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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선과 깨달음, 의식수준과 선문답

Buddhastudy 2024. 9. 25. 19:24

 

 

철학자 김용옥 교수는

하나의 정신문화가 다른 문화에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은

전달하는 문명은 물론이고

전달받는 문명에게도

그것을 전달받을 수 있는 수용성

즉 개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번역해서 이해할 수 없으면

그것은 전달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례되었을 당시

인도 불교의 공개념이 쉽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중국에

그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도교에 이미 있었던 [빌 허]

텅 비었다는 뜻이 []라는 개념이

불교의 []을 수용하는 개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을 찬성하고 반대하고를 떠나서

저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도 불교에는 없는

중국 불교의 독특한 문화이자 방편이

바로 []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선이라는 문화가 중국에서 일어난 이유가

바로 불교와 도교의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도교 역시 깨달음 전통입니다.

도교에는 비이원의 진리를 보고 설명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도덕경의 경구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아도 보이지 않음을 이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음을 희라 하며

잡아도 잡히지 않음을 미라 한다.

앞에서 맞이해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고

그 뒤에서 따라가도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이어지니 뭐라 이름 붙일 수 없으며

결국 없음의 세계로 돌아가니

형상 없는 형상이라 한다./

 

도교의 전통은 이런 식으로 비어 있는 도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항상 최고이자 영원한 그것을 가리키면서

그것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발생한 선이 바로 그렇습니다.

선문답은 비록 겉으로는 다양한 부조리의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묘사할 수 없는 언어도단이자

분별 이전의 허공을 가리키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 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그것 외에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선은 항상 최고의 수준, 영원한 그것을 가리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내가 말해주고자 하나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다.”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니가 바로 그다.”

 

 

I AM THAT 채널의 의식 수준과 깨달음 재생 목록은

의식 수준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선문답에는 수준 이야기가 전혀 없지 않나요?

 

나는 이 수준에서 질문하니까

너는 다른 수준에서 답하면 안 된다

이런 이야기가 전혀 없죠.

 

이건 두 가지 의미로 봐야 합니다.

하나는 모든 수준에서 선무답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선문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실재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손가락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손가락질입니다.

 

다른 하나는 의식수준이라는 것이

뭔가를 많이 아는 수준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의식수준은

자기 생각의 틀, 탐진치의 에고가 비워진 수준, 내가 줄어든 수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선문답에는 수준이 없어도

선문답을 주고받는 사람들에게는

그 의식 수준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 스님께서 설봉, 흠산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설봉이 갑자기 종지에 든 물을 가리키니

흥산이 말했다.

물이 맑아서 달이 비친다.”

 

설봉이 말하길

물이 맑아서 달이 비치지 않는다.”

 

그러자 스님께서 물종지를 걷어차고 나가버렸다.

 

의식 수준이 수분각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

저 장면은 의심할 여지없이

스님께서 설봉과 흠산을 꾸짖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은 똑같이 맑은데

한 사람은 달이 보이고

한 사람은 달이 안 보인다고 하니

보는 그것에 초점이 가 있는 것이 아닌 것이죠.

 

그런데 의식 수준이 수분각보다 위에 있다면

저 장면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보이거나 안 보이거나

걷어차거나 말거나

만법의 차별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보는 이의 문제입니다.

 

같은 선문답도

의식수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도대체 정답이 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정답은 항상 묻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앞서 보았죠?

네가 바로 그다.”

 

오늘의 선문답입니다.

상황을 보고 한마디 일러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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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앞에 세우는 당간지주의 깃대가 부러졌는데

어느 스님이 주지에게 물었다.

 

깃대가 범부가 되었습니까? 성인이 되었습니까?”

범부도 성인도 되지 않았다.”

 

끝내 무엇이 되었습니까?”

땅에 떨어졌느니라.”