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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실존주의와 깨달음 (2/2)

Buddhastudy 2025. 1. 23. 19:06

 

 

켄 윌버의 초기 의식수준 모델에서

실존주의는 정중앙에 위치합니다.

이른바 세계관의 발달 단계에서

켄타우로스라고 표현되는 실존 수준은

전 개인과 초 개인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원시적- 마법적- 신화적- 합리적

(실존적, 켄타우로스)

심령적- 정묘적- 원인적- 비이원

 

알다시피 켄타우로스는

말의 몸에 인간의 상체가 붙어 있는 그리스 신화 속의 존재입니다.

켄 윌버의 의식 발달 모델에서

켄타우로스가 상징하는 것은

육체와 정신의 분열을 극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 신체를 바깥에 있는 것으로 분리하는 자아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상태를 넘어서 있습니다.

개인적 인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우리는 이미 윌버- 콤즈 격자를 통해

의식의 수준, 구조와 상태에 대해 알아본 바 있습니다.

윌버의 초기 모델에서 정묘, 원인적 수준은

후기 모델에서 상태로 편입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참고적으로 살펴보면

이른바 실존수준의 아래와 위에 대해 이해를 좀 더 깊게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의식, 켄 윌버의 표현으로 확장된 대둥지는

물질, 신체, 마음, , 그리고 영을 포함합니다.

개인을 초월하는 수준 이전에는

적어도 4개의 성장 단계를 갖는데

그것이 마법, 신화, 합리, 실존의 단계입니다.

 

사람의 연령대로 표현하면

마법적 수준은 2~ 5

친화적 수준은 6~ 11

합리적 수준은 11세 이후이고

그 이후 실존적 단계를 접할 수 있습니다.

 

*마법적 수준이란

자기도취에 빠진 에고의 상태입니다.

이 에고는 세상을 직접 또는 마법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영유아 의식의 특징이기도 하죠.

 

주체와 객체가 명확히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마법적 에고는

세상을 스스로의 확장으로 간주하며

자기중심적 특성으로 물들입니다.

 

이 수준에서는 자기도취와 자기 중심성이 지배합니다.

비유적으로는 예를 들면

타잔이 소리치면 온갖 동물이 모여드는 것처럼

세상이 타잔 마음대로입니다.

 

*신화적 수준에서 에고는

자기가 기적적으로 세상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지만

신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 연령으로는 사춘기 이전의 소년, 소녀입니다.

여기서 에고는 스스로 마법을 행사해

세상을 쥐고 흔들지 못한다는 최초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따라서 자기도취의 축소이자

자기 중심성의 감소가 일어납니다.

실제로는 종교적, 신앙적 수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다음은 합리적 상태이고

우리가 아는 통상의 지적이고 이성적인 수준입니다.

이 수준 전까지는 전 개인적

이 수준을 개인적

이 수준 이후를 초개인적으로 분류하는데

켄 윌버는 실존 상태인 켄타우로스 수준을

개인적 수준의 최고 수준으로 놓습니다.

 

*실존 상태 켄타우로스 수준은

철학 사조인 실존주의가 직접 체험한 의식수준이기도 합니다.

 

켄타우로스의 실존 수준을 넘어서면

*심령, 정묘영역이 나타납니다.

캔 윌버가 후기 모델에서 구조적 수준이 아닌 상태로 수정했던 정묘 원인을

초기 모델에서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는 수준에 놓았던 것은

그것을 초개인적 영역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신비 체험, 형태 공명, 비형상의 존재 같은 특징이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고

사실상 그것은 개인적 대역을 넘어서 있습니다.

 

 

의식수준을 이런저런 모델을 통해 알아보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현재 상태를 짚어보고

목표와 방향을 가늠하는 이해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윌버는 인류가 진화 과정 전체를 거치면서 밟아온 주요한 변화들을

각 개인들이 대략 20세 정도까지 그대로 반복한다고 합니다.

 

윌버만이 아니라 여러 깨달음 전통이 비슷하게 말합니다.

개인의 진화는 인류 전체의 진화 과정을 정확히 그대로 반복한다고

구르지예프도 말합니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

 

구르지예프는 한 술 더 뜹니다.

당신이 평생 동안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지냈는데,

당신은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며

심지어 영리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말해보면

그가 완전히 바보라는 사실을 즉시 알게 될 것입니다.

 

구르지예프가 지적하는 부분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식이 위치하는 곳을

잘 모른다는 것이죠.

 

단적으로 말하자면

실존 수준에 와서야 사람들은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구르지예프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하나의 일반적인 규칙이 있는데

여기에 진지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우선 실망해야 하고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 실망하고

기존의 모든 방법에 대해 실망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방법에 실망해야 거듭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런 의식수준이 바로 실존주의 수준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욕망을 이루기 전에는 항복하기가 불가능하고

출세해 보기 전에는 출세길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실존주의 수준만 해도

모든 방법과 수단을 포기하는 경지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수준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다고 봐야 하겠죠.

 

깨달음 공부를 어디서 시작하든

이 수준에 이르러야

진짜 공부를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존 수준에 이르지 못한 상태를

지드 크리슈나무르티를 인용해 정리해 보자.

 

인간이란

무질서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극단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알게 모르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너무나도 무겁게 조건화되어 있고

어떤 단체나 어떤 특정한 제도, 특정한 이념의 조건화되어 있어서

그런 것들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홀로 선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의 중심적인 문제는 생각,

즉 생각의 전체구조입니다.”

세상의 모든 구조가 생각의 결과인데

생각은 기계적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의 전체 구조에 대해 참다운 깨달음이 없다면

거기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없다면

결코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생각이란

우리 인간 존재의 핵심입니다.”

영혼이니, 신이니, 지옥이니, 천당이니, 뭐니 등은

모두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죠.

 

생각은 두뇌 세포 속에 저장된 경험과 지식과 기억 반응입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는 대부분 기계적입니다.

기계적이라는 것은

생각에 의해서 형성된 이미지를 말하는데

나와 너의 이런 이미지는 오래오래 우리를 지배합니다.

 

이런 이미지는 방어막이 되고, 벽이 되고, 타산적으로 되어서

스스로의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관계라고 부르죠.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어요.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상처받기 싫고, 상처 주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나는 방어의 울타리를 쌓는 것이고

너 또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과정은

결국 기계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됩니다.

그렇게 기계적이고 파괴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항상 도망만 다니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진실을 보게 되는 순간

생각은 더 이상 문제를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참 절실한 마음으로 하는 말입니다만

이것이 얼마나 놀라우리만치

간단하고 미묘하며 아름다운 것인지 보세요.

 

이런 사실을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보게 되는 순간

이제는 세상의 허구와 위선을 깨닫게 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점은 지두가 말하듯

관념과 표상을 넘어서는 곳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예술가들조차 그것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런 사실 자체를 아는 지식인도 드뭅니다.

제 개인적 경험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과

인지 혁명의 의미를 찾아내고

상상의 질서를 인간 사회의 구조와 원리로 명확히 제시한

유발 하라리 정도가 아닐까 하네요.

 

실존주의 수준은

사실상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통상적인 마지막 수준입니다.

세상의 모든 논의는

그리스도의 영역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

더 이상 발전이 없어 보입니다.

 

관념과 표상으로의 세계는

바깥으로 나간 시선이 찾아낸 세상입니다.

인간 에고의 대부분은 언어화되지 않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데

생각 자체가 언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어로 이루어진

기존의 모든 철학, 종교, 윤리, 미학 등등의 형이상학은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무의미한 말장난이자 멍청한 헛소리가 됩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 머릿속에서만 그린

있지도 않은 상상이자 추론에 불과하죠.

달리 표현하면 그런 거 없습니다.

 

박문호 박사는 말합니다.

“70억 인구 중에 겨우 1%도 안 되는 사람들만이

가까스로 <문자 언어생활 수준>에 진입했다고 말입니다.

 

우리 인류가 이런 수준인데

실존주의 수준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지 못하는 이상

거기서 더 진보할 수는 없습니다.

 

모른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알 수 없다고 하든

모두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들이 가리키는 대상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성령, 불성, 본질, 순수, 절대를 말합니다.

 

이는 오로지 자신의 [직접 체험]으로써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종교와 철학이 이 지점에서 모두 길을 잃는 것이죠.

이런 시도의 최첨단 사례가 바로 실존주의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두 개의 동영상에 걸쳐

실존주의 의식수준과 깨달음의 관계를 살펴봤습니다.

전 개인을 완전히 벗어난 초개인 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실존수준에 다다라야 합니다.

 

그런데 실존은

개인 영역의 모든 요소를 통합해 분열을 치유하고

그 수준의 완성에 도달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그것을 이룬 모든 수단을

포기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몰려 있습니다.

 

선택은 마치 선문답처럼 주어졌습니다.

모든 진보는 각각의 의식수준에서 거대한 포기를 통해 일어납니다.

실존의 수준에서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관념과 표상을 내려놓고 시선을 안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길에

한 치도 내딛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