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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실존주의와 깨달음 (1/2)

Buddhastudy 2025. 1. 22. 19:20

 

 

실존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다양한 용도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 범주와 범위를 정해 놓지 않으면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이 단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일은 많지 않지만

써야 할 때는 그래야 오류가 적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단어 뜻만 보면 그럴 일이 없어 보입니다.

실존, 실로 존한다

뭐 이게 어려운 단어도 아니고

왜 이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를 뜻하는 용어가 되었는지가

의문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역시 서구철학에 있습니다.

실존

이 단어가 복잡한 뜻을 지니게 된 것은

20세기 초반에 태동한 일종의 사상적인 유행을

실존주의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합니다.

 

그냥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간의 주류에 반대하는 사조, 사상의 흐름이었습니다.

I AM THAT 채널을 통해 잠깐 언급할 정도로만 소개해 드린

서구철학의 존재론, 인식론 같은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한 철학자들의 입장이 실존주의였다는 겁니다.

 

이분들을 대할 때 난제는

같은 생각도 아니고 하는 이야기도 다 다른데

죄다 실존주의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좀 난감하죠.

 

제 경우에 실존주의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영화배우처럼 생긴 작가 알베르 까뮈입니다.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고등학교 시절 읽어서인가

어려운 말 많이 하는 니체도 같은 시절에 읽었 건만 소설만 남았죠.

독일의 하이데거, 야스퍼스,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 프랑스의 샤르트르 등을

대표적인 철학자로 둡니다.

더 심오한 연구는 김필영 박사님 같은 철학 유튜버들에게 맡기죠.

 

깨달음 공부에서 실존주의를 언급하는 일은 많지 않지만

서구철학의 사조가 그 이후 아주 세속적인 실용주의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이런 경향을 두고 언급한 분들은

주로 미국에 둥지를 둔 학자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켄 윌버나, 데이비드 호킨스 같은 선각들입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실존주의가 이성적 합리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였지만

넘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해 좌절해 버린 시도였다는 겁니다.

 

존재를 뿌리째 흔들어 놓는

결국 각자가 직면해야 할 핵심적인 경험이 있다는 것이

실존주의의 공통적인 주장이죠.

그 같은 경험은 기존의 언어로는 이름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실존주의에서는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을

실존적 불안이라고 합니다.

관습, 이성, 철학, 종교에서 소외를 느꼈던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공포라고 부르는데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근원적인 불안정함을 인식할 때

존재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고 표현합니다.

 

샤르트르의 구토, 자살에 대한 카뮈의 탐색도 마찬가지이고

두려움보다 삶의 기반을 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던 니체도

이 범위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런 시도는 모두

인간의 삶에 가르침과 근거가 되었던 이전의 의미 구조가

더는 유지될 수 없다는 예리한 통찰에서 나왔습니다.

 

더는 인간의 삶에 명확하고 절대적인 기반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신은 죽었다하고 선언됩니다.

 

결국 실존주의는 삶을 정당화해 주는 절대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근거가 상실되었다는 인식에서 비롯됐고

그래서 의미 없는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고 창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실존주의자들에게

인간의 삶은 영웅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영웅적 의미를 갖는

그런 노력의 전형이 시지포스 신화입니다.

파이는 계속 굴러떨어지지만

계속 그것을 다시 끌어올리는 시지포스로 대표되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창조한 의미는

절대적인 기반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불안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인정하거나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오히려 직면해야 할 상황을 피하기 위해

습관적인 일상에 몰두하거나 무시하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중세의 종교와 근대의 합리주의 이후

인류가 처한 상황입니다.

 

이렇게 발밑의 땅이 꺼지는 것 같은 경험은

실존주의나 불교 전통에서 모두 핵심이 되는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실존주의에서 그것은 불안의 원천이며

불교에서는 깨달음, 해방으로 가는 길의 시작입니다.

 

존 웰우드의 <깨달음의 심리학>을 인용해

이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삶을 지탱하던 버팀목이 사라질 때

우리는 갑자기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낍니다.

기존의 삶의 의미는

그 무게와 실체감을 잃고, 그전처럼 충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전에는 성공이나 성취, 부를 이루려는 꿈

가족을 부양하려는 소망이, 동기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왜 이런 일들을 하고 있으며

이런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삶의 이유와 근거를 가지길 바라지만

견고하고 안정된 것을 붙잡으려는 그런 시도는

변화무쌍한 삶 앞에서 헛된 희망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낡은 구조가 무너졌지만

그것을 대체할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을 때

마치 속살이 드러나는 것처럼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그 순간 발견하는 인간의 나약함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이야말로

인간됨의 핵심입니다.

 

정체성이라는 버팀목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자신의 근원적인 나약함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과 근원적인 나약함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인간 본성의 깊은 면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실존주의는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수준으로 보면

이성과 합리 400대를 지나

400대 후반 수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존주의 다음 단계는 500

즉 이성과 지성으로 다가갈 수 없는

이른바 재질이 다른 영성의 영역입니다.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는 진입할 수 없는 것이죠.

실존주의의 실패는 여기서 비롯됩니다.

이 내용은 캔 윌버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인용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실존적 수준의 전체 핵심은

아직 자아초월 수준에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렇지만 개인적 수준에도 더 이상은

총체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전체의 개인적 영역은

그 매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고

아주 심각하게 무의미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른바 미소 지어야 할 이유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입니다.

 

흥미 있는 점은

성장 발달의 모든 정통적 표준에 따르자면

켄타우로스, 초월 이전의 마지막 수준은

행복하고 충만하고 즐거움이 넘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켄타우로스 수준의 자기는

발달의 모든 표준에 따르자면

언제나 미소 짓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은

미소 짓지 않고 있고, 뼛속 깊숙이 불행한 것입니다.

그것은 통합되어 있고, 자율적이면서도, 비참한 것입니다.

 

실존 의식은

개인적 영역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맛보아 왔고

그래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세계는 그것의 애원 속에서도 무미건조해지기 시작했고

그 어떤 체험도 이제 더 이상 좋은 맛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이제 더 이상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이제 더 이상 추구할 값어치가 없습니다.

 

실존주의자 한 개인이

이러한 보상들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한 개인이 그 보상들을 아주 훌륭하게 성취해 냈고

그것 모두를 맛보았고

그래서 그것 모두가 결핍되어 있음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이러한 영혼은

그다지 마음껏 미소 짓지 않으며

이것은 모든 위안이 소용없게 되어버린 영혼인 것입니다.

세계는 최대의 승리를 쟁취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곧바로 무미 건조해져 버린 것입니다.

 

이상의 언급한 것이야말로

곧 모든 욕구가 희박해지고, 창백해지고

빈혈 상태가 되어버린 영혼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을 정면으로 맞서는 속에

철저하게 그것에 넌덜머리가 난 영혼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개인성이 총체적으로 무미건조해져 버린 영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초개인적 자아초월영역의 가장자리에 와 있는 영혼입니다.

 

좀 당황스럽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철학자들이 우글거리는 이런 지점도

겨우 자아 영역에 불과합니다.

 

이성과 지성으로는

자아를 넘어서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들 실존주의를 거꾸로 거슬러 가면 만나는 원조격인

칸트는 그나마 좀 더 접근했습니다.

 

그의 3대 비판서의 핵심을 한마디로 줄이면

진리는 이성, 지성

즉 생각으로는 알 수 없다는 논증입니다.

서구 철학자가 불교식 표현인 진리는

언어도단임을 밝혀낸 것이죠.

 

수천 년 전에 이미 불교가 확정한 언어 도단을

수천 년 후, 세계적인 지성으로 평가받는 극히 일부가

겨우 그런 것 같다는 수준으로 밝혀낸 것입니다.

 

그마저도 칸트가

자아를 초월하는 의식을 체험한 것도 아니며

불교식 표현으로 일견도 아니고

기독교식 표현으로 성령에 속한 사람도 아닙니다.

 

체험적 확증이 아니라 사고적 추론일 뿐입니다.

종교의 실패를 극복하려고 한 인류의 철학은

여기서 멈춰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거기는 철학으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