

사형께서는 어떠십니까?”

온몸이 손이요 눈이다.”

 

수작이라는 말은 좋은 어감은 아니지만

본뜻은 술잔을 주고받는 것을 말합니다.

빈 잔의 제사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보이는지, 어쩌면 안 보이는지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이런 수작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떤 스님이 지문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반야의 체입니까?

조개가 밝은 달을 머금었다.”

무엇이 반야의 용입니까?”

토끼가 새끼를 뱄다.”

 

거기다 공안의 상황에서 긴 설명은

곧바로 생각을 불러내 기회를 내쫓기 때문에

선사들은 최대한 시간을 줄여 담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친절한 단문으로 보일 뿐

말 두 마디에 온 우주를 담아 보입니다.

 

경전에서 말하길 항상 보리의 자리에 앉아 계신다 하니

어떤 것이 그 자리입니까?”

노승은 앉아 있고 자네는 섰구만

 

자기가 온 우주인 것을 모르는 이에게

말하는 본 뜻을 좀 길게 풀면 이렇습니다.

아이고 제가 또 업보를 쌓습니다.

노승을 주저앉힌 하늘과 자네를 일으킨 땅이

못 만난 지가 겁 세월이구나.

허니 서서 묻지 말고

앉고 나서 알아보면 어떻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