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선과 깨달음, 마음에 점찍기

Buddhastudy 2024. 12. 12. 19:20

 

 

어떤 암자의 주지가 시주를 받으러 오니

감자가 말하길

바로 말하면 시주를 하겠소.”

그리고는 마음 자 하나를 써놓고 물었다.

이게 무슨 글자예요?”

마음 자입니다.”

그러자 감자가 다시 자기 아내를 불러다 물었다.

이게 무슨 글자요?

마음 자입니다라고 똑같이 말했다.

그러자 감자가

내 촌뜨기 마누라도 암자의 주지가 될 수 있겠군.”

그 중이 아무 말도 못했고

감자도 시주를 하지 않았다.

 

불교 전체를 한 글자로 줄이면

, 아니면 마음 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보면 텅 빈 공이고

뒤로 보면 오직 마음 하나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래서 선에서도 마음 자 글자가

꽤 자주 등장합니다.

 

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전설의 고향 버전입니다만

아주 오랜 옛날에 아는 것이 없던 노파가

큰 스님을 찾아가 불법을 물었습니다.

스님은 어려운 이야기 다 빼고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이야기를 전해주며

네 글자로 즉심시불이라고 전해줬습니다.

 

그런데 한자를 모르는 할머니는 말을 잘 못 알아들어

즉심시불 짚신시불로 이해하고 맙니다.

혹설에는 짚신 세 벌로 들었다고도 합니다만

어쨌거나 열심히 짚신과 부처를 같이 잇던 노파가

마음이 크게 열려 도를 이루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쇼 라즈니쉬는

스승이 가짜라도 제자가 진심이면

거기서 깨달음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 일화에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스승의 말을 믿고

그렇게 행한 제자와

제자가 물 위를 걷는 것을 보고

혹시 자기도 하며 따라 들어가 물에 빠지는

가짜 스승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 그대로 스승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은

짚슨 할머니의 화두처럼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공부하는 이의 진지함과 정성이 결정할 뿐입니다.

 

선 공부라고 다르겠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짚신이 부처 맞습니다.

마음의 점을 찍으면 짚신도 부처입니다.

그래서 마음 도장이라 합니다.

마치 도장을 선명하게 찍듯이 마음 역시 분명하게 깨달아 확인함으로

마음 도장이라고 합니다.

 

무업 스님이 마조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와 비밀리에 전한 마음 도장입니까?”

스님은 지금 들떠 있으니 우선 갔다가 다른 때에 오시게.”

무업이 막 나가는데 마조가 불렀다.

스님

무업이 머리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이냐?”

무업이 곧 알아차려 깨닫고는 절을 하니 마조가 말했다.

이 둔한 사람아, 절은 뭐하러 하나?”

 

마음은 항상 움직이며

우리는 마음을 이리저리 쓴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다니면서

자기가 마음을 낸다고 여깁니다.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따라다니고 있는 그 시선을 느끼면

한순간 도장을 찍을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합니까?

움직이면 죽는다.

움직이지 않을 땐 어떠합니까?

여전히 옛 무덤을 지키는 귀신이다.

 

따라다니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움직였다가 멈추었다가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그런 식으로

내 시선 밖에서 옮겨 다닙니다.

 

그런데 사물들을 내게 비추어 주는 빛이나 허공은 그렇지 않죠.

물론 더 크게 보면 아닙니다만

그 배경 맥락을 찾아내면

우리는 조금 가까워집니다.

 

마음도장 이야기가 나왔으니 덕산 스님을 빼놓을 수 없네요.

당나라 때 스님은 금강경의 왕좌로

아예 별명이 속세 때의 성에 금강을 붙인 주금강이었습니다.

이 스님은 항상 봇짐에 금강경 풀이를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덕산이 길을 가는 도중 점심 먹을 시간이 되어

떡 파는 노파를 만납니다.

노파가 물어옵니다.

그 걸망 속에 뭔 책이요?”

금강안경 소라는 책이오만

음 그래요? 학식이 있는 스님이니 제가 하나만 물어봅시다

그러시구려.”

근데 대답을 못 하면 떡 안 팝니다.”

메라?”

 

덕산이 다소 궁금증이 일면서 질문을 하라고 합니다.

경전을 줏어들은 적이 있는 뭐 좀 아는 노파 같습니다.

신심이 깊으면 그럴 수도 있겠죠.

 

금강경에 이런 말이 있는 줄로 압니다.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겠습니까?”

점심!”

점심은 고사하고 길거리 떡장수에게 한 판 당한 덕산은

굶은 채로 목적지인 용담으로 향합니다.

그 후 용담에서 머물다가

캄캄한 밤중에 금강경을 들고 보내던 와중에

숭신 선사가 촛불을 불어 꺼버리자 다시 캄캄해져

그 참에 깨달은 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음에 점을 찍은 이야기는

이처럼 다양한 버전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덕산 스님은 이렇게 공부를 정리합니다.


허공을 더듬고 메아리를 쫓는 것은 그대들 마음을 괴롭힐 뿐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그릇된 것임을 깨칠 것인데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마조스님은

그대들은 모두 각자 스스로의 마음을 알면 될 뿐,

내 말은 기억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대들은 각자 스스로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합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시불은

괜한 훈계가 아니라

마음밖에 없다는 삼계유심과 더불어

마조스님의 전체 법문입니다.

 

마음이 부처이고

또 삼계는 마음이므로

일체법은 마음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님이 없다.

 

무업 스님이 마조에게 찾아왔습니다.

무업 스님은 풍채가 훌륭하고 목소리가 종소리같이 우렁찼는데

이것을 본 마조가 말합니다.

으리으리한 불당인데, 그 속에 부처가 없구나

무업이 묻습니다.

삼승의 학문은 대강 그 뜻을 살펴보았습니다만

늘 듣기로 선문에서는 바로 이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알지 못하는 마음이 곧 이것이고

다시 다른 물건은 없다네.”

 

그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면

왜 도장을 못 찍겠습니까?

그런데 허공이 물에 젖습니까?

허공이 불에 탑니까?

 

알 수 없는 것을 알고자 하는데,

알지 못하는 그것 자체가 또한 그것입니다.

하지만 마음 도장을 찍어보려는 시도는 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와

비밀리에 전한 마음 도장입니까?”

 

 

자기 마음 등기하는데 왜 남의 인감을 찾느냐고

조사께서 돌아서서 면벽하신 일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