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일도 아니고
꽤 오래된 20세기 후반의 이야기지만
아직까지는 첨단이라고 여겨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뇌과학이 밝혀낸
사람이 뭔가를 아는 프로세스입니다.
그중 마음을 정보처리 체계로 보는 시각에서는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이렇게 정리합니다.
“세상에 대한 어떤 표상적 관계성을 지니고 있는
내적표상, 즉 상징 구조의 정보 처리적 조작을 가해
인간은 체계가 의미 있는 출력의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즉 내가 뭔가를 알게 된다는 결과가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을 가지고
세상을 해석해서 알게 된다는 겁니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런 개념이 없으면 뭘 봐도 모른다는 겁니다.
한 스님이 하직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밖에 나갔을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조주를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그저 보았다고만 해야 되겠지요.”
“나는 한 마리 나귀인데 그대는 어떻게 보느냐?”
잉카 사람들이 스페인 함대를 처음 맞았을 때
그들은 스페인 함대의 배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긴 배를 본 적이 없어서
왜 물결이 이상하게 울렁거리는지 몰랐고
차츰차츰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바다 위에 떠 있는 걸 보게 된 것이죠.
우리의 인지 구조상 개념이 없으면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관념, 표상, 상징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은 어디서 생겼습니까?”
“이것은 생긴 것이지만 돈은 생기고 없어지는 데 속하지 않는다.”
“원래 그런 것입니까?”
“이것은 원래 그런 것이지만 돈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관념을 생기게 해서
스스로가 분별한 세상을 인지합니다.
그리고 그 분별을 극복해
원래의 일체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분별할 줄 알아야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선일체는
단순한 권장 사항이 아니라 필수 규범입니다.
뇌과학 정도가 아니라
인식과 행동의 원리를 이미 다 정리한 유식학 덕분에
대승불교는 마음 한 글자만 들고도 다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현대인들이 불교의 뒷배를 전혀 모르고
선불교는 마음 心자 하나만 이야기하니, 참 무식하다고 여겼던 것이죠.
그런데 그런 선불교의 교장의 전통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상태라서
우리가 어렵게 경전을 통해 그 모습을 찾아내지 않으면
우리는 이른바 멍청한 성자를
구도자의 바람직한 모습으로 삼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맑으면 될 일이지
무슨 쓸데없는 지식을 얻고 쌓으려 하는가?
생각을 여의라고 하는데, 책을 읽고 있으니
이게 무슨 엉뚱한 공부인가?
언어도단이라고 하는데
왜 자꾸 개념, 관념을 가지고 놀려고 하는가? 이런 식이죠.
“조사의 뜻과 경전의 뜻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조사의 뜻을 알면 바로 경전의 뜻을 안다.”
감계수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사들의 체험과 견해를 불보살의 경론과 대조하여 감정했을 때
그 위치가 맞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흉금지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체험만을 생각하고
경론을 무시하는 선을 말합니다.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은
그런 선수행은 올바른 선이 아니라는 말이겠죠.
“무엇이 옷 속의 보배입니까?”
“이 한 물음은 무엇을 꺼려 하느냐?”
“이것은 물음입니다. 무엇이 보배입니까?”
“그렇다면 옷까지도 잃어버린다.”
연기와 유식을 이해하는 초입에는
도대체 왜 선 공부가 이런 부류와 함께 있는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이것은 꽤 깊이까지 들어가도
겨우 표면적으로 회통이 될 뿐입니다.
구분이 안 되면 옷까지 잃어버립니다.
그런 사정이니 당연히 둘을 함께 가지고 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조사서는 말로 말을 뒤집는 공부이다 보니
말을 공부하고 있는 이들은 말에 치이고
말로 뒤집히고, 말로 주눅 들고, 말로 고난에 처합니다.
아주 지긋지긋하고 끔찍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몰려 봐야
말이라는, 개념 관념이라는 수단이
처음부터 끝까지 방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단순한 견해가 아니라
느낌으로 와닿아야
말이 마치 물건으로 생긴 도구처럼 보입니다.
두 거울이 마주하면 어느 것이 더 밝습니까?
그대의 눈꺼풀이 수미산을 덮는다.
말을 말로 여기지 못하면 말에 묻히고 덮힙니다.
그러나 또한 묻고 덮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상황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말을 이해한 다음에
그것을 말로 여기는 힘 있는 자리까지 올라와야 합니다.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고
숟가락에게 고사를 지내지는 않습니다.
신발 신고 다닌다고
신발에게 예배하지는 않죠.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신념에게
일생을 헌신 봉사하면서 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옥이 있습니까? 지옥이 없습니까?”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느니라”
“어째서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합니까?”
“마음을 따라 짓는 바 일체 악업이 곧 지옥이 있음이요.
만약 마음이 물들지 아니하면
자성이 공한 까닭에 곧 지옥이 없느니라.”
아는 것을 따라가면 그곳이 곧 지옥이고
아는 것에 물들지 않으면 지옥은 없습니다.
읽어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물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르면 그냥 태생 지옥입니다.
“무엇이 만법의 근원입니까?”
“용마루, 대들보, 서까래, 기둥이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 기둥 위 서까래를 받치는 받침목이
자세를 잡고 있음을 모르느냐?”
“한 지붕 아래에
천당과 지옥이 서로 수작을 걸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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